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교는 그 연원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일반적인 통설로는 유럽의 재침례파(Anabaptist)와 이들 가운데 네덜란드에서 활동하였던 메노나이트파(Mennonite), 그리고 17세기 영국의 회중교회에서 분파된 청교도들로부터 유래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침례교회란 이름이 정식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1644년쯤 영국침례교회의 발현에서부터이다.
침례교는 신약성서를 신앙의 모본과 최고 권위로 삼고 신약성서의 원리들을 보존하는 것을 강조한다. 만인사제(萬人司祭)와 정교분리, 개교회주의를 지향하는 침례교는 특히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개인적 신앙고백에 의한 침례만 인정하며, 의식의 방법에서 침수례를 두드러지게 강조한다. 이 때문에 초창기에 박해를 많이 당했으며, 로마 가톨릭은 물론 영국 국교회, 루터교, 장로교 등으로부터 '침례교도'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침례교는 종교의 자유를 찾아 건너온 청교도들과 함께 미국에서 정착, 대각성부흥운동을 거치면서 세계적 교단으로 성장하였으며, 미국남침례회는 단일교파로는 개신교 중 세계에서 제일 큰 교파로, 가장 많은 해외선교사를 파송한 교단이 되었다.
한국침례교회의 역사는 1889년에 파송된 캐나다의 독립선교사 펜윅(Fenwick,M.C.)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는 다른 교단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서울이나 평양과 같은 대도시가 아닌 함경도 오지(奧地)와 간도 지역을 주요 선교지로 삼았으며, 나아가 시베리아와 몽고에까지 선교의 손을 뻗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한국의 침례교회는 초창기부터 교세 확장에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펜윅은 재정적으로 선교지원을 받지 못하는 독립선교사라는 어려운 조건에서도 개인전도와 순회선교라는 나름의 선교 방식을 통하여 1906년에는 충청남도 강경에서 대회를 열고 대한기독교회를 조직, 46개조의 회칙을 만드는 결실을 맺기도 하였다.
3·1운동 후 일제가 포교 허가제를 포교 신고제로 바꾸자 펜윅은 대한기독교라는 교명을 동아기독교(東亞基督敎)로 바꾸어 등록하였다. 그러나 1933년 교회라는 명침이 세속화 되었다는 이유로 동아기독대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1940년에는 동아기독대라는 명칭이 천황군대에 저항감을 준다고 느낀 일본의 요구로 다시 동아기독교로 개칭했다. 일제 말기인 1944년에 동아기독교는 성결교, 구세군, 안식교와 함께 일제에 비협조적이고 재림설(再臨說)을 강조한다는 이유로 교단을 해체당하였다.
해방과 더불어 교단이 재건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만들기는 하였지만, 동아기독교는 원산을 총부(總府)로 하여 만주와 시베리아 일대에서 주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남북분단으로 많은 타격을 받았다.
게다가 1946년에 감목체제를 회중체제로 바꾸고 임원 명칭도 다른 교파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명칭으로 변경하면서 교단 분열이 일어나 10여 개의 교회가 대한기독교회라는 명칭으로 분립해 나갔다.
한편 동아기독교는 1949년충청남도 강경에서 총회를 개최하고 교명을 대한기독교침례회로 변경하였으며, 이 총회를 계기로 대한기독교침례회는 미국남침례회와 손을 잡게 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 초반부터 미국남침례회 선교부의 자금이 유입되자, 선교부와 총회의 정책적 갈등, 타교단 교역자의 무분별한 영입으로 인한 부작용, 총회 내의 여러 파벌, 그리고 한국인과 선교사들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결국 1959년에 가서 기독교한국침례회와 한국기독교침례회라는 두 개의 교단으로 분열하고 말았다. 이 분열은 1968년에 가서 소장파 목사들의 반선교사 운동과 교단주권 회복운동의 결실로 극복되어, 한국침례회연맹이라는 통합교단이 출범하게 되었다.
그 후 한국침례회연맹은 1976년에 교명을 다시 기독교한국침례회로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기독교한국침례회는 근래에 침례교 세계대회를 개최할 정도로 세계에서 주목받는 교단으로 성장하였다.
기독교한국침례회 외에도 1946년 동아기독교가 감목체제를 회중체제로 바꾸고 임원 명칭도 변경하는 등 조직을 일신하려고 했을 때 일제하의 구체제를 옹호하는 교인들이 분리하여 조직한 대한기독교침례회와 1954년에 들어온 미국성서침례회에서 비롯된 한국성서침례회, 1971년에 들어온 미국선교침례회에서 비롯된 대한선교침례회연합회가 있으나 기독교한국침례회에 비해 이들 교단의 활동은 미미한 편이다.
침례교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의식, 교리, 조직, 대사회적 관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침례교는 다른 교파와는 달리 물 속에 담그는 침례식을 통해 세례를 주고 있다.
또한 침례교는 모태교인(母胎敎人)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있다. 그 이유는 어린 아이는 자기의 믿음을 보여줄 수 없으므로 유아세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며 나아가 좋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침례교는 로마 가톨릭이 7가지의 성사(聖事)를 인정하는 것과 달리, 다른 개신교 교파들과 마찬가지로 침례식과 성찬식만을 성사로 인정한다. 그렇지만 성찬식에 대한 입장에서는 다른 개신교 교파들과 상이한 측면을 지니고 있다.
즉, 로마 가톨릭이 지지하는 화체설(化體說)과 칼빈과 루터가 지지하는 공재설(共在說)은 비록 그리스도가 어떻게 임재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하지만 성찬식에서 그리스도가 떡과 포도주에 임재한다고 보는 점에서 견해를 같이 한다.
반면 침례교는 상징설(象徵說)을 채택하여 그리스도가 떡과 포도주에 실제로 임재하는 것이 아니며 떡과 포도주는 단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교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침례교는 성경에 무한정의 권위를 부여하며 성경무오설(聖經無誤說)을 지지하고, 그 외의 특별한 신조나 교파신학을 수립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런 점에서 침례교에는 성경에 대한 교단의 권위있는 해석보다 개개인의 자유로운 해석을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
즉, 침례교는 성경에 무한정의 권위를 부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신도 개개인이 누구나 자신의 양심에 따라 성경을 해석할 수 있으며, 과학과 교육에 의해 새로운 해석이 가능할 때에는 그에 따라 신앙을 수정할 수도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이러한 입장은 침례교가 영적 개인주의와 양심의 자유, 그리고 영혼의 자유와 개인의 책임을 다른 어느 교파보다도 강조하여 모든 신자들이 똑같이 제사장의 지위를 지닌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조직적인 측면에서 침례교는 철저한 개교회주의(個敎會主義)를 지향한다. 비록 개교회가 모인 지방연합회, 그리고 지방연합회가 모인 총회가 있기는 하지만 이들 삼자는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호협동의 관계를 지닌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침례교의 교단조직은 한마디로 개교회주의에 입각한 협동적 연합체라고 할 수 있다.
침례교의 이러한 교단조직은 로마 가톨릭은 물론이고 개신교의 다른 교파의 교단조직과 비교할 때 두드러진 특징으로 지적된다.
이처럼 침례교의 교단조직이 중앙집권적인 형태가 아니라 회중제도라는 민주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성직자와 평신도는 기본적으로 동등한 권한을 가진다. 비록 개교회 내에 목사와 집사라는 직분이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직분은 계급의 직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기능의 직분으로 이해된다.
침례교는 대사회적인 관계에서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강력하게 주장한다. 즉 국가는 특정 교파를 선호해서는 안 되며 그 어떤 종류의 종교적인 견해에 대해서도 처벌할 권리가 없으며 특정 종교에 대한 지원을 위해 세금을 부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입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침례교는 다른 교파에 비해 종교의 자유 획득에 일정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하나, 한편으로는 교단 유형론의 입장에서 볼 때 교회형이라기보다는 섹트형에 가까운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침례교는 교회연합운동에 대해서는 비교적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2013년 현재, 기독교한국침례회 소속 교회는 2833개에 이르며, 목사와 전도사를 합한 목회자 수는 5533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