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익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평안남도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와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 사천시장 일대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순국한 독립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8년(고종 35) 3월 11일
사망 연도
1921년 10월 17일
출생지
평안남도 강서
정의
일제강점기 때, 평안남도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와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 사천시장 일대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순국한 독립운동가.
생애 및 활동사항

평안남도 강서 출신. 1919년 3월 대동군 금제면 원장 장날에 최능현(崔能賢)·송현근(宋賢根) 등이 주동한 반석면 상사리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날 오후 1시경 3,000여 명의 군중이 헌병대 유치장에 갇혀 있는 애국지사를 구출하기 위하여 25리 떨어져 있는 원장으로 행진하였다. 이때 반석면장 김종화(金宗化)가 거사계획을 밀고하여, 일본헌병들이 미리 시장 입구에서 무장, 매복하여 시위대열을 기다리고 있었다.

만세시위대열은 이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계획을 강행하여 모락장[沙川市場] 입구에 도착하자, 이에 합세하였다.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자 대기하고 있던 일본헌병들이 발포하여 곳곳에서 사상자가 속출하였으나, 이에 굴복하지 않고 청년들과 함께 투석으로 대항하며 계속 만세시위운동을 진행하였다.

이어 형세가 불리함을 깨달은 분견소장 사토[佐藤]가 재빨리 총을 쏘아대며 도망가자 이를 붙잡아 살해하고, 먼저 달아났던 보조원 세명도 붙잡아 살해하고 구금중이던 동지 전원을 무사히 구출하였다. 이로써 모락장 진군의 목적은 일단 달성하였으나, 일본헌병과의 무력충돌로 13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4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날의 만세운동에서 안상익은 선두에 서서 주동하다가, 일제의 보복적인 대규모검거로 말미암아 붙잡혀 징역 15년형을 언도받고 상고하였으나 기각당하였다. 평양감옥에서 복역 2년 만에 옥사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자료집』 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독립운동사』 2(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집필자
김진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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