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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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고종 익선관
전 고종 익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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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보호하고 장식하기 위하여 또는 신분이나 의례에 따라 격식을 갖추기 위하여 머리에 쓰는 물건.
이칭
이칭
건, 관,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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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머리를 보호하고 장식하기 위하여 또는 신분이나 의례에 따라 격식을 갖추기 위하여 머리에 쓰는 물건.
내용

관모는 사람의 머리를 싸는 용기(容器)가 되는 것이므로 머리를 어떻게 처리하였느냐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진다. 시대에 따라 그 명칭과 종류가 다양한데, 형태상으로 보아 크게 관(冠)·모(帽)·갓[笠]·건(巾)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관은 이마에 두르는 부분 위에 앞에서 뒤로 연결되는 다리가 있는 것이고, 모는 머리 전면을 싸는 것, 갓은 차양이 있는 것, 건은 한 조각 천으로 싸는 가장 간단한 형태의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모든 관모가 구별되는 것은 아니고, 서로 넘나드는 것이 많다.

예를 들면 ‘익선관(翼善冠)’을 ‘절상건(折上巾)’이라고도 하고, ‘전립(氈笠)’은 ‘전모’라고도 하여 그 구별이 어렵다.

관모의 명칭 중에서 우리말이 유전된 것은 ‘갓’이 있는데, 이는 지금도 갈산(葛山)·갈미 등의 산이름이 있는 곳에는 갓 모양의 산이 있고, 일본어의 가사[笠, かさ]와도 어원이 같은 것으로 증명된다.

또한 가야(伽倻)·가락(駕洛) 등이 갓에서 나왔다는 학설도 있다. 관모 각 부위의 명칭을 보면 이마에 대고 머리에 맞게 두르는 테는 ‘무(武)’라 하고, 앞과 뒤를 연결시켜 머리를 싸는 부분은 ‘옥(屋)’, 옆에 내리는 것은 ‘수(收)’라고 한다. 우리나라 관모의 기본형은 건이고, 여기에 무와 다른 수식이 붙어 여러 가지 다양한 관모가 발달하였다.

우리의 관모 중 기록에 보이는 최초의 것은 책(幘)과 절풍건(折風巾)이다. 『삼국지』·『후한서(後漢書)』 등에 의하면 고구려에서는 대가(大加)와 주부(主簿)는 책을, 소가(小加)는 절풍을 썼는데 그 형태는 고깔모양이었다고 한다. 책은 중국에서 발달한 것인데 우리나라의 것은 그 형태는 중국과 달랐던 것 같다.

절풍은 우리나라 관모 형태의 기본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에 새깃을 꽂아 조우관(鳥羽冠)이라고 하였다. 얇은 비단으로 만들어 신분에 따라 색을 달리하였던 백라관(白羅冠)·청라관(靑羅冠)·비라관(緋羅冠)·강라관(絳羅冠) 그리고 금동(金銅)으로 만든 금동관, 백화나무 껍질을 이용한 백화모(白樺帽), 금관의 내관 등이 모두 절풍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대에는 관모에 새깃이나 금·은 등으로 장식하는 관식(冠飾)이 애용되었음을 고분벽화나 문헌의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이후에는 복두(幞頭)가 일반적으로 쓰였던 듯하며 현재 남아 있는 토우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문라(紋羅)로 만들어 계급에 따라 색을 달리한 문라건이 있었다. 또 왕도 연복(燕服)에는 조건(皁巾)을 썼다.

고려 사람들은 알상투 차림을 싫어하여 죄인만이 건을 쓰지 않았는데, 건 하나의 값이 쌀 1석(石)이라 하였다. 몽고침략 이후에는 어떠한 형태의 관모를 썼는지 잘 알 수 없지만 안향(安珦)의 초상화에는 평정두건(平頂頭巾)을 쓰고 있는데, 이는 개체변발(開剃辮髮)한 모습을 감추기 위한 것일 거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또한 몽고식의 발립(鈸笠)이 있었고, 그 밑에 쓰는 것으로 현재 몽고의 유단(Yudan) 같은 두건이 있었다. 고려말에는 죽관(竹冠)이 형성되고 그 뒤 조선시대에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관모인 갓의 원형이 생성되었다. 몽고의 영향하에서 벗어나려 하였던 공민왕·우왕·창왕 때에는 명나라의 관모를 도입하여 왕은 면류관과 사모를 썼다.

신하는 사모와 국속(國俗)의 관모로서 차양이 붙은 패랭이형의 갓을 썼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왕과 관원의 관모는 중국으로부터 사여(賜與)의 형식을 띠고 도입하여 착용하였다. 그리하여 왕은 면류관·익선관 등을, 신하는 양관·오사모·복두 등을 착용하여 한말까지 계속되었다.

여성의 경우에는 왕비가 명나라로부터 칠적관(七翟冠)을 받았으나 이를 착용하였는지의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내명부는 화관을 쓰고 일부에서는 족두리를 썼으며, 일반 부녀자는 고려시대 이래의 전통인 청상립(靑箱笠)을 쓰고 그 위에 너울[羅兀, 羅火]을 드리워 상반신을 가렸다.

조선시대에는 ‘동방예의지국’이라 하여 의관문물을 중요시하였는데, 외출할 때는 물론 실내에서도 관모를 착용하였다. 관모를 착용하지 않을 때는 변소에 갈 때, 침상에 들 때, 죄수가 되었을 때 정도이며, 일을 할 때에도 수건을 착용하였다.

이러한 전통적인 관모는 개화기 이후 중절모가 들어와 일반화되면서 퇴조하였고 현재는 모자를 쓰지 않는 것이 더 일반적이다.

관모 중 가장 간단한 것으로 천을 사용하는 것 보통이다. 고구려벽화에 나오는 부인의 머릿수건인 건귁(巾幗)도 건에 속하며, 삼국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쓰이는 가장 보편적인 쓰개인 것이다. 고려시대에도 조건·문라건 등 왕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건을 착용하였다.

고려 말 안향의 초상에서는 평정두건을, 이제현(李齊賢)의 초상에서는 연엽건을 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조선초에 두건의 일종이라 할 수 있는 망건이 생성되었고, 『경국대전』에는 신분에 따른 다양한 건이 보인다. 예전(禮典) 의장조(儀章條)에 녹사(錄事)는 유각평정건(有角平頂巾), 서리는 무각평정건을 쓰게 되어 있다.

또 별감은 자건(紫巾), 세자궁별감은 청건, 나장은 조건, 인로(引路)는 자건, 학생은 치포건(緇布巾)을 쓰도록 되어 있다. 일반선비들은 망건 위에 탕건을 쓰고 그 위에 갓을 썼다. 평거시 집안에서도 탕건·사방건(四方巾)·동파건(東坡巾)·충정건(冲正巾)·유건 등을 썼다. 상중(喪中)에는 마포건(麻布巾)을 써서 길흉의 옷차림을 구별하였다.

관으로 대표되는 것은 삼국의 금관이다. 이의 원류는 시베리아 샤만의 녹각관(鹿角冠)에서 연유한 일종의 무관(巫冠)에서 발달한 것으로, 고구려·백제·신라의 호족 내지 왕이 썼던 것이다. 고구려벽화에서는 머리가 투명하게 내비치는 문라관을 볼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흥덕왕의 복식금제에는 여관(女冠)으로 화관의 일종인 슬슬전관(瑟瑟鈿冠)이 보인다. 녹옥(綠玉)의 일종인 슬슬로 전을 만들어 장식한 관이겠으나 그 자세한 제양은 알 수가 없다. 고려시대에는 왕의 면류관이 있었고, 건이나 모는 다양한 명칭이 나오나 관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은 뱃사람이 쓰는 죽관이 있을 뿐이다.

이 죽관은 삿갓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에는 왕의 관모로 면류관·익선관·원유관이 있었고, 신하의 것으로는 양관, 일반선비의 것으로 건으로도 불리는 정자관·충정관·동파관·사방관 등이 있었다.

모는 머리 전면을 싸는 모옥(帽屋)으로 이루어진 형태의 관모를 말한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복두와 사모가 있다. 복두는 통일신라시대에 채택되어 고려에 이르러 널리 착용되었다. 고려왕은 조복에 복두를 썼고 이직산원(吏職散員)들도 복두를 착용하였으며, 복두 착용에 대한 금지 또는 허용의 기록이 『고려사』에 보이고 있다.

왕은 상복에 오사고모(烏紗高帽)를 썼는데, 이는 비단으로 만든 것으로 사모의 전신일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복두 대신 사모가 널리 착용되어 관원은 물론 일반 서민도 혼례 때에는 이의 착용이 허용되었다.

갓은 그 명칭이 우리말에서 나온 것이며 그 역사가 매우 오래이다. 고구려벽화에서도 착립기마인물도(着笠騎馬人物圖)를 볼 수 있고, 『삼국유사』 원성왕조에 ‘착소립(着素笠)’의 기록이 보인다. 갓은 삼국시대에 기원하여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러 우리 나라 대표적인 관모로 형성되었다.

갓은 형태상 크게 방립형과 패랭이형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흑립·초립·패랭이·방립·삿갓 등이 그에 속한다. 처음에는 진사립(眞絲笠) 등이 있었으나 나중에는 말총으로 만든 마종립(馬鬃笠)이 주가 되었으며, 그 양식은 시체(時體)에 따라 많은 변모를 보였다. 갓은 우리 고유의 멋을 나타내는 관모로서 지금까지도 쓰고 있다.

이밖에도 방한용의 이암계(耳掩系) 난모(煖帽), 비를 막기 위한 우모(雨帽), 화살을 막기 위한 투구 등의 쓰개도 있었다. 개화기 이후에는 중절모·맥고모(麥藁帽)·파나마모자 등이 크게 유행하였다.

우리나라 사람은 예로부터 머리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의관 갖추기를 중시하였으며, 관모는 곧 신분을 상징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실용적·장식적·상징적 의미의 많은 다양한 관모가 발달되어왔다.

참고문헌

『한국복식사연구』(유희경,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80)
『한국복식사연구』(김동욱, 아세아문화사, 1979)
『한국복식사』(석주선, 보진재,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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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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