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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정치단체

     1946년 민족주의 정당들로 구성되었던 국민운동추진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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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1946년 민족주의 정당들로 구성되었던 국민운동추진단체.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1946년 2월 8일 서울 인사동에서 이승만(李承晩)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김구(金九)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통합, 발족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연원 및 변천
    이 날 채택한 선언문은 “단조(檀祖)의 성혈(聖血)이 얽히고 가갸의 문자로 연하는 3000만 명의 동포의 혼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 몇 가지를 엄숙히 선언하였다.
    ① 우리는 대한의 완전자주독립을 위하여 최후까지 싸울 것을 선언함. ② 우리의 운동은 정당·정파를 초월한 순연(純然)한 국민운동임을 선언함. ③ 우리는 남북과 좌우의 통합을 기하여 사상적으로나 지역으로나 통일완수를 위하여 사력을 다할 것을 선언함.”이었다.
    발족 당시의 임원은 총재 이승만, 부총재 김구, 고문 권동진(權東鎭)·김창숙(金昌淑)·함태영(咸台永)·조만식(曺晩植), 참여(參與)에는 김관식(金觀植)·김의한(金毅漢)·김여식(金麗植)·김법린(金法麟)·김성수(金性洙)·남상철(南相喆)·이규갑(李奎甲)·이규채(李圭彩)·이극로(李克魯)·이중환(李重煥)·이승복(李昇馥)·민정기(閔鼎基)·배은희(裵恩希)·서세충(徐世忠)·신백우(申伯雨)·안재홍(安在鴻)·최규동(崔奎東)·최태용(崔泰瑢) 등이었다.
    그리고 회장 오세창(吳世昌), 부회장 방응모(方應模), 총무부장 홍순필(洪淳必), 재정부장 오건영(吳建泳), 선전부장 이을규(李乙奎), 조직부장 채규항(蔡奎恒), 문교부장 유엽(柳葉), 산업부장 유재기(劉載奇), 근로부장 권영규(權榮奎), 농민부장 전공우(全公雨), 후생부장 최성장(崔性章), 조사부장 이성주(李成株), 청년부장 이중근(李重根), 부녀부장 황기성(黃基成) 등이었다.
    중앙조직을 끝내고 전국의 시·도·군까지 지부조직을 확대하는 동시에 대한독립촉성국민회청년대를 설치하여 전위부대로 활동하게 하는 등 정당 아닌 국민운동단체로서 방대한 조직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조직이 너무 비대하여 내부에서 이승만을 추종하던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계열과 김구의 한국독립당 계열, 김규식(金奎植)을 추종하는 계열 외에도 신익희(申翼熙)의 정치공작대 세력 등 잡다한 계열이 모인 파쟁으로 인하여 인화와 융합을 이루지 못하고 발족 직후부터 간부진영의 개편이 수없이 되풀이 되었다.
    1946년 4월 10일 제1차 전국대표자회의에서는 회장에 이시영(李始榮), 부회장에 오하영(吳夏英)·이규채(李圭彩)로 개편되었고, 1946년 9월 16일 전국대표자대회에서는 위원장제로 개정하여 위원장에 조성환(曺成煥), 부위원장에 정인보(鄭寅普)로 개편되었다.
    그리고 1947년 4월 19일 전국대표자대회에서는 위원장에 오세창, 부위원장에 명제세(明濟世)·백남훈(白南薰)으로 개편되었으며, 또 1947년 10월 3일 전국대표자대회에서는 위원장에 신익희, 부위원장에 명제세·백남훈이 선임되었다.
    이러한 사이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내부에서는 임시정부를 받들어 자율정부로 대신하자는 임시정부 봉대파(奉戴派)와,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전망이 흐려짐에 따라 남한만의 총선거로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이승만계의 주장으로 의견이 분열되었다.
    이승만과 김구 사이에 몇 차례 협의가 이루어졌으나, 아무런 성과를 보지 못한 채 임시정부 봉대파측에서는 임시정부의 법통(法統)을 적극 추진하기 위하여 임시정부추진회를 구성하고 김승학(金承學)을 위원장에 앉혔다.
    당시 수도경찰청장 장택상(張澤相)은 임시정부추진회를 불법단체라 하여 해산시켰다. 광복 직후 임시정부 절대지지를 표명한 한국민주당은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하여 협의에 응할 뜻을 보였다.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의 전망이 흐려지게 되자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는 민족통일총본부(1946.6.10.)·민족대표자대회(1947.7.1.) 등 이승만 계열의 우익국민운동조직으로 변화 또는 발전하여가면서 남한단독정부를 추진하는 이승만 지지세력이 되었다.
    한편,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후 미군정의 후원을 받는 김규식이 주도한 좌우합작운동파와 함께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발족 때는 정계의 제2선에 물러나 있다가, 1947년 8월경부터 미국의 대한정책변화에 따라 차차 정계 제1선에서 5·10선거의 기반을 형성, 구축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한국정당발달사』(이기하,의회정치사,1961)

    • 『한국정당사』(한태수,신태양사,1961)

    • 『대한민국정당사』 1(중앙선거관리위원회,1973)

    • 『해방30년사』 Ⅰ(송남헌,성문각,1976)

    • 『한국현대정치사』(송남헌,성문각,1980)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송남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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