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촌 ()

근대사
인물
대한제국기 때, 정용기의 산남창의진에서 우포장으로 활동한 의병.
이칭
이칭
백남신(白南信), 백영근(白永根)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2년(고종 19)
사망 연도
1964년
본관
수원(水原)
출생지
경상북도 영일
정의
대한제국기 때, 정용기의 산남창의진에서 우포장으로 활동한 의병.
개설

본관은 수원(水原). 별명은 백남신(白南信)·백영근(白永根). 경상북도 영일 출신. 백상목(白相穆)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최만년(崔晩年)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06년 3월 정환직(鄭煥直)의 명으로 정용기(鄭鏞基)가 영천에서 이한구(李韓久)·정순기(鄭純己)·손영각(孫永珏) 등과 의병을 일으켜 산남창의진(山南倡義陣)을 구성하였을 때 그 휘하에 들어가 우포장(右砲將)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계획이 실행되기에 앞서 의병장 정용기가 관군에 붙잡히자 청하와 경주 등지를 공격하는 등 소극적인 의병활동을 하였다. 그뒤 정용기가 출옥하여 1907년 4월 다시 산남의진을 형성할 때 소포장을 맡아 영덕에서 적군 수십명을 사살하는 등 전과를 올렸다.

그해 9월 입암전투(立巖戰鬪)에서 의병장 정용기가 순국한 뒤 정환직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좌익장(左翼將)에 임명되어 영덕에 두 차례 잠입하여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뒤 군자금 모금에 주력하여 1908년 7월 청하군 죽남면의 김재정(金載貞)에게 군자금을 강요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11년 7월에 일제에 의해 소위 강도 살인 및 구타 등의 죄로 대구지방법원에서 7년형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18년 9월 만기출옥한 뒤 일본경찰의 감시하에서도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산남창의지(山南倡義誌)』
『산남의진유사(山南義陣遺史)』
『독립유공자공훈록』1(독립유공자공훈록편찬위원회, 1986)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독립운동사자료집』 3(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한국독립사』(김승학, 독립문화사, 1965)
집필자
박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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