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근정전 ( )

서울 경복궁 근정전 정면
서울 경복궁 근정전 정면
건축
유적
문화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복궁에 있는 조선시대 국가의 중대한 의식을 거행하던 궁궐건물. 전각. 국보.
이칭
이칭
근정전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국보(1985년 01월 08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세종로, 경복궁)
정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복궁에 있는 조선시대 국가의 중대한 의식을 거행하던 궁궐건물. 전각. 국보.
개설

1985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정면 5칸, 측면 5칸의 팔작지붕 중층건물.

공포(栱包)는 다포계(多包系)이고, 구조는 전후 툇간 11량(前後退間十一樑)구조이다.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거나 정령(政令)을 반포하는 정전(正殿)으로, 때로는 사신을 맞아들이기도 하고 양로연(養老宴)이나 위로연을 베풀기도 하던 곳이다.

역사적 변천

현재의 건물은 1867년 중건된 것으로, 경복궁 창건 당시인 1395년(태조 4)에 지은 건물이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270여 년 만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중건 당시 태조 때의 건물을 원래대로 복구하지 않고 회랑(廻廊)을 단랑(單廊)에서 복랑(複廊)으로 바꾸고 월대(月臺: 궁전 앞에 있는 섬돌)도 새로 만드는 등 변화가 있었다.

현재의 근정전은, 경복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2000년부터 진행되어온 보수공사의 결과이다. 근정전의 보수는 건물을 지탱해주는 고주(高柱, 높은 기둥) 4개의 맞춤부분이 벌어지고 용마루와 처마가 처지는 등의 문제점이 발견되어 1층의 연목과 2층에 해당하는 부분을 완전히 해체하여 재조립한 대규모 공사로, 2000년 1월부터 2003년 10월까지 46개월에 걸쳐 약 72억 원의 사업비를 투입하여 완료하였다.

내용

기단부는 월대라 하며 이중으로 되어 있는데, 아래위층 월대 주위에는 긴 댓돌을 돌리고, 그 위에 하엽동자(荷葉童子)와 팔각 돌란대[廻欄石]로 구성된 석난간(石欄干)을 세웠다. 각 난간의 엄지기둥에는 12지상(十二支像)을 방위에 맞게 조각하여 정전을 상징적으로 수호하게 하였다.

계단은 앞뒷면에 각 1개, 좌우 측면에 각 2개씩을 두었다. 앞쪽 중앙계단에는 답도(踏道)를 마련하여 구름 속에 노니는 봉황을 새겼고 건물 내부의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다. 또, 내부의 가구(架構) 구성을 보면 바깥두리기둥[外陣柱]과 안두리기둥[內陣柱]을 기본으로 하고 여기에 다른 건물에서는 보기 힘든 귀고주[隅高柱]를 두었다.

뒷면 중앙칸 안두리기둥 사이에 보좌(寶座)를 마련하고 그 위에 어좌를 설치하였다. 어좌 뒤에는 일월오악병풍(日月五岳屛風)을 배경으로 삼아 사룡수(四龍首)를 조각한 삼절병(三折屛)을 두었다.

어좌의 상부에는 사각평면에 다출목(多出目)의 작은 공포를 짜고 네 귀를 모접이 한 뒤 다시 다출목의 작은 공포를 짜서 이른바 말각천장(抹角天障)형식의 보개(寶蓋)를 마련하였다. 그 중앙에는 쌍룡과 여의보주를 조각하였다.

보좌는 복련(覆蓮)과 앙련(仰蓮)을 새긴 연화대좌를 받침으로 하되 대좌의 옆면은 3단의 궁판으로 나누었다. 조롱동자처럼 조각한 동자를 사용해서 궁판을 구획하고 여기에 풍혈(風穴)을 새기고 그 사이에 보상화문(寶相華文)을 조각하였다.

대좌 위에는 난간을 두었는데, 계자각(鷄子脚: 난간에 세운 가느스름한 기둥) 사이 아랫부분에는 귀면(鬼面)을 2구씩 두고 그 상부에는 풍혈을 조각하였으며, 계자각 윗부분은 하엽(荷葉: 연잎)과 원죽(圓竹: 원형의 돌란대)으로 둘렀다. 한편 보계(補階)는 앞쪽과 좌우 측면마다 1개씩 설치하였다.

기둥은 모두 원기둥이며 둥글게 다듬은 주춧돌 위에 세웠는데 바깥두리기둥은 시각적인 교정, 즉 양쪽 끝의 창방(昌枋)·평방(平枋)이 처져 보이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귀솟음 수법으로 처리하였다. 기둥 사이에 솟을빗살을 한 분합문을 달고 문인방과 창방 사이에 교창(交窓, 光窓)을 설치하였다.

공포대(栱包帶)의 구성은 외삼출목(外三出目)·내사출목(內四出目)으로 기둥머리마다 직각방향으로 튀어나온 안초공(安草工)을 두었다. 기둥머리 부분인 창방과 평방 위치에 외부 살미[山彌]는 옆으로 약간 뻗어 휘어 올라 간 3겹의 앙서[仰舌]와 그 위에 익공형식(翼工形式)으로 된 살미로 구성되어 있다. 외부살미에 새들이 깃들이지 못하도록 전체를 부시(罘罳: 새가 앉지 못하도록 전각 처마에 둘러치는 철망)로 덮었으며 2층 바깥쪽에도 똑같이 설치하였다.

공포는 아홉 겹으로 겹친 운궁(雲宮: 살미 내부의 중첩된 부분)으로 처리하였다. 건물 안쪽에서 볼 때 위층은 아래층 퇴보[退樑]와 내목도리(內目道里) 및 멍에창방을 짜맞춘 곳 위에 위층 평주를 놓고 아래층과 똑같은 공포로 짜 올렸다.

내부 고주(高柱)는 중간부분을 바깥두리기둥에서 퇴보로 연결하였고 이 퇴보와 뜬창방 사이의 상부 둘레에는 당초문을 조각한 낙양을 둘렀으며 이 뜬창방 위로는 머름을 두고 운궁으로 치장하였다. 내진고주(內陣高柱)의 상부는 다시 창방·안초공 및 주두(柱頭: 대접받침)를 두었다.

이 위에 우물천장[格字天障]을 가설했는데, 천장 중심부에는 장방형 틀을 돌리고 다출목의 작은 포작을 다포식으로 틀어올려 천개를 마련하고 구름무늬 사이에 쌍룡과 여의보주를 조각하였다.

팔작지붕의 내림마루와 추녀마루·용마루에는 모두 회반죽을 발랐는데, 용마루 양끝에는 취두(鷲頭: 매 머리모양의 장식)를, 추녀마루 위에는 용두(龍頭)와 잡상(雜像)을 배열하였고 사래 끝에는 토수(吐首: 龍頭·鬼頭 모양의 장식)를 끼웠다.

건물의 외부 정면 좌우에는 청동제 향로를 놓았으며 정면 서쪽계단 옆에는 무쇠로 만든 드므(넓적하게 생긴 독)를 두었다. 드므에 물을 담아두어 이 물에 화기(火氣)의 얼굴이 비치면 놀라 숨거나 움츠리어 화기가 진압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또한, 근정전에서 근정문에 이르는 어도(御道) 좌우에는 정1품부터 정9품까지의 품계를 새긴 품계석(品階石)을 배열하였으며 차일(遮日)을 칠 때 사용하였던 차일고리가 앞마당에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 중기 이후 차츰 기술적 세련미를 잃어가던 수법을 가다듬어 완성시켰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으며, 아울러 조선의 가장 큰 궁궐의 정전이라는 점에도 의미가 있다. 그러나 양식과 수법·의장 등과 단청의 색조·무늬 등을 모두 앞서 지어진 인정전(仁政殿) 양식을 본떴으나 충분히 소화시키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참고문헌

『사료와 함께 새로 보는 경복궁』(허균, 한림미디어, 2005)
『조선의 정궁 경복궁』(신영훈, 조선일보사, 2003)
『조선조왕궁중요건축물지정조사서』Ⅰ(문화재관리국, 1984)
『서울육백년사』 3(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79)
『서울특별시사』고적편(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63)
「경복궁중건에 대한 소고」(장대원, 『향토서울』16, 1963)
집필자
김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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