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집 20권, 속집 3권, 별집 1권, 부록 2권. 총 26권 13책. 목판본. 서발(序跋)이 없어 편찬·간행경위는 분명하지 않다. 장서각 도서 등에 있다.
원집 권1·2에 시 332수, 권3·4에 소장(疏狀) 39편, 권5∼12에 서(書) 153편, 권13∼16에 잡저 34편, 제문 11편, 권17에 제문 16편, 애사 3편, 묘표지 2편, 권18에 묘지명 8편, 권19·20에 행장 4편, 속집 권1에 시 68수, 소장 6편, 서(書) 10편, 권2·3에 잡저 21편, 별집에 시 20수, 서(書) 15편, 일기 3조(條), 부록으로 상권에 연보·유사, 하권에 행장·묘표음기(墓表陰記) 등이 수록되어 있다.
소문은 다소 수식과 자존으로 일관한 감이 없지 않으나, 그 당시 추세로 보아 저자의 주장은 시의에 따른 것이었다 하겠다. 저자는 김상헌(金尙憲)·삼학사(三學士)들과 같이 존주대의(尊周大義)를 부르짖고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하였다. 저자는 강도사(江都事)가 있은 뒤 소명(召命)이 있을 때마다 죄인으로 자처하여 응하지 않고 사의를 표하는 소(疏)를 올려 자기의 주장을 논설로 전개하였다.
저자는 당시 문장과 학식이 송시열(宋時烈)과 쌍벽을 이루던 인물로 많은 서한을 남겼다. 서신을 주고받은 사람으로는 송준길(宋浚吉)·송시열·이민적(李敏迪)·김집(金集)·유계(兪棨)·조복양(趙復陽)·이유태(李惟泰)·권시(權諰)·김상헌·송기후(宋基厚)·박세채(朴世采) 등 당시의 명사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이 가운데 송준길·송시열과 주고받은 서한이 가장 많은데, 특히 송시열과의 관계는 그 뒤 회니문제(懷尼問題)가 일어난 일과 관련해 연구할 만한 자료가 된다. 김집과의 「사우문답(師友問答)」, 송준길과 윤선도(尹善道)를 논한 것, 김집과 파산비문(坡山碑文)을 논한 것, 권시와 더불어 정인홍(鄭仁弘)을 관련시켜 유영경(柳永慶)을 논한 것 등은 당시 정계의 의식구조와 동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들이다.
잡저의 「후천도설(後天圖說)」은 『주역』의 역상변화(易象變化)에 대해 도표로 표현하고 있다. 이 역설(易說)에 관해 토론한 내용은 유계와 교환한 서(書)의 「여시남왕복서(與市南往復書)」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잡저의 일기는 1652년(효종 3)부터 1657년까지 산발적으로 적은 것이며, 별집에 누락된 일기 3조가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