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자범(子範). 호는 창해(滄海). 명나라 유민인 왕상생(王庠生)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왕도원(王道源)이며, 어머니는 전주최씨(全州崔氏)로 최수제(崔壽齊)의 딸이다.
왕덕구의 5대조 왕상생은 심양(瀋陽)에 볼모로 있던 봉림대군을 수종하여 조선에서 벼슬살이를 하였다. 그 음보(蔭補)로 왕덕구는 대보단수직관(大報壇守直官)을 지내고, 장원(掌院)·조지서(造紙署)·빙고(氷庫) 등의 별제(別提)를 역임하였다.
제조(提調)와 뜻이 맞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서 대보단 옆에 명나라 말의 의사를 모신 구공단(九公壇)을 설치하고, 그 옆에 열천재(洌泉齋)를 지어 기거하면서 황명(皇明)의 재기를 기원하였다.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사초구차자(辭貂裘箚子)」를 즐겨 읽었으며, 제자들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은 학문을 강론하는 데 있고,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은 복수보다 급한 것이 없다.” 라고 하여, 청나라를 쳐서 복수할 것을 주장하였다. 구공단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창해집(滄海集)』 4권이 있고, 왕덕구의 친필 편지를 모은 『창해공유간첩(滄海公遺簡帖)』과 가훈을 적은 「창해가범(滄海家範)」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