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찬 ()

근대사
인물
대한제국기 때, 홍주의진 형성에 참여하여 참모로 활동하였으며, 국권 피탈 이후 파리장서사건으로 체포된 의병 · 독립운동가.
이칭
치규(穉圭)
규당(規堂)
이칭
안병찬(安炳燦), 한일선(韓一善)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54년(철종 5)
사망 연도
1929년
본관
순흥(順興)
출생지
충청남도 청양
정의
대한제국기 때, 홍주의진 형성에 참여하여 참모로 활동하였으며, 국권 피탈 이후 파리장서사건으로 체포된 의병 ·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치규(穉圭), 호는 규당(規堂). 일명 안병찬(安炳瓚). 충청남도 청양 출신. 안창식(安昌植)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94년 홍주의 교임(校任)으로 재직 중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당시 초토사(招討使) 이승우(李勝宇)와 함께 민요(民擾)를 평정하는 데 일익을 맡았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이 내려지자, 충청도 방면에서 제일 먼저 의거의 기치를 올린 홍성에서 아버지와 김복한(金福漢)·이설(李偰)·임한주(林翰周)·이근주(李根周) 등과 함께 홍주의진을 형성하여 참모로서 활동하였다.

동학농민운동 평정의 공으로 관찰사로 승진해 와 있던 이승우를 의병장으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오히려 배신당해 안병찬을 비롯한 홍주칠의사(洪州七義士)가 모두 잡혀 10년 유배형을 받았다가 특사로 풀려났다. 석방 후 홍릉주사에 제수되었으나 받지 않고 고향에 돌아갔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김복한과 이설이 반대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자신은 “대권이 모두 일인에게 넘어갔으니 천 장의 상소, 만 장의 공문서가 무슨 소용이랴.” 하면서 수천 명의 군사를 모아 1906년 합천(合川)에서 접전하였다. 그러나 이미 왜병의 병참소가 사방에 널려 있고 일진회원이 곳곳에 있어 패전하였다.

그 해 2월 23일 박창로(朴昌魯) 등 40여 명과 함께 잡혔다가 4월 12일 풀려났다. 다시 의병을 모아 4월 16일 민종식(閔宗植)을 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참모역을 맡았다. 1만여 명으로 구성된 홍주의진은 그 해 윤4월 9일 적의 포위공격으로 성이 함락되고 82명 사망, 145명이 잡히고 그 중 80명이 경성으로 압송되는 참패를 당하였다.

자신은 간신히 피신했으나, 1907년 10월 1일 아우 안병림(安炳琳)·윤난수(尹蘭秀)·이필한(李弼漢)·조광희(趙光熙) 등 5명과 함께 홍주의진과 관련된 인물을 조사할 때 공주로 압송되었다. 1919년에는 파리 만국강화회의에 보내는 장서서명사건으로 또다시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기려수필(騎驢隨筆)』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독립운동사자료집』 2·3(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1971)
『독립운동사』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집필자
박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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