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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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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의 주요 사건들을 시대별로 수록한 야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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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전기의 주요 사건들을 시대별로 수록한 야사집.
내용

불분권 1책. 필사본. 필자 미상. 필자는 이 책 속에서 이 글을 ‘야사’라고 기록하지 아니하고 ‘야담’이라고 한 것은 겸손한 뜻에서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처음 이 글을 ‘매산소설(梅山小說)’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신하가 되어서 사서(史書)를 정리하거나 왕에게 직간하는데 있어서 말을 부드럽고 겸손하게 하는 이유로는 왕에게 촉노(觸怒 : 윗자리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거슬러서 화를 내게 만듦)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글은 필봉이 날카롭고 강해서 읽는 사람의 감정을 움직이는데 충분하다.

태조 당시의 사실을 기록한 것을 보면, 명태조 주원장(朱元璋)이 조선 태조의 화상을 구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 때 태조가 자신을 과장시키기 위해 명나라 화공을 꾀어서 화상을 크고 장엄하게 그려서 보냈으나, 명태조가 그것을 알아차리고 화공을 처벌한 뒤 다시 그리게 하여 가져간 사실이 있다.

이는 정사에는 없는 사실로, 이밖에도 정사에 없는 사실이 많이 언급되어 있다. 맹사성(孟思誠)이 대사헌이 되고 박안신(朴安身)이 지평으로 있을 때 태종의 부마인 조대림(趙大臨)이 죄를 짓자 상감에게 보고도 없이 구속한 사실이 있었다.

이를 알아버린 태종이 화가 나서 맹사성과 박안신을 죽이고자 했으나, 조금도 기색을 변하지 않고 몸은 죽어도 바른 일은 후세 사가가 증명한다고 해서 풀려난 사실의 기록도 정사에는 없는 것이며, 관리의 기개를 보여주는 좋은 글이다.

특히, 단종애사(端宗哀史)에서 사육신의 충절과 종친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의 충절을 직필로 다루어 보는 사람들의 충의심을 고무하였다. 또, 연산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비롯해 무오사화·갑자사화·기묘사화·을사사화의 사대사화 등 사림의 칠화(七禍)를 다룸에 있어서는 구체적으로 정리했고, 정미서벽옥사(丁未書壁獄事)와 기유옥사의 전말도 상세히 다루었다.

말미에 ≪동고집 東皐集≫이 있는데, 그 가운데 <유차 遺箚>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왕에게 올린 글이다. 유차에서는 왕이 실시해야 할 4개 덕목을 열거하였다. 즉 ① 오직 학문에 힘쓰는 일을 가장 큰 것으로 생각하고, ② 아랫 사람을 대할 때에는 위의가 있어야 하며, ③ 군자와 소인을 구분해 군자는 친하고 소인을 멀리할 것이며, ④ 붕당의 사견을 파괴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또한, <녹견허태사조선풍속 錄遣許太史朝鮮風俗>에서는 중국 사람이 우리 나라 풍속을 알고자 문의한 것에 대해 아름다운 풍속만을 골라서 알려준 글이다. 즉 ① 사대부의 상례와 제례, ② 혼인에는 육례를 갖출 것, ③ 선비의 아내는 남편이 죽어도 수절할 것, ④ 왕이 선농단(先農壇)에 친제(親祭)해 농사의 시범을 보일 것, ⑤ 2품 이상의 고관에게 연 2회 사연(賜宴)할 것, ⑥ 효우 및 의와 열을 가려서 시상할 것, ⑦ 종친과 대신의 죽음에 조회를 파할 것 등이 기록되었다. 그 밖에 오형제 이상 등과하면 세미를 지급할 것 등 38건의 미풍이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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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권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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