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천안 출신.
1919년 3월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칠곡리에서 이유석(李裕奭)·이근수(李根洙)·이덕순(李德順)·최은식(崔殷植)·이희룡(李熙龍)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였다.
4월 1일 오후 8시경 원곡면사무소 앞에 모인 1,000여 명의 시위군중은 등불과 횃불을 들고 양성면으로 행진하여 가던 중 양성면에서 오던 시위대열 1,000여 명과 만나 합세하여 태극기를 선두에 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일본 순사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 등을 습격하여 건물과 기물을 파기하는 등 격렬한 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하여 해산되고, 많은 사람들이 붙잡혔다.
이때 홍찬섭은 피신하여 붙잡히지 않고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들어가 지방선전대로서 활동하다가 붙잡혀 7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