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 대풍헌 현판 일괄 ( )

목차
관련 정보
울진 대풍헌 현판 일괄
울진 대풍헌 현판 일괄
서예
유물
문화재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소재 대풍헌에 걸려 있는 19세기 무렵에 조성된 현판 12점.
정의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소재 대풍헌에 걸려 있는 19세기 무렵에 조성된 현판 12점.
개설

울진 대풍헌 현판 일괄은 울릉도와 독도를 관리하던 수토사들이 그곳을 가기 위해 머물렀던 곳인 대풍헌의 정면과 내부 마루에 걸린 현판 중 1910년 이전에 만들어진 12점의 현판을 말한다. 2012년 5월 14일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내용

대풍헌은 조선시대 평해군 구산포(현재 울진군 구산항)에서 울릉도·독도로 가는 수토사(搜討使)들이 순풍을 기다리며 머물렀던 장소이다. 대풍헌은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인데, 동쪽 한 칸이 온돌방이며, 나머지 3칸이 마루로 구성되었다. 대풍헌 정면과 내부 마루 상부에는 총 17점의 현판이 걸려있는데, 그 중 1910년 이전에 만들어진 12점의 현판이 문화재로 지정된 것이다.

현판의 목록은「기성구산동사(箕城龜山洞舍)」1점(1851년),「대풍헌(待風軒)」1점(1851년),「구산동사 중수기(邱山洞舍重修記)」1점(1851년),「영세불망지판(永世不忘之板)」6점(1870∼1878년),「구산동사기(邱山洞舍記)」1점(1888년),「동계 완문(洞稧完文)」1점(1904년),「중수기(重修記)」1점(1906년)이다.

「기성구산동사」와 「대풍헌」이라는 현판은 1851년(철종 2)에 대풍헌을 중수하면서 건물 밖에 내걸었던 현판으로 건물의 이름을 기록한 것이다. 「구산동사중수기」현판에는 권성도(權成度) 외 4명의 인물이 수토 임무를 봉행하기 위해 10여 칸을 중수하고 '대풍헌'이라 이름하여 현판을 걸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이 현판의 제작 시기는 1851년(철종 2) 6월이다.

「영세불망지판」은 모두 6점이 있는데, 파견된 수토사들이 구산동에 머물 때 마을 사람들에게 폐해가 있자, 마을에 물자를 지원해주거나 마을 사람들을 위로해준 인물들의 행적을 기록하여 남긴 것이다. 세부 목록을 기록하면, 「평해군수 심능무 이윤흡 영세불망지판(平海郡守沈能武李玧翕永世不忘之板)」(1870년)「월송만호 장원익 영세불망지판(越松萬戶張源翼永世不忘之板)」(1870년), 「평해군수 이용익 영세불망지판(平海郡守李容益永世不忘之板」(1871년), 「월송영장 황공 영세불망지판(越松營將黃公 永世不忘之板)」(1869년), 「전임 손주형 손말백 손익창 영세불망지판(銓任孫周衡孫沫栢孫益彰永世不忘之板)」(1878년), 「도감 박억이 영세불망지판(都監朴億伊永世不忘之板)」(1878년)이다. 「중수기」현판은 1906년(광무 10)에 대풍헌 중수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동계 완문」은 1904년(광무 8)에 구산 동계를 인정해 줄 것을 관에 요청하는 내용과 그 청원에 의해 관에서 발급해 준 내용을 함께 새긴 것이다.

의의와 평가

이 현판들은 조선 정부가 19세기에도 여전히 울릉도와 독도를 영토로 인식하고 실질적으로 지배·관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울진 대풍헌 현판」(심현용,『대구사학』제98집, 2010)
문화재청(www.cha.go.kr)
집필자
정정남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