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법린 ()

김법린
김법린
불교
인물
일제강점기 때, 만당, 조선청년동맹 등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해방 이후, 문교부장관, 민의원, 동국대학교 총장 등을 역임한 승려 · 불교학자 · 정치인 · 독립운동가.
이칭
범산(梵山)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9년(고종 36)
사망 연도
1964년
출생지
경상북도 영천
관련 사건
만당사건|조선어학회사건
정의
일제강점기 때, 만당, 조선청년동맹 등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해방 이후, 문교부장관, 민의원, 동국대학교 총장 등을 역임한 승려 · 불교학자 · 정치인 · 독립운동가.
개설

경상북도 영천 출신. 필명은 철아(鐵啞), 호는 범산(梵山).

생애 및 활동사항

14세에 출가하여 1915년 동래 범어사(梵魚寺)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3 · 1운동 때 영남의 불교계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고, 1920년 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을 졸업하였으며, 이듬해 프랑스로 건너가서 1926년 파리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1928년 백성욱(白性郁) · 김상호(金尙昊) 등과 함께 불교청년회의 중흥을 도모하였고, 1929년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를 개최하였다. 1930년 한용운(韓龍雲)의 뜻을 이어 일제에 대항하는 비밀결사조직인 만당(卍黨)을 결성하였다.

1930년 일본 고마자와대학(駒澤大學)에서 불교를 연구하였으며, 1931년 동경에서 조선청년동맹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벌였다. 1933년부터는 다솔사(多率寺) · 해인사(海印寺) · 범어사 등의 사찰을 다니면서 불교의 교학을 강의하는 한편, 독립정신의 고취에 힘을 기울였다.

1938년 만당사건으로 진주에서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함흥에서 투옥되었다. 그러나 감옥에서 풀려나와 다시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불교계에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1945년 겨울 불교중앙총무위원직을 맡았을 때에는 미군정장관 하지를 만나 일본인 승려들이 머물렀던 사찰을 종단에서 인수할 수 있게끔 협의하는 등, 여러 면에서 불교혁신운동을 벌였으며, 동국학원(東國學院)의 이사장직을 맡아 동국대학교의 발전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1952년 문교부장관에 임명되었고, 1953년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위원장이 되었으며, 제3대 민의원으로 피선되는 등 정치활동에도 힘을 기울였다. 1959년 원자력원장을 역임하였고, 1962년 동국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63년 동국대학교 총장이 되어 학교발전에 힘을 기울였다.

세속을 떠났던 승려의 신분이면서도 독립운동과 정치활동, 교육계의 활동에 주력하였으며, 불교계의 정화와 발전을 위해서 노력을 기울였던 행정가 · 학자로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주요논문으로는 「정교분립(政敎分立)에 대하여」 · 「3 · 1운동과 불교」 · 「12인연에 대하여」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불교근세백년』(강석주, 중앙일보, 1980)
「김법린과 피압박 민족대회」(김광식, 『불교평론』2, 2000)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김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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