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높이 203㎝, 너비 55㎝이다. 중원 고구려비라고도 하였다. 입석마을에 글자가 새겨진 돌이 있다는 정보에 따라 1979년 4월 8일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에 의하여 발견, 조사되었다.
발견 당시 전면(全面)에 바위이끼가 많이 끼어 있어 육안으로는 물론 탁본을 하여도 판독이 어려울 정도였다. 석비의 형태는 석주형(石柱形)으로서 자연석을 이용해 각자면(刻字面)을 갈고 비문을 새겼다.
앞면과 한쪽 옆면에서만 글자를 확인했으나 뒷면과 또 한쪽의 옆면에서도 글자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석질은 견고한 화강암으로 글자의 흔적이 뚜렷하게 보인다.
이렇게 볼 때 4면에 모두 글자를 새긴 4면비(四面碑)로서 글자는 앞면이 10행으로 각 행 23자씩이고, 한쪽 옆면은 7행 23자씩이며, 또 한쪽의 옆면은 6행이 분명한데 뒷면은 너비로 보아서 9행 정도로 추측된다.
비문의 서두에 ‘고려대왕(高麗大王)’이라는 문자가 보이고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제위(諸位)·하부(下部)·사자(使者)’ 등 모두 고구려의 관등뿐이며, 비문 중의 ‘고모루성(古牟婁城)’은 광개토왕릉비에 보이는 성이므로 고구려의 비임이 분명하다.
석비의 형태가 광개토왕비와 흡사해 두툼하고 무게가 있어 보이며, 자체(字體)도 고졸한 예서풍(隷書風)이다. 자경(字徑)은 3∼5㎝이며, 마멸이 심해 정확한 글자 수는 알 수 없으나 대략 400여 자로 추정되었다.
문헌적으로 고찰해 볼 때,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광개토왕(廣開土王)의 북벌남정(北伐南征) 못지않게 장수왕(長壽王)은 남하정책을 단행해 평양성 천도를 비롯해 한강 유역에까지 이른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이곳 한강 유역을 따라 상류에까지 척경(拓境)하고 그 기념적인 석비를 세웠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이 석비의 건립연대를 5세기대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중원비는 비문의 마멸이 심해 연구에 큰 어려움을 주고 있으며, 지금까지 비문의 판독, 그에 따른 내용해석과 용어, 건립연대, 건립목적 등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우선 비문의 판독에서 내용 요소를 인명·용어·지명으로 분류해 검토해 보면, 인명에서 쟁점으로 부각되는 것은 세 가지 정도로 꼽을 수 있다. 첫째, ‘고려태왕조왕령(高麗太王祖王令)’은 고려태왕(高麗太王)과 조왕(祖王)의 실체 및 양자 간의 관계, 그에 대한 해석에 따라 비의 건립연대를 밝힐 수 있는 결정적 단서로 주목받는 부분이다. 고려태왕과 조왕의 관계는 ①고려태왕의 조왕, ②고려태왕=조왕, ③고려태왕과 조왕으로 대별된다. 그 실체는 ②의 경우에만 고려태왕과 조왕을 장수왕(長壽王)으로 보고, ①에서는 고려태왕과 조왕을 각각 광개토왕(廣開土王)과 고국원왕(故國原王), 장수왕과 소수림왕(小獸林王), 문자명왕(文咨明王)과 장수왕으로 다르게 이해하였다. ③은 고려태왕은 장수왕으로 보지만 조왕을 ‘할아버지왕’이 아닌 별도의 인물로 파악했다. 또한 ‘령(令)’에 대해서도 ‘명령’, ‘율령’, ‘인명’으로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둘째 매금기(寐錦忌), 태자공(太子共), 고추가공(古雛加共)의 문제이다. 매금기에 대해서는 우선 ‘기(忌)’에 대해서 동사로 보는 설과 명사(인명)로 보는 설로 나눌 수 있다. 동사설로 ‘꺼리다’라고 해석하여 ‘신라매금이 중원지방에 오기를 꺼려하여 5월 중에 오지 않았고, 12월에서야 왔다’고 보기도 하고, ‘공경하다’로 해석하여 ‘신라매금이 공손히 응했다’고도 보았다. 또한 명사로 보고 매금의 인명으로 보기도 한다. 태자공과 고추가공은 ‘공(共)’의 해석과 태자·고추가의 실체, 나아가 양자의 관련 여부에 대해 의견이 엇갈린다. 먼저 ‘공’을 ‘함께’라는 뜻의 부사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태자의 인명으로 보는 견해가 대세로 굳어졌으나 태자의 실체 및 고추가 공과의 동일인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다.
셋째 개로(盖盧)를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로, 개로를 개로왕(蓋鹵王)으로 비정하거나 고구려 관리로서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의 인명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비문의 내용에서 ‘수천(守天)’, ‘상하(上下)’, ‘궤영(跪營)’, ‘태곽추(太霍鄒)’, ‘모인(募人)’의 용어에 대해서도 여러 견해가 있다.
그리고 비문에는 우벌성(于伐城)과 고모루성(古牟婁城)의 고유지명이 나오는데 그 위치에 대한 견해가 세 가지로 나뉜다. 우벌성을 ‘서라벌성(徐羅伐城)’의 약칭으로 보는 견해와 중원비가 서 있는 중원지방으로 보는 견해, ‘이벌지현(伊伐支縣)’과 연결시켜 순흥(順興)에 비정하기도 한다. 고모루성은 충남 덕산설, 충북 음성 고산성(高山城)설, 포천 고모리산성(古毛里山城)설이 제기되었다. 이 밖에 한강 하류 강북 지역과 남한강 상류지역 혹은 고구려 남진 교통로로써 원주와 춘천을 지목하기도 했다.
비의 건립 목적·배경에 대한 연구로는 첫째로 개인 공적비(功績碑)로 보고 그 주인공을 태자공, 다우환노(多亏桓奴), 장수왕으로 하는 견해, 둘째, 정계비(定界碑) 혹은 척경비(拓境碑)로 규정한 견해, 셋째, 국왕의 순수비(巡狩碑)·순행비(巡行碑)로 이해하는 견해, 넷째, 고구려와 신라간의 회맹비(會盟碑), 다섯째로 기존 양국관계의 재확인·유지를 위한 노력의 산물 혹은 고구려 영향권에서 이탈해간 신라를 회유·포섭하여 예전 관계로의 회복을 호소하기 위한 장수왕의 정치적 의지의 산물로도 파악했다.
또한 그 외 연구사적 쟁점으로 3면비·4면비인가의 문제와, 시작면이 어느 면인지 하는 문제 그리고 서체 등에 관한 것이 있다. 2000년 고구려연구회의 연구에 따라 4면비임은 확실해졌으나 시작면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석비가 있는 마을 주위에는 골짜기마다 많은 고분이 있고, 그리 멀지 않은 탑평리 7층석탑 주변에서는 삼국시대의 기와들이 수집되며, 뒤쪽 장미산(長尾山)에는 삼국기 축조로 보이는 산성이 있다. 그리고 불과 4㎞ 직선거리인 북쪽 봉황리에는 삼국시대의 마애불상들이 있다.
특히 면계(面界)를 이루는 노은면에서는 일찍이 “건흥5년세재병진(建興五年歲在丙辰)”의 명문이 있는 고구려시대 금동광배(金銅光背)가 출토된 일이 있다.
이러한 모든 점을 종합해 볼 때, 이곳 입석마을을 중심한 역사·지리적인 여러 가지 문제를 생각할 수 있는 동시에 이 석비 건립의 시대적 배경과 입지적 조건 등을 이해할 수 있다. 국내에서 발견된 유일의 고구려비이므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하겠다. 또한 5세기 고구려·신라 관계, 고구려 관등조직, 인명표기방식 등 문헌에 없는 내용이 담겨 있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