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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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단체
1929년 전라남도 광주에서 조직되었던 항일학생운동단체. 일반적 의미로는 독서를 통해 교양을 넓히고 독서 인구를 넓히려는 동호인 단체를 말한다. 그러나 협의의 역사적 용어로는 일제의 감시를 피하면서 항일적인 저항을 목적으로 성진회의 활동을 계승, 확대 개편한 단체를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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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29년 전라남도 광주에서 조직되었던 항일학생운동단체. 일반적 의미로는 독서를 통해 교양을 넓히고 독서 인구를 넓히려는 동호인 단체를 말한다. 그러나 협의의 역사적 용어로는 일제의 감시를 피하면서 항일적인 저항을 목적으로 성진회의 활동을 계승, 확대 개편한 단체를 이른다.
내용

성진회(醒進會)가 독서회로 개편된 시기에 대해서는 문헌상 상이하다. ≪항일학생사≫의 저자인 양동주(梁東柱)는 1926년설을 내세웠고, 광주학생독립운동에 가담했던 박준채(朴準採)는 1927년 11월에 독서회중앙본부가 설치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독서회 주동 인물들의 진술서로 작성된 독서회사건 예심종결서에 의하면, 1927년 3월에 성진회는 기밀 누설을 차단하기 위해 해체하고 주동학생들만이 은밀히 활동을 계속했으며, 1929년 6월경에 독서회중앙본부가 결성되었다는 것이다. 성진회를 독서회로 개편할 필요성은 세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성진회의 노출로 더 이상 목적 수행을 위한 활동이 어렵게 된 현실적 상황이었다. 즉, 성진회원의 이탈자로 말미암은 기밀 누설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외형적으로 해체함으로써 회원의 보호와 목적 달성을 위한 계속적인 활동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둘째, 성진회의 활동을 계속하여 그 목적을 지속하기 위한 장기투쟁적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성진회는 주동인물들이 졸업해서 처소가 분산되면 활동이 중단되게끔 되어 있었다.

따라서 각 학교와 연결하여 독서회를 조직함으로써, 활동의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부로 확산시킬 수 있으리라는 판단에서 취해진 조처라고 생각된다.

셋째, 독서회중앙본부는 항일적 민족문화와 사회과학연구를 지도 통제하고, 동시에 독서회를 계도함은 물론 청년총연맹계·신간회계 인사들과도 유기적인 연계를 맺음으로써, 광주 지역의 항일적인 민족학생의 핵심기구로 성장시키려는 데 있었다.

독서회중앙본부는 1929년 6월에 광주시내 김기권(金基權)의 집에서 조직되었다. 이곳에 참석한 사람들은 김상환(金相奐)·김보섭(金普燮)·윤창하(尹敞夏)·송동식(宋東植)·강달모(姜達模)·조길룡(曺吉龍)·김순복(金順福)·장재성(張載性) 등이었다.

그 조직을 보면 [표 1] 과 같다. 이들은 비서장을 제외하고는 학교 단위 독서회의 핵심인물로 활동하였다. 이들이 결의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부원은 1주 1회 회합하여 협의할 것. 둘째, 중앙 부원에 의해 각 학교별로 중앙부와 비슷한 조직과 동일 목적의 비밀 결사인 독서회를 조직하여 중앙부가 이것을 연락 통일할 것. 셋째, 학교별 조직원에게는 중앙부의 존재를 절대로 비밀로 할 것. 넷째, 소비조합을 조직할 것 등이다.

이에 따라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농업학교·광주사범학교·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목포상업학교 등에 독서회가 독서회중앙본부와 비슷하게 조직, 확산되어 갔다.

그리고 1929년 6∼9월 사이에 장재성·김상환·윤창하·송동식·이신형(李信珩)·조길룡·강달모·김순복 등은 장재성의 집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모임을 가지고, 독서회원간의 친목과 단결을 도모하고 경제적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소비조합을 만들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장재성의 이웃집에 문방구점을 차리고 2층을 비밀회합소로 사용하였다. 재원은 회원 1인당 3원 비율로 300원을 징수하기로 하였다.

김기권이 500원, 나승규(羅承奎)가 100원을 출자하였으며, 광주고등보통학교가 90원, 광주사범학교·광주농업학교가 각각 50원, 광주여자고보가 30원을 출자하였다.

이와 같이, 독서회는 1925년 이후 광주 지역에서 고조된 분산적이고 개인적인 항일투쟁을, 기조적 교양(基調的敎養)과 추진력에서 체계적·통제적으로 배양시켜 나갈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독서회중앙본부 밑에 각 학교에 단위 독서회를 조직하여 기반을 확대시켜 항일학생층을 폭넓게 수용하고 중앙에서 지도 통제함으로써, 후일 막강한 항일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힘을 집결하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

광주 지역의 학생운동은 민족차별교육에 항거하여 맹휴·성진회·독서회를 거쳐 광주학생운동으로 발전하면서 절정을 이루었다.

즉, 광주학생운동은 단순한 민족적 차별교육을 철폐하라는 차원에서 일보 전진하여 항일독립운동의 성격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항일투쟁의 정신적 기반은 독서회의 공헌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광주학생운동 뒤에 일제가 처벌 대상을 세 가지로 분류한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성진회 계열·독서회 계열·광주학생운동 계열로 분류하여 성진회와 독서회에 관련된 학생들을 중형으로 다스리고 있는 것이다.

독서회 계열로 투옥된 학생은 70여 명이나 되며 독서회의 중심 인물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광주학생운동 뒤 독서회의 조직적인 활동은 사실상 중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독서회는 전국적인 현상으로 나타나 1930년대 학생운동의 핵심이 되었다. 이는 1930년대에 독서회사건으로 학생들이 검거된 사실만으로도 입증할 수 있다.

참고문헌

『광주학생독립운동사』(광주학생독립운동동지회 편, 1974)
『항일학생민족운동사연구』(정세현, 일지사, 1975)
『독립운동사』 9(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81)
『最近に於ける朝鮮治安狀況』(朝鮮總督府警務局 編, 岩南堂書店, 1978)
집필자
김호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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