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명은 백운기(白雲起). 자는 학범(學範), 호는 세창(世昌). 평안북도 정주(定州) 출신. 백병제(白昺濟)의 아들이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1920년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결성된 독립운동단체인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입하여 일본영사관과 친일단체인 일민단(日民團)·강립회(强立會)·보민단(保民團) 등을 습격하고 많은 일본인 관리와 친일파를 사살하였다.
1921년 흥경현(興京縣) 본계호(本溪湖) 무순(撫順) 방면의 외무감독에 임명되어 활약하다가, 수명의 부하대원과 흥경의 영릉가(永陵街)에서 봉천(奉天)의 일본영사 및 친일단체인 보민회장 백형린(白衡麟) 등 일행을 습격하고 30여 만원을 탈취하여 독립운동의 자금을 마련하였다.
1921년에 동지 권덕근(權德根)·나정규(羅正奎) 등과 더불어 혈성대(血誠隊)를 조직하고 대장이 되어 5년여 동안 일본관청 및 친일단체를 습격하였다.
1926년에는 국내에 잠입하여 군자금 모금에 진력하다가 일본경찰의 추적을 받았으나, 만주로 무사히 돌아와 잠시 몽고에 망명하고, 1928년 3월 만주에 되돌아왔는데, 이때 공성환(孔成煥)의 밀고로 무순에서 붙잡혀 신의주경찰서로 압송되었다.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다음 해 평양복심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아 서울 마포 및 서대문형무소와 대전 등지의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그뒤 광복동지회 및 3·1동지회 부산지회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