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3·1운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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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사건
1919년 3·1운동 때 경상남도 밀양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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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19년 3·1운동 때 경상남도 밀양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
내용

1919년 3월 13일 밀양 장날, 윤세주(尹世胄)·윤치형(尹致衡) 등은 사립 동화중학교(同和中學校) 교장 전홍표(全鴻杓)의 지도를 받아 많은 애국 동지를 규합, 오후 1시 30분 윤세주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독립 만세 시위에 들어갔다.

이때 부산에서 급파된 일본 헌병과 수비대에 의해 시위 군중은 일단 해산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다시 밀양공립보통학교 학생 160여 명이 일제히 봉기하여 거리를 시위행진하자, 군중이 이에 가세하여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군중은 해산되고 주동 인물들은 붙잡혀 구금되었다.

그 뒤 4월 2일 윤태선(尹泰善)의 지휘 아래 밀양공립보통학교 졸업생 및 재학생 등 청소년 60여 명은 제2차 의거를 일으켰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시위대는 해산되고 주동 인물들은 잡혔다.

그 결과 전후 세 차례에 걸친 독립 만세 운동으로 검거된 주동 인물만도 46명에 달하였다. 그런데 독립 만세 운동은 항일 애국 정신을 견지해 온 선진 애국자들과 그들의 사상을 이어받은 애국 청소년들이 주동하여, 민족 저항심을 끝까지 발휘하였다는 데 특징이 있다.

한편, 4월 4일 단장면의 표충사(表忠寺)에서도 승려 이장옥(李章玉)·이찰수(李刹修)·오학성(吳學城)·손영식(孫永植)·김성흡(金性洽)·구연운(具蓮紜)·오응석(吳應石) 등이 주동이 되어 대룡리 단장 장날에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런데 출동한 일본 헌병에 의해 주동 인물 364명이 검거되고, 그 중 71명이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또, 4월 6일 부북면 춘화리에서도 김응삼(金應三)·김내봉(金來鳳)·김성수(金聖壽)·김영환(金英煥)·김응진(金應振) 등이 주동하여 농민 500∼600명이 시위를 벌이다가 헌병대에 의하여 해산되고 53명이 붙잡혔으나 주동 인물들은 피신하여 검거되지 않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농민들은 훈계, 방면되었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 3(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집필자
김진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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