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장 죽성리성 ( )

건축
유적
문화재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왜장 쿠로다 나가마사가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에 쌓은 왜성.
이칭
이칭
죽성리왜성(竹城里倭城), 기장왜성(機張倭城), 두모포왜성(豆毛浦倭城)
유적
건립 시기
1593년
관련 국가
일본
관련 인물
쿠로다 나가마사|쿠로다 요시타가|가토 기요마사
높이
7m
둘레
960m
면적
38,253㎡
소재지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63년 01월 21일 지정)
소재지
부산 기장군 기장읍 죽림리 46번지
내용 요약

기장 죽성리성은 임진왜란 때 왜장 쿠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부산광역시 기장군 죽성리에 쌓은 왜성이다. 서생포왜성과 연결되는 병참상의 거점으로 죽성만의 서쪽에 있는 남쪽 구릉에 6개의 곽(郭)으로 구성된 내성(內城)과 북쪽 구릉에 5개의 곽으로 구성된 외성(支城)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쪽 내성과 외성을 연결하는 해자와 북쪽의 청강천을 자연 해자로 삼아 두모포만 전체를 방어할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석축 둘레 약 960m, 잔존 성벽 높이는 약 4∼5m 정도이며, 성벽은 왜성의 특징인 약 60∼70도 정도의 경사를 보이고 있다.

정의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왜장 쿠로다 나가마사가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에 쌓은 왜성.
발굴 경위 및 결과

기장 죽성리성은 일제강점기에 측량한 『기장성도(機張城圖)』와 현대의 지표 조사 및 발굴 조사를 종합해 볼 때, 측량도에 보이는 대부분의 주3 주4가 현재에도 거의 그대로 잔존하고 있다. 석축 둘레 약 960m, 잔존 성벽 높이는 약 4∼5m 정도이며, 성벽은 왜성의 특징인 약 60∼70도 정도의 경사를 보이고 있다.

전체적인 평면 구조는 크게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으로 나눌 수 있다. 내성은 남쪽에 독립된 해발 46m의 구릉 정상부에 위치한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죽성리의 북쪽으로는 자연 해자의 역할을 하는 청강천(淸江川)이 흐르는데, 외성은 강의 서쪽 및 북쪽과 남쪽으로 이어진 해발 37m의 소구릉 정상부에 위치한다. 내성과 외성이 있는 두 구릉의 서쪽으로는 북쪽에서 동남쪽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해자가 확인되는데 이는 죽성만 전체를 방어 라인으로 설계한 것이다.

외성이 있는 소구릉의 동쪽 해안에 죽성리 마을과 포구가 있는데 이곳이 두모포(豆毛浦)로써 죽성만(竹城灣)을 이루고 있다. 포구의 서북쪽에는 청강천에 연해 경상 좌수영 소속의 두모포진성지가 있으나 두모포진성의 남쪽 성벽은 두모포왜성의 외성 남쪽 성벽으로 이용되었다.

현재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8호로 지정되어 있으나 대부분 육안으로 확인되는 석축 성벽을 기준으로 내성의 6개 곽과 동남쪽의 수석원(竪石垣) 부분, 내성의 제1곽 남쪽과 제2곽의 남쪽 성벽, 두모포진성의 서벽 일부만이 지정되었다. 그러나 부산박물관의 본성 동쪽 아래 주차장 부지 입회 조사에서 왜성의 유구 일부로 보이는 석열(石列)과 주5이 조사되었다. 1595년(선조 28) 10월과 11월 기록에서 보이는 부산 주6의 주둔병에 버금가는 8천 명의 왜병이 주둔하거나 왜적에 붙은 2백여 호의 부역자가 거주할 수 있는 기장 죽성리성의 외곽 공간으로는 이 공간이 유력하기 때문에 지형상 내성 능선의 연장선에 있는 동쪽 죽성리 해송이 있는 소구릉 지역도 왜성의 범위에 포함되며 왜성 유구가 잔존할 가능성이 크다.

또한 내성의 서쪽과 외성의 북쪽에서도 해자가 확인되었다. 청강천 쪽으로 이어진 외성의 북쪽 끝에는 문지와 석축이 잔존하고 그 동남쪽 지역 발굴 조사에서 성벽이 확인되었으나 경작 등으로 내부는 파괴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건립 경위

기장 죽성리성은 죽성리왜성(竹城里倭城) 또는 두모포왜성(豆毛浦倭城)으로 불리기도 하며, 당시 일본 측 사료에서 서생포왜성에서 임랑포왜성, 기장왜성, 동래왜성, 그리고 부산포왜성과의 육로상의 거리를 상세히 밝히고 있어 기장 죽성리성이 부산포왜성과 동남 해안 지역을 연계한 병참 선상의 거점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축성자는 왜장 쿠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 쿠로다 요시타가〔黑田孝高〕 부자(父子)로 당시 동원된 인부 수는 약 33,000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때 축조한 대부분의 왜성들과 마찬가지로 1593년 6월경에 기장 죽성리성의 기본적인 시설이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장 죽성리성은 일본과 명의 강화 교섭에 따라 서생포왜성, 임랑포왜성의 왜군이 철수하는 과정에서 경상남도 동쪽 연안 최전선의 성이 되면서 1595년(선조 28) 중반부터 대규모의 증개축이 시작되었다. 『선조실록』을 보면 1595년(선조 28) 10월과 11월에 접반사 사섬시정(司贍寺正) 황신(黃愼)이 치계하기를 “본월 10일에 신이 본도순찰사(本道巡察使)가 차견(差遣)한 양산품관(梁山品官) 최기(崔沂)를 장사꾼으로 꾸며서 두모포(豆毛浦) · 서생포(西生浦) · 임랑포(林浪浦) 등지에 가서 왜영(倭營)의 형편을 탐지하게 하였더니, 당일 돌아와서 말하기를 ‘기장(機張)의 두모포에 도착하였더니, 진중의 왜인들이 바야흐로 축성(築城)하는 역사(役事)를 일으켜서 나무를 끌어오고 돌을 실어 나르는 왜인이 도로를 메웠으며 옛 현(縣)의 성(城)에서 돌을 반수 이상이나 뽑아 내고 또 근처의 암석을 채취하여 끊임없이 실어 날랐다. 성문을 들어가서 두루 살펴보니, 구진(舊鎭)의 방옥(房屋)이 드문 곳에는 여기 저기 더 만들었고, 서생포 논밭에서 수확한 곡식을 배로 실어다가 진영 안에 쌓아 둔 것이 36개소나 되고 주7를 남쪽에 쌓아 둔 것이 50여 개소나 되었다. 군병이 많기로는 부산의 버금이었으나 시장의 점포는 그 반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바다 어귀에 정박한 왜선이 매우 많았는데 우리나라의 큰 판옥선(板屋船) 2척도 그 가운데 있었다. 거류민에게 물어보았더니, 머물러 있는 왜인의 수효가 거의 8천 명이나 되고 전일 일본으로 들어간 자도 많으며 양곡과 기계 및 잡물을 일찍이 나누어 운반하여 일본으로 실어 갔다고 하였다. 왜적에 붙은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왜의 진영 옆에 사는 자가 거의 2백여 호나 되었다.”라는 기사가 보인다. 따라서 현재의 기장 죽성리성의 대부분 시설은 이 당시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변천

1597년(선조 30) 1월 14일 발발한 정유재란으로 가토 주8는 기장 죽성리성을 거쳐 서생포왜성에 입성하였는데 서생포왜성을 주성(主城)으로 하고 기장 죽성리성에는 가토 기요마사의 한 부대가 수비하게 되었다. 이때 기장 죽성리성에 왜군이 다시 입성하면서 개보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598년(선조 31) 11월 직후에 울산왜성이 폐성되어 왜군이 철수하면서 기장 죽성리성도 함께 폐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형태와 특징

기장 죽성리성은 전체적인 평면 구조로 볼 때 크게 남쪽의 내성과 북쪽의 외성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기장 죽성리성의 중심부인 내성의 평면 구조는 완만한 구릉 전체를 주장의 지휘소 겸 거처인 천수대가 있는 제1곽을 중심으로 제2곽부터 제6곽을 사다리꼴 모양으로 배치한 제곽식(梯郭式)이다. 내성의 서쪽으로는 외성 외곽으로 연결되는 해자가 설치되어 있다. 외성은 제1곽∼제5곽의 공간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주곽인 1곽에 연이어 덧붙여 나가는 연곽식(連郭式) 평면 구조이고 동쪽으로는 청강천이 자연 해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기장 죽성리성의 방어선은 죽성만의 서쪽에 있는 남북의 두 개의 작은 구릉과 남동쪽 소구릉이 있는 해안까지 포함되고 서쪽으로는 인공적인 해자를, 북쪽으로는 청강천을 자연적인 해자로 하여 외곽선으로 삼고 있어 두모포만 전체를 방어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외성의 동쪽에 있는 조선 전기 경상 좌수영 소속 수군진인 두모포진성의 남쪽 성벽을 죽성리성의 외성 남벽으로 사용하였는데, 안골포왜성에서도 안골진성의 서벽을 왜성의 서쪽 수석원으로 이용한 사례가 있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거점을 활용함과 동시에 왜성 축조에 필요한 축성 재료를 인근 조선 성을 헐어 조달하였다는 점에서 조선군의 거점을 파괴하는 이중 효과를 노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의의 및 평가

기장 죽성리성을 비롯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에 축조된 한국 동남 해안 지역에 위치하는 왜성들은 일본 성곽사에 있어 성곽 축조 전통 기술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일본의 석축 성곽은 근세 초창기인 쇼쿠호우기(織豊期, 1568∼1600)를 중심으로 전통 석축 성곽 기술의 발전이 있었으나 이후 개보수가 진전되어 이 시대 성곽의 특징을 밝혀 내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기장 죽성리성의 내성과 외성을 둘러싸는 외곽 해자 배치는 일본의 전국 시대 말기부터 쇼쿠호우기에 걸쳐서 발달한 '외곽'과 상통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안골진성의 사례와 같이 왜군이 조선 성을 왜성의 성벽으로 이용한 특이한 사례로서 주목된다.

참고문헌

단행본

佐賀縣敎育委員會, 『文祿ㆍ慶長の役城跡図集』(1985)
부산대학교박물관·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기장군 문화유적 지표조사 보고서』(1998)
복천박물관, 『기장 두모포진성ㆍ죽성리왜성 -시온∼죽성간 도로 공사구간내 발굴조사보고-』(2008)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기장 실버타운 신축공사부지내 문화재 發掘(試掘)調査 諮問委員會 자료』(2010)

논문

北垣聰一郞, 「平面プランからみた機張倭城とその石積み技術」(『倭城の硏究 』, 創刊号, 1997)
나동욱, 「기장왜성의 축조수법」(『동아시아의 문물-중헌 심봉근선생 고희기념 논집-』 1권, 고고학, 2012)

인터넷 자료

한국고전종합DB(http://db.itkc.or.kr), 조선왕조실록
주석
주1

두모포진.

주2

수석원(竪石垣)은 왜성 특유의 시설로서 산정(山頂)의 중심부 공간과 산 아래의 평지 공간을 연결하여 방어선을 형성하는 성벽이다. 등석원(登石垣)이라고도 한다.

주3

일본식 성 또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한반도 남부에 축조한 성. 평탄한 산 정상에 자리 잡고 있으며, 가장 높은 곳에 천수대라 불리는 누각을 설치하였다. 천수대를 중심으로 이중 삼중의 구획을 나누어 설치하였다. 우리나라 남해안 해안가를 따라서 서생포 왜성, 부산 왜성, 사천 선진리 왜성, 순천 왜성 따위가 남아 있다. 우리말샘

주4

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 우리말샘

주5

움집터의 바닥 같은 데에 기둥을 세우기 위하여 파 놓은 구멍. 우리말샘

주6

부산광역시 좌천동과 범일동 산 위에 있던 성. 조선 선조 때에 왜장(倭將)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가 축성하였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통하여 왜군 침략의 근거지가 되었다. 우리말샘

주7

갖가지 곡식 풀의 이삭을 떨고 남은 줄기. 우리말샘

주8

일본의 무장(1562~1611).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선봉으로 종군하였다. 우리말샘

집필자
나동욱(복천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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