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아주(鵝洲), 호는 치암(痴菴)이다. 1904년 경상북도 봉화에서 출생했다.
1910년부터 홍치유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1918년 4월 경북 봉화공립보통학교에 입학, 3 · 1운동과 관련되어 1919년 6월 중퇴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20년 4월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에 입학, 1921년 3월까지 수학했다. 귀국 후 1921년 4월 중동학교에 입학, 1924년 3월 졸업했다. 졸업 직후인 1924년 4월 경성제국대학 예과 문과에 입학, 1926년 3월 수료 후, 1926년 4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사학과에 입학, 1929년 3월 졸업했다. 조선총독부 직속 기구인 조선사편수회의 촉탁이 되었고, 1930년 5월에는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에 임명되고, 1937년 9월 수사관으로 승진해 해방될 때까지 근무했다. 1930년 8월에는 청구학회의 편집위원이 되어 10년간 활동했다. 한편 1934년 진단학회의 발기인이 되었다. 1940년에는 기원2600년축전 기념장을 수여받았다.
해방 직후, 조선사편수회가 보관하고 있던 「일본공사관기록」의 원판을 소각하려 하자, 김건태와 함께 중추원 서고로 옮겨 보관했다. 이후 1945년 8월 진단학회 상임위원, 10월 조선역사협회 부회장, 12월 조선사연구회 부회장이 되었다. 1946년 1월에는 임시중등국사교원양성소를 설립하고 강사로 활동했고, 3월에는 국사관을 설립, 9월 사무국장에 취임했다. 1946년 3월 고려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었고, 1947년 1월 국민학교 및 중고등학교 사회과 교수요목제정위원, 2월에는 국정교과서 편찬심의위원이 되었다. 1949년 문교부 편수국장이 되었다. 1951년부터 성균관대학교 교수를 겸임했으며, 1954년 제1회 학술원 회원에 선출되었고,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62년에는 독립유공자상훈심의위원회 위원과 유네스코한국위원회의 위원이 되었다. 1964년에는 종신회원이 되었다. 1961년에는 혁명재판사편찬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1965년에는 민족문화추진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67년 12월 한국사연구회를 조직, 회장으로 취임했다. 1981년 2월 13일 사망했다.
대한민국 문화훈장(대통령장, 1963)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