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덕구 ()

창해집
창해집
유교
인물
조선 후기에, 대보단수직관, 별제 등을 역임하였으며, 『창해집』, 『창해공유간첩』, 「창해가범」 등을 저술한 학자.
이칭
자범(子範)
창해(滄海)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88년(정조 12)
사망 연도
1863년(철종 14)
본관
미상
출생지
미상
주요 관직
대보단수직관(大報壇守直官)
정의
조선 후기에, 대보단수직관, 별제 등을 역임하였으며, 『창해집』, 『창해공유간첩』, 「창해가범」 등을 저술한 학자.
개설

자는 자범(子範). 호는 창해(滄海). 명나라 유민인 왕상생(王庠生)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왕도원(王道源)이며, 어머니는 전주최씨(全州崔氏)로 최수제(崔壽齊)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왕덕구의 5대조 왕상생은 심양(瀋陽)에 볼모로 있던 봉림대군을 수종하여 조선에서 벼슬살이를 하였다. 그 음보(蔭補)로 왕덕구는 대보단수직관(大報壇守直官)을 지내고, 장원(掌院)·조지서(造紙署)·빙고(氷庫) 등의 별제(別提)를 역임하였다.

제조(提調)와 뜻이 맞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서 대보단 옆에 명나라 말의 의사를 모신 구공단(九公壇)을 설치하고, 그 옆에 열천재(洌泉齋)를 지어 기거하면서 황명(皇明)의 재기를 기원하였다.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사초구차자(辭貂裘箚子)」를 즐겨 읽었으며, 제자들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은 학문을 강론하는 데 있고,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은 복수보다 급한 것이 없다.” 라고 하여, 청나라를 쳐서 복수할 것을 주장하였다. 구공단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창해집(滄海集)』 4권이 있고, 왕덕구의 친필 편지를 모은 『창해공유간첩(滄海公遺簡帖)』과 가훈을 적은 「창해가범(滄海家範)」이 전한다.

참고문헌

『중암집(重庵集)』
『창해집(滄海集)』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권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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