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는 수도방위를 위해 한성부 주변의 행정적 ·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을 선정해 주 · 부 · 군 · 현의 일반적인 행정 체계와는 별도로 특수 행정 체계로 유수부를 설치, 운영하였다.
즉, 초기에는 고려의 국도였던 개성과 태조의 어향(御鄕 : 王家 先代의 관향)인 전주에 설치하였다. 후기에는 왜란과 호란을 겪은 뒤 한성부의 방위 체계를 강화하기 위해 멀리 떨어진 전주를 대신하여 강화 · 수원 · 광주(廣州)에 설치하여 개성을 포함하여 총 4도(都)를 운영하였다.
이곳은 태조가 개국한 곳일 뿐 아니라 고려의 옛 도읍지인 동시에 중국 사행(使行)의 유숙지인 태평관(太平館)이 설치되어 있는 곳으로서 중요시되었다.
따라서, 새로운 왕조의 수도인 한성부로 천도하게 되면서 구도(舊都)인 개성부를 통치하기 위한 특별한 조처가 요구되었다.
즉, 개성은 조선왕조 건국 후에도 태조 · 정종 · 태종 때에 잠시 조선왕조의 국도가 되었다. 그러나 1405년(태종 5) 한양으로 천도한 이후 개성의 관제는 크게 변화되어 개성유후사(開城留後司)가 설치되었고 유후, 부유후와 행정실무자들인 단사관(斷事官) · 경력(經歷) · 도사(都事) 각 1인씩을 두어 통치하였다.
그러다가 1438년(세종 20) 개성부로 개편하고 종2품 유수 2인을 두어 1인은 경기 관찰사가 겸임하게 하였다. 그 뒤 1485년(성종 16) 『경국대전』이 완성되면서 개성부의 직제는 유수 2인(1인은 경기관찰사 겸임), 경력 1인, 도사 1인, 교수 1인, 서리(書吏) 40인, 조례(早隷) 30여인으로 법제화되었다.
그 뒤 약간의 변동이 있었으나 대체로 이러한 직제가 지속되어 1865년(고종 2)에는 유수 2인(1인은 경기관찰사 겸임), 경력 1인, 분교관(分敎官) 1인, 검률 1인, 서리 50인, 조례 30여인 등이 소속되었다.
개성유수부는 1896년 관찰부로 개편되면서 부윤을 두었다가 다음 해 관찰부가 폐지되면서 다시 개성부로 환원되었다.
1906년 개성군으로 강등되었다가 1930년 12월 제령(制令) 제15호에 의해 지방 행정구역이 개편됨에 따라 부제(府制)가 실시되면서 다시 개성부로 개칭되었다. 이때 부외(府外)는 개풍군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