중원경은 신라시대의 지방행정구역이다. 신라의 5소경 가운데 하나이며 충주지역에 설치되었던 지방통치거점이다. 본래 삼한시대 마한의 소국이었던 백제국이 성장하면서 그 지배 영역에 포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5세기에 이르러 고구려가 중원(충주)지역까지 남하하고 국원성을 설치하였다. 6세기 신라 진흥왕의 영토 확장으로 신라의 영역이 되었고 557년 국원소경이 설치되었다가 757년 군현개편으로 중원경이 되었다.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하며 남한강 수운을 이용한 수상교통과 계립령로(죽령로)를 이용한 육상교통이 발달하였다. 현재 충청북도 충주시 일대로 추정된다.
신라의 5소경(小京) 가운데 하나이며 충주지역에 설치되었던 지방통치거점이다. 본래 삼한시대 마한의 소국이었던 백제국이 성장하면서 그 지배영역에 포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5세기에 이르러 고구려가 중원(충주)지역까지 남하하고 국원성을 설치하였는데, 당시의 상황은 「충주고구려비(忠州高句麗碑)」에 비교적 잘 나타나 있다. 6세기 들어 진흥왕이 영토를 확장하면서 신라의 영역이 되었고, 557년 국원성에 국원소경(國原小京)이 설치되었다.
신라 통일기의 뛰어난 문장가였던 강수(强首)가 자신을 중원경(中原京) 사량인(沙梁人) 출신이라 했던 점을 토대로 할 때, 신라가 귀족과 백성들을 이 지역으로 옮겨 왕경을 본 뜬 행정구역을 획정하고 지방통치거점으로서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우륵과 같은 가야계 백성을 거주케 하여 지방문화의 중심지로서 역할하도록 한 것도 눈에 띈다. 이와같이 중원경에 왕경 출신자들이 옮겨지고 기록에 남을 정도로 활발히 활동했던 인물들이 관련된다는 점에서 나머지 소경에 비해 그 정치적 위상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발굴조사에 따르면 탑평리 유적은 출토유물의 양상으로 보아 중심연대는 대체로 국원소경이 조영되기 시작한 6∼7세기의 것으로 여겨지는데, 기와류가 많지 않고 대형 건물지가 확인되지 않아 관청시설이 있던 중심구역은 아니고 외곽 시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치소에 대해서는 탑평리 7층석탑 주변지역으로 보는 견해, 장미산성으로 보는 견해, 충주 교현동의 봉현성으로 보는 견해, 충주산성으로 보는 견해 등으로 나뉘어 있어 면밀한 고고학적 조사가 요구되는 상황이다.
명칭과 관련하여 전하는 구체적 기록은 없으나 지명을 통해 의미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중원경이 중앙의 의미를 지니고 있고, 주변에 위치한 탑평리 7층석탑이 속칭 '중앙탑'으로 불린다는 사실을 참고할 때, 일찍부터 중원(지역)이 한반도의 중심이라는 지리적 인식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557년(진흥왕 18) 국원소경이 설치되었으며, 757년(경덕왕 16) 군현개편으로 중원경이 되었다. 다만 『삼국사기』 열전에 강수가 중원경 사량인이라는 기록이 있어 신라 중대 초기부터 중원소경 또는 중원경으로 불렸을 가능성도 있다. 현재 충청북도 충주시 일대로 추정된다.
중원경의 위치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다만 『삼국사기』 에 따르면 673년(문무왕 13)에 성곽을 축조하였으며 그 둘레가 2,592보(약 4.6㎞)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