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구 ()

목차
천도교
인물
해방 이후 천도교총부 상주전도사, 현기실장로, 교령 등을 역임한 천도교인.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3년(고종 20) 9월 27일
사망 연도
1967년 2월 10일
본관
평산
출생지
경상남도 고성
목차
정의
해방 이후 천도교총부 상주전도사, 현기실장로, 교령 등을 역임한 천도교인.
내용

1883년 경상남도 고성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평산(平山), 도호(道號)는 묵암(默菴)이다. 18세까지 한학을 공부했으며, 1905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해 3년 후 귀국했다. 1914년 진주에서 황태익(黃泰益) 접주의 인도로 천도교에 입교해 1915년부터 천도교 경상남도 창녕군 전교사(傳敎師)로 활동을 시작했다. 1920년부터 진주대교구 전제원(典制員)·강도원(講道員)을 거쳐 1923년 종리사(宗理師), 1925년 천도교 청년당 영남 대표, 1927년 시법포(侍法布) 주관포덕사(主管布德師) 등을 지냈다.

1929년 천도교 중앙총부 결의기관의 종법사(宗法師)가 되면서 도사의 명예직과 묵암(默菴)이라는 도호(道號)도 받았다. 또한 1930년 12월 28일 천도교 신·구파 합동 후 열린 첫 사관(司觀) 회의에서 중앙종리원(中央宗理院) 상무종법사(常務宗法師) 5명 중 1인으로 선정되었고, 1933년부터 1935년까지 순원포(順源布) 주관도정(主管道正), 법정(法正)을 역임했다.

1936년 중앙종리원 부대령(副大領)과 성도관정(誠道觀正)을 역임했으며, 1937년 4월 천도교 중앙종리원을 대표하는 도령(道領)이 되어 1939년 4월까지 2년간 재임했다. 도령으로 재임하던 1938년 2월 「육군특별지원병령」공포를 기념해 조선지원병제도제정축하회 발기인, 1938년 6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결성에 천도교단 대표로 참여했다.

1939년 4월 도령 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중앙종리원 현법사(玄法師)에 선출되었고, 6월 국민정신총동원 천도교연맹 이사로 선임되었다. 1940년 11월 천도교 대표 중진 교역자인 교령 이종린 등과 신궁참배단의 일원으로 이세신궁과 메이지신궁 등을 참배하였다. 1941년 9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천도교총부 상주(常住) 전도사에 선출되었고, 1953년부터 1957년까지 현기실(玄機室) 장로, 1961년부터 1966년까지 4차에 걸쳐 교령에 선출되었다. 1961년 5월 18일에는 5·16군사정변을 지지해 군사혁명위원회를 방문하였고, 이 자리에서 “장(張) 정권의 무능, 무력과 부패상을 지적하고 군사혁명의거를 적극 지지하며 앞으로 모든 불의 부정과 사회악을 제거하고 혁명 과업을 수행함에 있어 가진 힘을 다하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1967년 2월 10일 사망했다. 상훈으로는 1963년 8월 대한민국 문화훈장(국민장)이 있다.

참고문헌

『친일인명사전』2 (민족문제연구소, 2009)
『천도교회 종령존안(宗令存案)』(이동초, 모시는사람들, 2005)
「일제하 진주지역 천도교의 문화운동」(김희주, 『동국사학』55, 2013)
「천도교 7대 교령 신용구씨 별세」(『경향신문』, 1967.2.11)
「군사혁명지지 메세지 전달」(『경향신문』, 1961.5.19)
「천도교에서 총동원에 적극참여」(『동아일보』, 1938.7.21)
「최고고문과 종법사선정」(『동아일보』, 1930.12.31)
집필자
김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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