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비는 1758년(영조 34) 조선 중기의 문신 · 학자 정경세(鄭經世, 1563∼1633)의 학문적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신도비로, 2000년 12월 4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어, 진주정씨종중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비신과 귀부, 이수가 모두 완전한 형태이다.
정경세는 경상도 상주 출신으로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이며,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수제자이다. 문과를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고 내외요직과 청환(淸宦)을 역임한 다음 이조판서 · 대제학에 이르렀다. 사후에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고 문장(文莊)이란 시호가 추서되었다. 문장과 성리학에서 명성을 떨쳤으며 특히 기호(畿湖)계의 김장생(金長生)과 함께 예학(禮學)에 밝았다. 저서로는 문집인 『우복집』과 『주문작해』 · 『상례참고(喪禮參考)』 등이 있고,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 대구의 연경서원(硏經書院), 강릉의 퇴곡서원(退谷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정경세는 퇴계 이황과 서애 유성룡의 학통을 전수하여 상주권에서 서애의 학통을 확장시켰다. 또 송준길(宋浚吉)이 그의 사위가 되면서 그의 학문은 영남과 기호지방에서 서로 교류하게 되었다. 사후에 송준길이 행장(行狀)을 짓고, 송시열(宋時烈)이 시장(諡狀)을, 이준(李埈)이 묘지(墓誌)를, 권유(權愈)가 묘표(墓表)를 찬하는 등 그의 장갈문(狀碣文) 찬술에는 당대 서인과 남인의 명공(名公) · 석학(碩學)들이 동원되었는데, 이 신도비 역시 그 중의 하나이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비신이 오석(烏石)으로 되어 있다. 비의 전체 높이는 404㎝이며, 비신(碑身)의 높이는 223㎝, 귀부(龜趺)의 높이는 64㎝, 이수(螭首)의 높이는 115㎝이다. 비문은 해서체(楷書體)로서, 좌참찬 조경(趙絅)이 찬한 것을 이조좌랑지제교(吏曹佐郞知製敎) 이동표(李東標)가 썼다. 한편, 제전(題篆)은 권규(權珪)가 쓰고, 음기(陰記)는 정경세의 현손 정주원(鄭胄源)이 찬하고 6대손 정종로(鄭宗魯)가 썼다.
비의 규모가 장대한 신도비로서 보존상태도 양호하여 역사적 · 서지학적으로 귀중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