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진여 ()

근대사
인물
대한제국기 때, 광산군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일의병투쟁을 전개한 의병장.
이칭
이칭
양진여(梁鎭汝), 양진여(梁辰女)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62년(철종 13)
사망 연도
1910년(순종 3)
출생지
전라남도 광산
정의
대한제국기 때, 광산군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일의병투쟁을 전개한 의병장.
개설

일명 양진여(梁鎭汝, 梁辰女). 전라남도 광산(지금의 광주광역시) 출신. 의병장 양상기(梁相基)의 아버지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08년 7월 20일경 광산군에서 격문을 살포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의병장으로 추대되었고, 박성일(朴聖日)·김익오(金益五) 등으로부터 군자금과 군량을 징발하였다.

같은 해 11월중 광산군 대치산에서 일본 수비대를 맞아 혈전을 전개하였다. 또한, 11월 24일에 양진여부대를 포함한 의병연합부대 300여 명이 추월산에서 일본군과 전투하였지만 역부족으로 크게 패배하였다.

1909년에는 부하 100명을 이끌고 강판렬(姜判烈)부대 및 전해산(全海山)의 의병부대 270명과 더불어 장성·담양을 습격하고, 뒤이어 일본군의 본거지인 광주(光州)를 공략하려고 하였으나 적이 대병력를 배치하여 전력을 정비하므로 중단한 바 있다.

같은 해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무동촌에서 일본 수비대와 교전하던 중 잡히고 말았다. 1910년 3월 5일 대구공소원 형사부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같은 해 5월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독립운동사자료집』1·3(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1971)
『독립운동사』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대구공소원형사부판결문(大邱控訴院刑事部判決文)」
『朝鮮獨立運動』Ⅰ(金正明 編, 原書房, 1967)
집필자
박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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