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할아버지는 찬성(贊成) 하경복(河敬復)이다.
1453년(단종 1) 무과에 급제, 사용(司勇)이 되었으며 1458년(세조 4) 겸사복(兼司僕), 1466년 통정대부(通政大夫)로서 강계부사(江界府使)가 되었다.
1467년 중국에서 여진정벌을 위한 원군을 요청하자 대장(大將) 강순(康純) 휘하의 비장(裨將)으로 어유소(魚有沼)·남이(南怡)와 함께 출정, 정건주위(征建州衛)의 논공행상시 3등으로 노비 6구(口)를 하사받았다.
1470년(성종 1) 평안서도절도사(平安西道節度使), 1471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제수되어 국방에 힘쓴 공로로 1475년 가정대부(嘉靖大夫)로 승자되었다.
이 해 다시 평안도절도사를 거쳐, 1476년 전라도절도사에 제수되어 남북으로 왜와 여진의 침입을 방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편, 이 해에 변방절도사 재직 시에 여진에게 노략질 당한 인명과 가축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고 숨겼다는 삼사(三司)의 격렬한 탄핵을 받았다.
왕이 계속 그를 두둔하다가 결국 처향(妻鄕)인 초계(草溪)로 유배시켰으며, 이후 양계(兩界)에 충군(充軍)시켰다. 이듬해 고신(告身)을 환급받고, 1478년 형조참판, 1479년 충청도절도사, 1484년 한성부좌윤·충청도관찰사를 지냈다.
이듬해 전주부윤(全州府尹), 1486년 무신으로서 특진관(特進官)에 발탁되었다. 이어 첨지중추부사·영안북도절도사·동지중추부사·경상좌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1494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같은 해 경상우도수군절도사에 제수되었다. 1497년(연산군 3) 노병(老病)을 이유로 사직소를 올렸으나, 왕이 그의 청간(淸簡)함을 칭송하고 허락하지 않아 1498년 동지중추부사 겸 부총관에 제수되었다.
이어 경상우도병마절도사·충청도절도사를 계속 역임하였다. 청렴하다는 평을 받았으며, 당시 국방연구에 있어 중요한 인물이다. 시호는 경절(敬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