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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 당간 용두
금동 당간 용두
민속·인류
개념
기린 · 봉황 · 거북이와 더불어 사령이라 불려온 상상의 동물.
내용 요약

용은 기린·봉황·거북과 더불어 사령이라 불려온 상상의 동물이다. 용은 인류 문명의 4대발상지에서 모두 나타난다. 각 민족은 시대와 사회환경에 따라 나름의 용의 모습을 상상하고, 그 용이 발휘하는 조화능력을 신앙해왔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신화·설화·전설이 탄생했다. 중국 문헌에는 용이 각 동물이 가진 최고의 무기를 모두 갖추고 조화능력이 무궁무진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여기에 불교적 요소가 가미되고 우리의 창조력이 더해져 우리의 용이 완성되었다. 특히 물을 지배하는 수신으로 민간에서 신앙해왔으며, 왕권이나 왕위를 상징하기도 했다.

정의
기린 · 봉황 · 거북이와 더불어 사령이라 불려온 상상의 동물.
용의 모습과 의미

용은 고대 이집트 · 바빌로니아 · 인도 · 중국 등 이른바 문명의 발상지 어디에서나 이미 오래 전부터 상상되어온 동물로서 신화나 전설의 중요한 제재로 등장되어왔을 뿐만 아니라, 민간신앙의 대상으로서도 큰 몫을 차지해왔다. 용은 어디까지나 상상적 동물이기 때문에 민족에 따라 또는 시대에 따라 그 모습이나 기능이 조금씩 달리 파악되어왔고, 따라서 그 조각이나 묘사의 표현 역시 차이를 보여왔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생각해온 용은 대개 일찍이 중국인들이 상상하였던 용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의 문헌인 『광아(廣雅)』익조(翼條)에 용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해놓았다.

“용은 인충(鱗蟲) 중의 우두머리[長]로서 그 모양은 다른 짐승들과 아홉 가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즉, 머리[頭]는 낙타[駝]와 비슷하고, 뿔[角]은 사슴[鹿], 눈[眼]은 토끼[兎], 귀[耳]는 소[牛], 목덜미[項]는 뱀[蛇], 배[腹]는 큰 조개[蜃], 비늘[鱗]은 잉어[鯉], 발톱[爪]은 매[鷹], 주먹[掌]은 호랑이[虎]와 비슷하다. 아홉 가지 모습 중에는 9 · 9 양수(陽數)인 81개의 비늘이 있고, 그 소리는 구리로 만든 쟁반[銅盤]을 울리는 소리와 같고, 입 주위에는 긴 수염이 있고, 턱 밑에는 명주(明珠)가 있고, 목 아래에는 거꾸로 박힌 비늘(逆鱗)이 있으며, 머리 위에는 박산(博山 : 공작꼬리무늬같이 생긴 용이 지닌 보물)이 있다.”

이처럼 각 동물이 가지는 최고의 무기를 모두 갖춘 것으로 상상된 용은 그 조화능력이 무궁무진한 것으로 믿어져왔으며, 특히 물과 깊은 관계를 지닌 수신(水神)으로 신앙되어왔다. 그래서 “용은 물에서 낳으며, 그 색깔은 오색(五色)을 마음대로 변화시키는 조화능력이 있는 신이다. 작아지고자 하면 번데기처럼 작아질 수도 있고, 커지고자 하면 천하를 덮을 만큼 커질 수도 있다. 용은 높이 오르고자 하면 구름 위로 치솟을 수 있고, 아래로 들어가고자 하면 깊은 샘 속으로 잠길 수도 있는 변화무일(變化無日)하고 상하무시(上下無時)한 신이다.”(『管子』 水地篇)라 설명되기도 하였다.

중국민족이 상상해온 이와 같은 용의 모습이나 능력은 그것이 거의 그대로 우리 민족에게 수용되었다. 그래서 각종 용의 조각품이나 그림에서 위와 같은 용의 모습을 엿볼 수 있고, ‘용 가는 데 구름 간다.’라든가, ‘용이 물 밖에 나면 개미가 침노한다.’, ‘용이 물을 잃은 듯’이라는 등등의 격언에서 용의 기능을 살필 수 있다. 이러한 용은 춘분에는 하늘로 올라가고 추분에는 연못에 잠긴다고도 하며, 용신이 사는 곳은 용궁이라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용을 일컫는 우리말들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는 ‘龍(용)’자를 ‘미르 룡’이라 하였다. 여기서 용의 순수한 우리말이 곧 ‘미르’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미르는 물[水]의 옛말 ‘믈’과 상통하는 말인 동시에 ‘미리[豫]’의 옛말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말인 듯하다. 그것은 언어학적인 측면에서의 고찰이 아니라 하더라도 실제로 용이 등장하는 문헌 · 설화 · 민속 등에서 보면 용의 등장은 반드시 어떠한 미래를 예시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 예로 우리 나라 역사의 개술서(槪述書)라 할 『문헌비고』에 보면 신라 시조 원년으로부터 조선조 1714년(숙종 40) 사이에 무려 29차나 용의 출현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그런데 그러한 기록 뒤에는 거의 빠짐없이 태평성대, 성인의 탄생, 군주의 승하, 큰 인물의 죽음, 농사의 풍흉, 군사의 동태, 민심의 흉흉 등 거국적인 대사(大事)의 기록들이 따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서해 용왕이 왕건(王建)의 할아버지 작제건(作帝建)에게 “군지자손 삼건필의(君之子孫 三建必矣: 동방의 왕이 되려면 세울‘건’자 붙은 이름으로 자손까지 3대를 거쳐야만 한다)”라 일러준 것처럼(『高麗史』 世家 五) 용은 직접 미래를 알려주기도 한다.

또 불가(佛家)에서는 과거불을 비바시불(毘婆尸佛), 현세불을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그리고 미래불을 미륵불(彌勒佛)이라 하는데, 여기서의 미래불인 ‘미륵’ 역시 ‘미르’와 상통한다. 또한, “겨울에 연못의 얼음이 깨어지는데, 세로로 갈라지기도 하고 가로로 갈라지기도 한다. 읍인(邑人)이 이것을 용경(龍耕)이라 하는데, 가로로 갈라지면 풍년이고 세로로 갈라지면 물이 많다 한다.”(『東國輿地勝覽』 卷 四十二 安岳 山川條) 이와 같이 용은 미래를 예시해주는 신비로운 동물로 숭앙되어왔고 그 때문에 용을 ‘미르’라 부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한편, 미르, 즉 용을 지칭하거나 용과 관련된 말에 이무기 · 이시미 · 영노 · 꽝철이 · 바리라는 말이 있다. ‘이무기’는 일반적으로 용이 되려다 못 된 특별한 능력을 가진 뱀으로서, 그것은 깊은 물 속에 사는 큰 구렁이로 상상되어왔다. 그런데 이무기가 1,000년을 묵으면 용이 되어 하늘에 오른다고도 한다. 여기서 ‘용 못 된 이무기 심술만 남더라.’, ‘용 못 된 이무기 방천(防川:둑) 낸다.’는 등의 속담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시미’는 이무기의 방언으로서 「꼭두각시」각본(金在喆, 『朝鮮演劇史』)에서 보면 이시미가 사람이나 짐승을 함부로 잡아먹는 괴물로 등장한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괴물로 영노가 있다. 영노는 「동래야류」 · 「수영야류」 · 「통영오광대」 · 「고성오광대」「꼭두각시놀음」 등에 등장하는 괴물 내지는 걸신으로, 그 울음소리(대나무로 만든 호드기 소리)를 따서 ‘비비’라고도 한다. 영노의 모습을 보면 「통영오광대」의 영노는 푸른색의 용머리와 푸른 바탕색에 홍백청(紅白靑)의 무늬를 그린 용신(龍身)을 길게 단 용인데(李杜鉉, 韓國假面劇),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가상적 동물신이다. 가면극에서의 영노는 주로 양반들을 골탕먹이거나 잡아먹는 역으로 등장한다. ‘꽝철이’는 경상도일대에서 들어볼 수 있는 말로서 용이 채 못 된 뱀을 지칭한다. 그것은 하늘을 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하늘을 날 때는 하늘에 불이 가득해지고, 그 때문에 비가 오지 않아 가물게 된다고도 한다. 한편, 『계림유사』 · 『두시언해』에서 보면 용을 지칭하는 말로 ‘바리’라는 말이 보이기도 한다.

용신신앙에서는 용을 ‘용왕’ · ‘용왕할머니’ · ‘용신할머니’ · ‘용궁마나님’ 등으로도 부른다. 이처럼 용은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려져오면서 각양각색으로 상상되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용들은 충분히 발전되지 못하고 서로 계통이 없고, 명칭에서도 ‘龍’이라는 외래어에 눌려 순수한 우리말인 미르 · 이무기 · 이시미 · 영노 · 꽝철이 · 바리 등의 명칭은 이제 그 흔적마저 찾기 힘들게 되었다.

민속 · 설화에서의 용

민간신앙에서의 용

민간신앙에서의 용은 물을 지배하는 수신으로 신앙되면서 많은 용신신앙(龍神信仰)을 발생하게 하였다. 예나 이제나 사람은 물을 외면하고서는 잠시도 살아갈 수 없다. 특히, 농경민족에게 있어서 물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일찍이 물을 지배하는 것으로 믿어져온 용은 중요한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신라시대의 ‘사해제(四海祭)’ · ‘사독제(四瀆祭)’(『三國史記』 卷 三十二 雜志 第一), 고려시대의 ‘사해사독제’(『高麗史』 世家 四十二), 조선시대의 각처에서의 각종 용신제 등이 모두 그러한 용을 대상으로 한 거국적인 의식으로서, 그것은 생명의 원천이면서 농경의 절대적 요건인 물을 풍족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한 의식의 잔형은 아직껏 일부지역에서 전승되고 있는 용왕굿 · 용신제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용왕굿은 촌락사회 어디에서나 흔히 접할 수 있는 것으로서 식수의 고갈을 예방하고자 하는 의식이다. 어느 마을에서나 언제든 농악대가 우물 곁을 지날 때는 반드시 그 우물에 들러 우물 주위를 빙빙 돌며 빠른 농악을 울리다가 갑자기 농악을 뚝 그치고 나서 상쇠잡이가 우물을 향하여 “물주쇼, 물주쇼. 용왕님네 물주쇼. 뚫이라, 뚫이라. 물구멍만 펑펑.” 하고 기원한다. 기원하고 나서 다시 빠른 가락의 농악을 한바탕 울린 다음 그 우물을 떠나는 것이 하나의 관례이다. 이를 보통 샘굿 또는 용왕굿이라 한다. 한편, 농가에서는 음력 6월 15일, 즉 유두일이 되면 논의 주1에 보리개떡이나 밀개떡을 한덩이 쪄다 놓고 마음속으로 풍년을 비는 일이 있는데 이를 유두제 또는 용신제라고도 한다.

특히 운행우시(雲行雨施), 즉 마음대로 비를 오게 하거나 멈추게 할 수 있는 조화능력을 지닌 수신으로 신앙된 용은 가뭄때 기우(祈雨)의 중요한 대상인 신이 되어주었다. 그래서 이미 신라시대에서부터 기우에 용이 등장되었던 사실은 여러 문헌을 통하여서도 살필 수 있다. 즉, 용의 화상을 그려놓고 비를 빌었다거나(夏大旱移市 畫龍祈雨, 『三國史記』 卷 三十四 眞平王 五十年條), 흙으로 용상(龍像)을 만들어놓고 무당들로 하여금 비를 빌게 하였다(庚午 造土龍於南省庭中 集巫覡禱雨, 『高麗史』 世家 四十 顯宗 十二年 四月條; 四月癸巳 又禱 辛丑 司以久旱 請造土龍 又於民家畫龍禱雨, 『高麗史』 志 八 五行二)는 등의 내용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가뭄이 계속되면 오해신(五海神)에게 비를 빌기도 하였으니(己亥 祈雨于五海神, 『高麗史』 世家 十 肅宗十三年 四月條), 여기에서의 오해신은 동 · 서 · 남 · 북 · 중앙의 다섯 용왕을 의미한다. 이러한 일은 물론 조선조에 이르러서도 거의 그대로 전승되었다. 그래서 비가 오지 않아 동교(東郊)에서 토룡제를 거행하기도 하였고(祭土龍于東郊禱雨, 『朝鮮王朝實錄』 太宗 十四年 六月條), 오방토룡제(五方土龍祭)로써 기우십이제차(祈雨十二祭次)의 마지막 의식을 끝맺기도 하였다(李肯翊, 『燃藜室記述別集』 祀典).

그런가 하면 일반 민가에서는 비가 오지 않으면 특히 용자(龍子:용왕의 아들)가 들어 있는 연못(池 · 淵 · 潭 · 沼)이나 내 · 강 · 바다 · 산 · 바위 등지에서 기우제를 지내거나 그곳의 물을 병에 넣어 솔잎으로 막아 사립문에 거꾸로 매다는 등 주술적인 방법으로 비를 빌기도 하였다. 그래서 경기도의 용지(龍池) · 용두산, 충청도의 용연(龍淵), 경상도의 용수암(龍水巖), 전라도의 용지 · 용연, 황해도의 용정(龍井), 평안도의 구룡산(九龍山), 함경도의 장자지(長者池) 등은 효험이 큰 기우처로 널리 알려져 왔다(『中宗實錄』 中宗 二十六年 五月條).

용은 농경민들에게 뿐만 아니라 어민들에게 있어서도 어로신앙(漁撈神仰)의 중요한 대상으로서 숭배되어왔다. 그것은 용이 바다 밑의 용궁에 살면서 바다를 지배하는 용왕으로 전승되어왔기 때문이다. 용왕의 음우(陰祐:넌지시 도와 줌)로써 안전한 항해와 조업, 그리고 풍어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것이 용왕제 · 풍어제이다.

용왕제는 주로 어촌의 부녀자들이 음력 정초나 2월초의 만조 시를 택하여 해변에 간단한 제물을 차려놓고 사해용왕에게 가족의 안전과 풍어를 비는 의식이다. 그러한 의식이 끝나면 차려놓았던 제물을 골고루 조금씩 떼어 세 덩이를 만드는 것이 원칙이지만, 가족 중에 익사한 사람이 한 사람 있을 때는 제물덩이를 한 덩이 더 만든다. 제물덩이를 백지로 싸서 한 덩이 한 덩이 멀리 바다에 던지며 용왕으로 하여금 기꺼이 그 제물을 받아주기를 마음속으로 비는데, 이를 회식이라 한다(충청남도 보령군). 풍어제는 어촌의 전주민들이 온갖 정성을 모아 공동의 제장에서 그들의 공동목적인 항해의 안전, 안전한 조업, 풍농, 풍어, 그리고 마을의 태평을 기원하는 집단의 집단의식으로, 이를 당굿 또는 별신굿이라 하기도 한다.

풍수에서의 용

용은 일찍이 풍수에서도 매우 중요시되어왔다. 즉, 풍수설에서는 토지의 기복(起伏)인 산을 용 혹은 용 날이라 한다. 그것은 기복변화가 무상한 산이 마치 음양조화를 마음대로 하는 용의 조화와 서로 통한다는 뜻에서 나온 이름인 것 같다. 모든 산은 반드시 종산(宗山)이 있고 그로부터 연면 수만 리에 이르는 큰 산맥들을 이룬다. 풍수설에서는 모든 산의 종산을 태조산(太祖山)이라 하는데, 곤륜산(崑崙山)은 중국의 태조산이고 백두산은 우리 나라의 태조산이다.

이 태조산에서 뻗어 나오는 큰 산맥을 간룡(幹龍)이라 하고, 주산맥에서 분류하는 지맥을 지룡(枝龍)이라 한다. 용에는 귀천(貴賤) · 장단(長短) · 노약(老弱)이 있고, 또 용의 생김새로 보아서 길룡(吉龍) · 흉룡(凶龍) · 생룡(生龍) · 사룡(死龍)이 있다. 대체로 지기(地氣)가 집결하는 곳을 결절(結節) 또는 성요(星曜)라고 하는데, 산형(山形) · 산세(山勢)와 산맥 등에 따라서 오성구요(五星九曜)의 변화가 있다는 것이 풍수설의 간산법(看山法)이다. 지기의 왕성 여부는 산세가 웅장, 수려하고 산맥이 길수록 좋지만 아무리 높고 험준한 산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흉룡이거나 사룡인 것은 별 쓸모가 없다(李鍾恒, 風水).

설화에서의 용

용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많은 설화에서 중요한 모티프로 등장되어왔다. 몇몇 문헌의 내용에서만 보더라도 용이 등장하는 설화의 양이 결코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한 예로 『삼국사기』 · 『삼국유사』 · 『세종실록』 지리지 · 『동국여지승람』에는 각종 설화가 기재되어 있는데, 그 중 86편의 설화가 용과 관련된 설화들이다.

86편의 설화 중 『삼국유사』에만 하여도 탈해왕 · 만파식적(萬波息笛) · 수로부인(水路夫人) · 원성대왕(元聖大王) · 처용랑 망해사(處容郎 望海寺) · 진성여대왕 거타지(眞聖女大王 居陀知) · 남부여 전백제(南扶餘前百濟) · 무왕(武王) · 가섭불연좌석(迦葉佛宴坐石) · 황룡사구층탑(皇龍寺九層塔) · 황룡사장륙(皇龍寺丈六) · 흥륜사벽화보현(興輪寺壁畫普賢) · 전후소장사리(前後所藏舍利) · 낙산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洛山二大聖觀音正趣調信) · 어산불영(魚山佛影) · 보양이목(寶壤梨木) ·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 · 혜통항룡(惠通降龍) · 명랑신인(明朗神印) · 선도성모수희불사(仙桃聖母隨喜佛事) 등의 설화가 모두 용을 중요한 모티프(motif; 표현의 동기로 된 중심 사상)로 하고 있다.

이처럼 『삼국유사』에 대량으로 발견되는 용에 대한 자료는 대체로 호교(護敎)의 상징 내지는 호국(護國)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호교룡 혹은 호국룡에서 파생되는 설화 중에는 연구하여야 할 좋은 대상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하여야 할 자료는 『삼국유사』 권2 진성여대왕 거타지조에 나오는 용에 관한 설화라 하겠다. 이는 『고려사』 세계(世系)에 나오는 작제건이 용을 구하여준 설화와도 연결되며 「용비어천가」 제22장 도조(度祖)가 용을 도와준 설화와도 비교될 수 있어서 용 설화의 역사적 변천의 한 기본형태를 밝힐 수 있으며, 또한 용의 상징적 문제를 깊이 파고들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주고 있다(張德順, 한국설화문학연구, 1970).

용이 등장하는 설화 중에는 용의 출현으로 인하여 명명되었다는 용과 관련된 지명이나 호수 · 샘 · 바위 · 산 이름 등의 전설 또한 적지 않다. 그 중에서도 용소 · 용정 · 용연 · 용담 · 용혈암(龍血岩) · 용마연(龍馬淵) 등은 전국 어디서나 쉽게 들어볼 수 있는 이름들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용소설화

황해도 장연읍에서 몽금포로 가는 길옆에 용소가 있다. 옛날 그 주위에 활을 잘 쏘는 김활량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의 꿈에 그 용소에서 황룡이 나타나 다음날 청룡과 싸울 때 그 청룡을 활로 쏘아주면 보은하겠다는 말을 하고 사라졌다. 김활량이 황룡의 부탁대로 하여주었다. 그랬더니 그때까지 황무지였던 벌판에 황룡이 물을 대주어 그곳은 옥답이 되었고, 그로 인하여 김활량은 큰 부자가 되었다. 그래서 그 벌을 용정벌이라 하였다(韓國口碑文學大系 1-1, 1980).

황해도 신계군 율면 주도리에 한 소(沼)가 있다. 그 소에 접하여 있는 언덕 바위벽에는 이끼 같은 것이 끼어 있으나, 그 가운데는 이끼가 나지 않고 마치 무엇이 기어간 자취같이 보이는 것이 있다. 옛날 그 소에 용이 살았는데, 어느 해 몹시 가물어 그 소에 물이 마르자 용은 그 소에 있을 수가 없어 달아났다. 그 때 용이 기어간 자취가 곧 지금 남아 있는 자취라 하며, 뒷날 사람들이 이 소에 용이 살았다 하여 그 소를 용소라 부르게 되었다(崔常壽, 韓國民間傳說集, 1958).

용연설화

옛날 황해도 옹진군 용연면 용연리에 큰 우물이 있었다. 어느 날 상여가 지나다가 그 우물곁에서 쉬는데 갑자기 땅이 울면서 우물이 함몰되어 상여도 땅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때 함몰된 땅속에서 갑자기 물이 솟아오르고 그 속에서 흰 용이 나타나 하늘로 올라갔다. 그 뒤 이곳은 못이 되었는데, 가물 때도 물이 마르지 않고 언제나 물이 솟아오른다. 그래서 이 못을 용이 나타난 못이라 하여 용연이라 하였고, 마을이름도 용연리라 하였다(崔常壽, 韓國民間傳說集, 1958).

전라남도 담양군 추월산(秋月山) 동쪽에 두개의 돌 연못이 있다. 기암 밑에는 용이 살았다는 굴이 있으며, 반석 위에는 구불구불한 용의 발자국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래서 그 두개의 못을 용연이라 한다(朴榮濬, 韓國의 傳說 8, 1973). 옛날 대구 봉덕동 대구천 못에 용마가 살았다. 힘센 백장군이 짚으로 인형을 만들어 용마를 유인, 용마를 잡아내어 기르다가 어느 날 용마와 함께 하늘 높이 올라가 버렸다. 그래서 그 못을 용마연(龍馬淵)이라 한다(崔常壽, 韓國民間傳說集, 1958).

용정설화

황해도 장연군 용연면 용정리에 있는 지금의 용정못 부근에 살던 무사 김선달이 청룡의 간청으로 청룡과 싸우는 황룡을 쏘아 죽였다. 청룡은 그 대가로 김선달에게 근처의 황무지를 옥답으로 만들어주어 김선달은 주2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 못을 용정이라 하고 마을을 용정리, 만석꾼 김선달의 자손들이 사는 동네를 만석동이라 하였다(崔常壽, 韓國民間傳說集, 1958).

용혈암설화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 창건시, 그 자리는 원래 연못이었는데 거기에는 용이 아홉 마리 살고 있었다. 이에 자장(慈藏)이 용이 다른 곳으로 떠나갈 것을 권유하였으나 용이 이를 듣지 않자 종이에 불 화(火)자 넉자를 써서 못에 던지고 법장(法杖)으로 연못을 저으니 물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러자 다섯 용은 오룡곡(五龍谷)으로 달아나고 네 마리 용은 어찌할 바를 모르다 죽어 그 피가 근방의 바위에 어리게 되었다. 그래서 그 바위를 용혈암이라 하였다(崔常壽, 韓國民間傳說集, 1958).

용꿈설화

용은 우리 조상들에게 있어서 큰 희망과 성취의 상징으로도 여겨져 왔다. 그래서 입신출세의 관문을 등용문(登龍門)이라 하고, 사람이 출세하면 ‘개천에서 용났다.’라고도 한다. 또한, 매우 좋은 수가 생겼다는 뜻으로 ‘용꿈 꾸었다.’라 하여 꿈 중에서는 용꿈이 가장 좋은 꿈으로 일컬어져왔다. 등용문의 고사는 중국의 황허(黃河)에서 시작되었다. 즉, 황허가 산시성(山西省)에 이르면 3단계 폭포를 이루는 곳이 있는데 그곳을 용문이라 하며, 잉어가 그 용문을 올라가면 용이 된다고 하여 입신출세의 관문을 등용문이라 하였다 한다. 용꿈에 얽힌 설화는 거의가 큰 경사를 예고하는 것들이다.

세조 때 홍 재상이 낮잠을 자다가 문득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진동하고 청룡이 그에게 달려드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난 홍 재상은 급히 시비 춘성과 관계를 맺었고, 그날부터 춘성에게는 태기가 있어 결국 홍길동을 출산하게 되었다(朴榮濬, 韓國의 傳說 8, 1973).

전라북도 정읍군 칠보면에 사는 함풍 이씨 문중의 이승지 아버지가 어느 여름, 돌확에서 청룡 세 마리가 나와 두 마리는 하늘에 오르고, 한 마리는 올라가다 떨어지고 올라가다 떨어지고 하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나 돌확(돌로 만든 조그만 절구)에 가보니 큰 지렁이 세 마리가 있어 그것을 집어 삼켜버렸다. 그러고 나서 아들 셋을 차례로 낳았는데, 그 3형제들은 모두가 인물이 좋고 재주가 좋아 그 중 형제는 승지가 되고 하나는 대동군수가 되었다(韓國口碑文學大系 1-1).

황해도 재령 땅의 어느 원의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머슴애가 어느 날 청룡 · 황룡을 타고 하늘에 오르는 꿈을 꾸었다. 그러고 나서 그 머슴애는 홀로 즐거워하였다. 그 기미를 알아차린 원이 무슨 꿈을 꾸었느냐고 다그쳐 물었지만 그는 끝까지 꿈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자 원은 그 머슴애를 옥에 가두었다. 죽을 날을 앞두고 옥안에서 큰 쥐로부터 죽은 쥐를 살려내는 잣대를 빼앗았다. 그때 공주가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그 공주를 살려낼 것을 자청하여 잣대로 공주를 살려내고 그 공주와 혼인을 하였다. 그런 소문이 대국에까지 퍼져 죽은 대국공주를 또 살려내게 되었고 그와도 또 혼인을 하게 되었다.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대국공주는 금대야에 우리 나라 공주는 은대야에, 각각 발을 한쪽씩 담가놓고 양쪽에서 발을 씻겨주니, 그는 마치 청룡 · 황룡을 탄 기분이었다(韓國口碑文學大系 1-4).

기타 설화

이상의 설화 이외에도 경상북도 영덕군 지품면 신안리 용추에 얽힌 설화처럼, 깊은 연못에서 용이 하늘로 올라가려고 발버둥치는데, 그 산 위의 조그만 길을 어느 아낙네가 파버려 아낙네도 죽고 용도 추락하여 그 연못을 용추라 하였다.(韓國口碑文學大系 7-6) 영덕 무등산 적벽봉 위의 큰 바위에 말발자국이 있는데, 이는 아기장수가 타던 용마가 발을 디뎠던 용마의 발자국이라는 등(韓國口碑文學大系 7-7)의 설화는 아직도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한편, 충청남도 공주군과 논산군에 걸쳐 있는 계룡산(鷄龍山)은 그 연봉(連峰)이 마치 닭의 볏을 쓴 용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산 서쪽에는 용문폭(龍門瀑)이 있고, 남쪽에는 숫용추와 암용추가 있다. 숫용추와 암용추는 신도안(新都案) 뒤쪽 계룡산 상봉 아래 기슭에 2㎞ 정도의 거리를 두고 동쪽 · 서쪽의 바위 사이에 각각 자리잡고 있다. 옛날 그곳에서 암용과 숫용이 살았다고 전하며, 양쪽은 땅속으로 서로 통하여 있다고도 한다. 그곳은 아무리 가물어도 절대로 물이 마르지 않고 언제나 파란 물이 가득한데 그 깊이는 명주실꾸리 몇 개를 풀어 넣어도 끝이 없다고 한다. 『세종실록』 지리지 충청도 공주조에 보면 “계룡산 아래 잠연(潛淵)이 있는데 가뭄에 기우하면 반드시 효험이 있다. ”라는 내용이 있다. 여기에서의 잠연은 위의 암용추 · 숫용추를 지칭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교에서의 용

용을 상상할 때 우리들의 머리에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중국 용의 모습이다. 그런데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원래 상상되었던 중국 용의 모습에 새로운 인도 용의 관념이 혼입되었다. 인도에서는 뱀을 신격화한 개념으로 용이 등장한다. 그래서 용왕의 관념은 코브라 중 최대의 종류인 킹 코브라의 형상에서 생겨난 것이라고도 한다. 인도에는 원래 독사의 위험이 많아 그 원주민들은 일찍이 사신숭배(蛇神崇拜)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아리안 민족은 인도를 정복한 뒤 원주민들의 그러한 신앙을 이어받았고, 용은 오랫동안 불교와의 대립투쟁을 거쳐 마침내 불교의 호교자(護敎者)가 되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용왕 · 용신은 천왕팔부중(天王八部衆 : 天 · 龍 · 夜叉 · 乾闥婆 · 阿修羅 · 迦樓羅 · 緊那羅 · 摩喉羅迦)의 하나로서 불법을 수호하는 반신반사(半神半蛇)이며, 산스크리트어(梵語) Nāga의 역(譯)이다. 『인도백과사전(印度百科事典)』 번역명의집(飜譯名義集) 팔부중편(八部衆篇) Nāga조(那伽條)에 보면 용을 ① 천궁(天宮)을 수호하는 용, ② 비[雨]를 부르는 용, ③ 지룡(地龍) · 회전륜왕(回轉輪王) 대복팔장(大福八藏)을 윤(輪)하는 용으로 분류하였다. 이러한 용은 원시불교성전(原始佛敎聖典) 이래 등장하며, 불교에서의 용은 선악 양면의 관계로 나타난다.

선룡(善龍)은 불법을 수호하는 용으로서 특히 8대 용왕인 난타(難陀) · 발난타(跋難陀) · 사가라(娑伽羅) · 화수길(和修吉) · 덕차가(德叉迦) · 아나바달다(阿那婆達多) · 마나사(摩那斯) · 우발라(優鉢羅)는 불법을 옹호하는 선신으로 존경받는 여덟 용왕이다. 이러한 용왕은 불법을 옹호할 뿐만 아니라 적시에 비를 오게 하여 오곡풍작을 가져오게도 하는바, 특히 팔대 용왕 중의 사가라용왕은 바다의 용왕으로 기우의 본존(本尊)으로 신앙되어왔다. 이처럼 용이 기우의 대상이 된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용이 수중에 살면서 구름을 부르고 비를 오게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신화엄경(新華嚴經)』 제43에 보면 용왕 · 대룡(大龍)이 큰비를 오게 한다는 내용이 있고, 『대지도론(大智度論)』 제3에도 “대해에서 대용왕이 나와 대운(大雲)을 일으켜 허공을 덮고 대전광(大電光)으로 천지를 비추고 대홍우(大洪雨)를 내리게 하여 만물을 윤택하게 하듯이”라는 내용이 있다. 이처럼 불교에서의 용은 큰 바다에 살고 때로 운우전광(雲雨電光) 등의 사상(事象)을 나타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용왕이 사는 궁전을 용궁이라 하며, 용궁은 물속이나 물위에 있다고 믿어져왔다. 현세의 불법이 유행하지 않게 될 때 용왕은 용궁에서 경전을 수호한다고도 한다.

여러 경론(經論) 중에는 용에 대한 설화가 많다. 한 예로서 『과거현재인과경(過去現在因果經)』 제1, 『수행본기경(修行本起經)』 상권, 『보요경(普曜經)』 제2,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 제3 등에 보면 불(佛) 강탄시(降誕時) 난타(難陀) 및 우파난타(優波難陀) 용왕은 허공 중에서 청정수(淸淨水)를 토하여 일온일량(一溫一凉)으로 태자의 몸에 물을 뿌렸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또한, 인도의 대승불교를 크게 드날린 용수(龍樹, Nāgārjuna)가 용궁에 들어가 『화엄경』을 가져왔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우리 나라의 불교가 삼국통일 이래 독자적인 호국신앙으로 발전함에 따라 이에 수용된 용은 호국룡으로 대두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영원한 왕권과 호국을 기원하는 데 용이 이용되기도 하였다. 황룡사구층목탑이 그러한 예의 하나이며, 문무왕이 죽어서 대룡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한 말이나, 만파식적에 얽힌 설화들에서 호국룡으로서의 용의 정체를 엿볼 수 있다.

제왕의 상징으로서의 용

용이 가진 장엄하고 화려한 성격 때문에 흔히 용은 위인과 같은 위대하고 훌륭한 존재로 비유되면서 왕권이나 왕위가 용으로 상징되기도 하였다. 중국에서는 천자(天子)에 대하여 그 얼굴을 용안(龍顔), 덕을 용덕(龍德), 지위를 용위(龍位), 의복을 용포(龍袍)라 하였는데, 그것이 우리 나라에서도 그대로 수용되어 임금을 지칭하는 말로 쓰여졌다. 이 중 용포는 임금이 시무복(視務服)으로 입던 정복(正服)의 하나로서 이를 곤복(袞服) 또는 곤룡포(袞龍袍)라고도 한다. 그것은 두루마기 모양의 웃옷으로서 노란색이나 붉은 색 비단으로 지었고, 가슴과 등, 양어깨에는 발톱이 5개인 오조룡(五爪龍)을 금실로 수놓았다. 임금이 앉는 평상을 용상(龍床)이라 하였고, 임금이 타는 수레를 용가(龍駕) · 용거(龍車), 임금이 타는 큰배를 용가(龍駕), 임금이 흘리는 눈물을 용루(龍淚)라 하였으며, 두 마리의 용이 서로 얽힌 모양을 수놓아 만든 천자의 기를 용기(龍旗)라 하였다.

이처럼 임금과 관계되는 것에는 거의 빠짐없이 ‘용’이라는 접두어를 붙여 호칭하였다. 이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용의 무한하고 경이로운 조화능력을 인정한 때문이며, 이러한 생각은 결국 용-군왕-하늘의 관계로 맺어지고, 결국에는 하나의 신앙으로 발전하여 호국룡사상(護國龍思想)이 발생하게 되었다.

제왕의 상징으로 용을 등장시킨 본격적인 문학으로서는 「용비어천가」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우선 그 명칭에서부터 용의 승천을 주요한 주제로 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먼저 「용비어천가」에 등장하는 용의 사례를 제시해보면 해동육룡(제1장), 흑룡 · 백룡(제22장), 와룡(臥龍, 제29장), 잠룡(潛龍, 제55장), 드르헤 용(제69장), 용안 (제97장), 믈 우○용, 집 우○ 용(제100장), 망룡의(莽龍衣) · 곤룡포(제112장) 등이 있다.

이상에 소개한 용의 의미를 분석해보면 ‘해동육룡’, ‘잠룡’, ‘드르헤 용’, ‘용안’, ‘망룡의 · 곤룡포’는 모두가 제왕의 상징으로서 용이 사용된 예다. 즉, ‘육룡’은 목조(穆祖) · 익조(翼祖) · 도조(度祖) · 환조(桓祖) · 태조(太祖) · 태종(太宗) 등 6명의 왕을 의미한다. ‘잠룡’은 태조를, ‘드르헤 용’은 중국 신(新)의 경시제(更始帝)를 의미하고, ‘용안’과 ‘망룡의 · 곤룡포’는 제왕을 의미하는 형용사이다. 그리고 제29장의 ‘와룡’은 위대한 인물을 의미하는 말일 뿐 큰 중요성은 없다.

위의 용들 중 주목되는 것은 제22장의 ‘흑룡’ · ‘백룡’, 제100장의 ‘믈우○ 용’ · ‘집우○ 용’인데, 이는 곧 제왕이 될 것을 미리 알리는 신비스러운 예언자로서의 구실을 하고 있다. 즉, 제100장의 ‘믈우○ 용’은 중국의 송나라 태조 조광윤(趙匡胤)이 장차 왕위에 오를 것을 예언하기 위해서 등장하였고, 같은 장의 ‘집우○ 용’은 이태조가 왕위에 오를 것을 예언하기 위하여 등장하였다.

이에 비하여 제22장의 ‘흑룡’ · ‘백룡’ 역시 왕위에 오를 것을 예언하는 구실을 하지만, 다른 예와는 구별되는 일면이 있다. 즉, 백룡을 도와서 흑룡을 퇴치하였으며, 그 결과 백룡이 도조에게 장차 자손이 왕위에 오를 것을 예언하기 때문이다. 우선, 인간에게 도움을 청하는 백룡의 존재가 용가에 나타난 예와는 특이하고, 흑룡은 다른 용들과는 전연 구별되는 이른바 악룡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따라서, 제22장은 단순히 제왕의 상징으로서 용이 등장한 것만이 아니고, 용에 대한 근원이 오래된 민간설화에 수용되어 있다는 점을 규명하여야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은 용이 등장된 「용비어천가」는 그것을 전체적으로 볼 때, 『주역』 건괘(乾卦)에 용의 진로를 응용하면서 흥미 있게 노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제1장의 “海東六龍이 ᄂᆞᄅᆞ샤 일마다 天福이시니…….”가 『주역』 건의 잠룡 시절을 상징한 것이라면, 제22장의 “赤帝 니러나시릴ᄊᆡ 白帝 ᄒᆞᆫ 갈해 주그니 火德之王ᄋᆞᆯ 神婆ㅣ 알외ᅀᆞᄫᆞ니…….”는 조선의 왕업이 바야흐로 『주역』 건의 현룡(見龍)과 같은 시기에 있음을 상징한 것이다.

또, 제55장의 “逐鹿未掎예 燕人이 向慕ᄒᆞᅀᆞᄫᆞ 梟騎 보내야 戰陣ᄋᆞᆯ 돕ᄉᆞᄫᆞ니…….”는 『주역』 건의 ‘종일건건(終日乾乾) 석척약(夕愓若)’을, 제100장의 “믈우○ 龍이 江亭을 向ᄒᆞᅀᆞᄫᆞ니 天下ㅣ 定ᄒᆞᆯ 느지르샷다…….”는 『주역』 건의 연(淵)에 있는 용이 장차 날려는 징조로 때로 혹 뛰어보는 시기를, 제112장의 “王事ᄅᆞᆯ 爲커시니 行陣ᄋᆞᆯ 조ᄎᆞ샤 不解甲이 현나리신ᄃᆞᆯ…….”은 『주역』 건의 ‘비룡재천(飛龍在天)’을 상징하여 말한 것이다. 왕이 되어 왕으로서의 위의(威儀)를 갖춘 것을 말한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용비어천가」는 『주역』 건의 초구잠룡(初九潛龍, 勿用) · 구이현룡(九二見龍, 在田) · 구삼종일건건(九三終日乾乾, 夕愓若) · 구사혹약(九四或躍, 在淵) · 구오비룡(九五飛龍, 在天)에 왕조를 비유한 노래라 할 수 있다.

용의 그림과 조각

상상적인 영물이라고 말하는 동양의 용은 비록 그것이 동물세계에 실존한 존재가 아니라 할지라도 동양인의 마음과 정신생활에 5,000년 동안이나 지배해왔고, 조형적으로 표현된 지도 4,000년이나 되므로 문화사적인 측면에서 용은 엄연한 실존물로 느끼게 된다. 용은 조물주의 단독 창조물이 아니고 자연현상과 인간의 마음이 융합함으로써 태어난 환상적인 또 하나의 창조물로, 어느 특수한 종교의 독점물도 아니고 모든 종교적 신앙행위뿐 아니라 민속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다같이 받아들인 영물이므로 위대한 존재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용에 관한 수많은 신화 · 설화 · 전설들은 용에 대한 신앙 · 학설 · 문학 또는 미술의 형태로 발전해나갔다. 그리고 이 모든 문화적 소산물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용의 형상이며, 그 형상을 실질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용의 미술이다. 용이 올라간다는 자연현상이나 용꿈에서 용의 모습을 찾고, 그것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조형시키려는 과정에서 용의 형상을 나타낸다. 용의 조형물 덕분에 더욱 실감나는 용꿈을 꾸고 등천하는 용의 모습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사람의 환상과 조형물이 주고받는 동안에 용의 형상은 다듬어지게 된 것이다.

『전한서(前漢書)』 교사지(郊祀志)에 황제(黃帝)를 영접하기 위하여 하늘에서 용이 내려왔다고 하였고, 『사기(史記)』에는 황제가 토덕(土德)을 얻어서 황룡의 형상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미술사는 이론적으로나마 용의 조형사를 황제로부터 시발한다. 한(漢)나라 때 『논형(論衡)』에 용이 승천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당나라 때 『유양잡조(酉陽雜俎)』에도 승룡에 관한 이론이 나온다. 민간에 퍼진 승룡의 이야기는 수없이 많으며, 현대인들도 고대인과 다름없이 우레 소리와 회오리바람에서 실감나게 용이 하늘로 오르는 현상을 경험해왔다.

용의 모습은 뇌성(雷聲) · 괴운(怪雲) · 선풍(旋風) · 전화(電火) · 폭우(暴雨) 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탄생하였다. 은(殷)나라 때 뇌운문(雷雲文)에서 용 미술사가 실질적으로 출발하여 용이 동물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다음 단계에 이르러서는 용의 탄생에서부터 비룡(飛龍)에 이르기까지의 성장과정에 대한 이론이 태어났고 이에 병행하여 용의 조형사가 뒤따르게 되었다. 대개 현대의 용 미술사는 중국의 유물과 문헌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우리 나라 자료에는 소홀한 감이 든다. 깊이 따지고 보면 용 미술사에 있어서 우리 나라의 미술자료가 탁월한 것이 많고, 중국 자료에서 찾지 못하는 귀중한 민속자료가 많이 숨어 있으니, 여기서는 그 숨은 자료를 활성화시켜서 과거의 용 미술연구를 보완하고자 한다.

용의 조형사에 있어서는 용의 탄생론보다 화생론(化生論)이 중요시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을 끄는 화생론은 사룡(蛇龍)과 어룡(魚龍)의 화룡설이다. 용의 형상에 있어서 뱀과 잉어의 요소가 지배적으로 나타나 있으니 이러한 화생론이 생긴 것은 당연한 일이다. 뱀의 화룡설에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본초강목(本草綱目)』의 기록과 같이 석척(蜥蜴, 도마뱀 · 도롱뇽)이 용이 된다는 설과 『시경(詩經)』의 훼사(虺蛇) · 훼훼(虺虺 其電) 등의 기록을 중심으로 한 독사뱀[蝮]의 화룡설이다. 어룡설에 있어서도 잉어의 화룡설과 문어[鮹]의 화룡설 두 가지가 대립되고 있다. 이러한 실존동물의 화룡설을 떠나서 용을 선행하는 기(虁)라는 괴물이 용이 된다는 기룡설(虁龍說)도 나타났다. 기의 모습은 도깨비얼굴을 가지고 올챙이같이 생긴 외다리 괴물이라는데, 그것이 자라서 기룡이 된다는 설이다.

우리 나라에는 이무기라는 특이한 이름이 있으며, 이것은 용의 새끼를 뜻한다. 그래서 훼룡이나 어룡이 다 이무기로 해석되고 그러한 것을 뒷받침할만한 조형물도 풍부하게 남아 있다. 훼는 은나라 때 동기문에 많이 나타나며, 두개의 훼룡 측면도를 합쳐서 하나의 주3을 형성시키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훼룡이 자라서 500년이 지나면 주4이 된다 하고, 용의 조형도 이 과정을 따르고 있다.

『대자전(大字典)』에 교룡은 용의 새끼이며, 모양이 뱀같이 생기고 길이가 열 자나 되며 네 개의 넓고 짧은 발이 있다고 하였다. 이십팔방각명신도(二十八方各名神圖, 에밀레박물관 소장)에 교룡과 용의 비교도가 뚜렷하게 나타나 있는데, 한눈에 이무기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교룡은 다람쥐 같은 귀여운 얼굴에 귀가 달리고 잉어꼬리와 네 발을 갖춘 뱀 모양으로 나타나 있다. 『광아』에 비늘 달린 용(有鱗, 蛟龍)을 교룡이라 하였으나 실증자료가 없다. 또 『사기』 고조본기(高祖本紀)에 한나라 고조의 어머니 머리 위에 교룡이 나타난 뒤 고조가 탄생하였다는 이야기도 있고, 또 다른 기록에는 훼룡이 자라서 교룡이 되어 승천한다고 하였으나 이를 뒷받침할만한 도상자료가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 나라 자료로 보완하여 판단하면 훼룡은 올챙이 꼴에 귀가 달린 이무기며, 교룡은 귀 달린 올챙이에 네 발이 달린 과정의 이무기로 보인다.

다음에 주5이라는 것이 있다. 『광아』에 뿔 없는 용을 이룡이라고 하였으나 고증자료가 확실하지 않다. 『대자원(大字源)』에는 이무기라 하였고, 『한서(漢書)』에 붉은 교룡이 이룡이라 하였고, 『삼재도회(三才圖會)』의 이룡 형상이 교룡과 비슷한데다 발가락이 독수리 같은 꼴로 보아 교룡이 한 단계 더 자라서 용에 가까운 형상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룡의 가장 좋은 자료는 신라시대의 석비이수(石碑螭首)가 바로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 돌계단에 설치하였던 계호석(階護石)으로 보이는 단독 이룡의 돌조각의 걸작이 발견되어 그 자상하고 세밀함이 분명해졌다(에밀레박물관 소장). 이 작품도 한눈에 이무기라는 점을 느낄 수 있는 귀여운 새끼용으로, 얼굴은 토끼같이 부드러운데 뿔이 약간 자라고 있는 상태이며, 몸에 비늘이 있고 꼬리가 유난히 길게 생겼다.

다음의 규룡(虯龍)은 『광아』에 뿔이 달린 용으로 되어 있고, 사전에는 뿔이 없는 용으로 되어 있어서 혼동을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적당한 고증자료도 없다. 다음의 반룡(蟠龍)은 『광아』에 의하면 하늘에 올라가기 전에 땅에 서리고 있는 용이라고 하였다. 이 과정의 용을 형태로 표현할 때는 엄밀히 따져서 구름의 배경 없이 몸을 구부린 자세로 나타내어야 옳다. 마지막으로 하늘을 나는 완성된 용을 응룡(應龍)이라고 하는데, 문헌상에는 흔히 나타나지만 일반적으로는 쓰이지 않는 이름이다. 고대의 유물에는 날개가 달려 있으나 한나라 이후의 것은 불꽃무늬[火焰文]로 바뀌어 동양 특유의 비룡상을 창작해내었다. 그러나 화염문은 사자 · 해태 · 기린 등의 영수에도 달았으니 그것은 상징적인 성화문(聖火文)이며 날개 대신 나타낸 것은 결코 아니다. 따라서, 불꽃무늬를 나는 장치로 해석하는 것은 근거가 없는 일이다.

동양의 용이 하늘에 오르기 위해서는 여의주(如意珠)라는 구슬을 지녀야만 한다. 원래는 척목(尺木)이라는 공작꼬리무늬같이 생긴 보물로 되어 있었다. 『유양잡조』에 말하기를 용머리에 박산(博山: 바다 가운데 있는 신선이 산다는 집)과 같이 생긴 척목이 있어야 승천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 동안 용의 형상을 연구한 사람들은 중국 육조시대 석각에 어렴풋이 보이는 척목자료를 억지로 제시하면서 그 기록에 부합시켜보았다. 놀라울 정도로 우리 나라의 용 미술 유물에는 상세하게 나타난 박산의 자료가 풍부하게 보전되어 있다(에밀레박물관 소장, 운룡도 · 와당). 박산이라는 특이한 용의 보물은 보주로 변하고, 불교의 참여로 인하여 여의주로 발전하여 용 몸에서 분리된다. 용의 턱밑에 보주가 감추어졌다는 장자(莊子)의 이야기가 용궁에 가서 여의주를 얻었다는 『태평어람(太平御覽)』의 이야기로 발전된다.

동양 고유의 용은 당나라 때에 완성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삼국시대 이래로 광범위하게 그 조형미술이 발달되어 회화부문에 있어서나 조각 · 공예부문에 있어서 동양 최고의 걸작들이 창작되었다. 완성된 용의 형상은 『회편세전(會編世傳)』의 구이삼정지설(九以三停之說)에 의하면 용의 뿔은 사슴뿔을 닮았고, 머리는 낙타머리를 닮았으며, 눈은 도깨비의 눈을 닮았고, 이마는 뱀의 머리를 닮았으며, 배는 지렁이의 배를 닮았고, 비늘은 잉어비늘을 닮았으며, 발가락은 독수리발가락을 닮았고, 발바닥은 호랑이발바닥을 닮았으며, 귀는 소의 귀를 닮았다고 하였다. 여기서 빠진 것이 있다면 용의 코밑에서 양쪽으로 뻗어나간 촉각과 얼굴 사면에 달린 털이다. 턱수염이나 구연(口緣:입의 가장지리)의 수염이나 이마의 털은 여러 가지 형태로 도안화되고, 촉각은 일반 귀면(鬼面:귀신의 얼굴)과 구별하는 데 있어서 절대적인 지표가 된다.

우리 나라 삼국시대 이후의 그림과 조각을 중심으로 용의 형상을 상징성과 조형물의 용도를 대조해가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우리 나라의 용 미술은 용이 승천하여 하늘을 상징하는 최고의 자리에서부터 시작하여야 하는 용의 성격은 주로 궁중미술에 적용되어 임금의 자리(龍座) · 수레[龍駕] · 배[龍舸] · 복장[龍袍] 등의 조형물이 생기고, 용좌(임금이 앉는 자리) 천장을 장식하는 ‘쌍룡도’ 그림이나 용좌의 배경으로 ‘용병(龍屛)’이 꾸며졌다. 궁중용으로 사치스럽게 마련된 이러한 미술품에서는 별로 주목을 끌만한 작품이 없다. 다만 ‘일룡병(一龍屛)’의 거작이 옛날 사생물에 나타나 있으나 보존되지 못하였다. 천룡사상은 불교 속으로도 침투하여 천룡호법의 탈을 쓰고 사찰건축의 천장을 장식하게 되었다. 통도사 대들보에 그려진 백룡의 단청화는 우리 나라 용그림을 대표할 수 있는 큰 규모의 걸작이다.

둘째로 용은 물에 관한 모든 일을 주관하는 수신으로서,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바다 속의 용왕으로서, 용신각 속의 용신으로서, 기우제의 우신(雨神)으로서, 지붕 위의 방와신으로서 용의 존재는 폭넓은 것이었다. 이러한 신앙이 5,000년 전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살아 있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조형물도 전해지고 있다. 용신신앙은 민간신앙이라고 하지만 임금까지 깊숙이 참여한 ‘민’의 신앙이었다. 그래서 이 신앙행위에서 태어난 미술품 중에는 미술사상 문제가 될만한 용의 그림들이 있다.

옛날에는 기우제를 토룡제(土龍祭) 또는 화룡제(畫龍祭)라고 불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진평왕 50년에 화룡제를 지냈다고 하였고, 『문헌비고』에도 용의 그림을 단상에 걸고 화룡제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왕조실록』 도처에 화룡을 임금께 바친 기록이 보인다.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오룡제를 지냈다 하였으니 오색화룡을 썼던 사실이 짐작된다. 이러한 화룡의 자료는 정통화 위주의 미술사에서는 도외시되어왔으나 민화의 재발견운동에 따라서 귀중한 자료가 다소 보존되었다(에밀레박물관 소장, 청룡도 · 백룡도 · 황룡도).

용신신앙 역시 불교와 융화되어 다듬어지고 『용왕경』을 탄생시키고 불화 공들에 의하여 격조높은 단청화나 탱화양식의 용 그림을 크게 발전시켰다. 용신신앙의 소산물로서 또 하나 주목되는 자료는 ‘용신탱화(龍神幀畫)’이다. 이것은 용궁에 있는 용왕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용이 인격과 신격을 갖추고 있는 모습으로 산신탱화(山神幀畫)와 병행하는 귀중한 종교화이다. 산신과 같이 용신도 백발의 노인 상으로 나타나는데 수염이 용의 수염을 닮은 것이 특징이다. 때로는 용궁부인으로 여신상을 취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용신탱화는 무당들도 모셨고, 사찰에서도 모셨고, 도관(道觀)에서도 모셨으나 문제작이 보존되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

셋째로 용은 귀신을 쫓는 벽사신(辟邪神)으로서도 큰 일을 담당해왔다. 수신으로서 불을 막는 구실을 한 것은 물론이고, 사신(四神 : 靑龍 · 白虎 · 朱雀 · 玄武)의 하나로서 동방의 수호신이 되고, 십이지신(十二支神)의 하나로서 진시(辰時)의 시직신장(時直神將)의 임무를 차지하였다. 천룡으로서 만복을 베풀고, 수신으로서 온 천지의 물을 지배한 용이 수호신으로서는 전문분야에 국한되고 말았다. 그러나 사신, 그 중에서도 좌청룡 · 우백호의 신앙은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쉴새없이 지키고 있다. 양택(陽宅)을 정할 때나 음택(陰宅)을 정할 때나 청룡백호의 명당자리가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어 수천 년 동안 모든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여왔으며, 이러한 민간신앙에서 용호도가 자라날 수 있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청룡도는 사신도의 최고의 작품으로서 정통미술사에서도 높이 평가되어왔다. 고려시대의 유물로서 석관(石棺)에 새겨진 음각문이 남아 있고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대문에 붙이는 호축삼재(虎逐三災) · 용수오복(龍輸五福)을 뜻하는 용호도로서 민예적(民藝的)인 용 그림을 크게 발전시켰다. 십이지신장으로서의 조형은 신라시대 왕릉병풍호석으로서 석조각 형태로 드러났고, 조선시대에는 불교식 장례에 쓰여진 현화(懸畫)로서 인신용면(人身龍面)의 특이한 형상을 나타내었다. 방화신(防火神)으로서는 삼국시대부터 와당무늬나 용마루의 용두(龍頭) 형식으로 조각품을 풍부하게 남겼다.

넷째로 용은 복을 가져다주는 시복신(施福神)으로서 서수(瑞獸 : 상서로운 징조로 나타나는 짐승)의 탈을 쓰고 나타난다. 즉, 용은 사령(四靈 : 龍 · 鳳 · 龜 · 麟)의 첫머리 위치를 차지하면서 길상(吉祥:좋은 조짐)의 상징으로 숭배되었다. 사람들은 용꿈을 좋아하였고, 그러한 꿈을 몰래 간직하기 위하여 용꿈그림[夢龍圖]까지 그렸다. 뿐만 아니라 선비들의 세계에서도 한결같이 용꿈이 숭상되었던 사실은 오죽헌(烏竹軒)의 몽룡실(夢龍室) 현판이 실증하여주고 있다. 이밖에 어변성룡(魚變成龍)의 고사에 따라 등용출세와 득남을 상징하는 어룡의 약리도(躍鯉圖)가 민화적인 화풍으로 발전하였다. 그림뿐 아니라 공예분야에 있어서도 잉어연적이 정형화되었고, 용 항아리가 상식화되고, 잉어자물쇠나 목기장식으로도 광범위하게 애용되었다.

사령미술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가장 주목할만한 것은 거북의 머리조각이다. 고려시대의 귀부(龜趺:거북모양의 빗돌 받침)에 있어서 거북머리를 용두로 조각한 것은 확실히 그 시대의 뚜렷한 경향이라고 보인다. 금산사혜덕왕사탑비 · 법천사지광국사탑비 · 고달사원종대사탑비 · 쌍봉사철감선사탑비 · 봉림사진경대사탑비 등의 귀부는 모두가 다 용두구신(龍頭龜身)으로 조형된 고려유물의 대표적인 걸작들이다.

다섯째로 용은 음악신(音樂神)으로서의 지위가 특이하다. 『시경』에 훼훼는 뇌성이라 하였듯이 이무기는 우레소리와 함께 움직인다. 『병장도(兵將圖)』에 의하면 황제(黃帝)의 대적인 치우족(蚩尤族)은 용의 울음소리를 제일 싫어하였다 하여 탁록대전(涿鹿大戰)에서 황제군은 소각(小角) · 대각(大角)의 악기를 만들어 용소리를 내면서 응룡으로 하여금 치우군을 공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잡조(五雜俎)』나 『잠확류서(潛確類書)』에 기록된 구룡자(九龍子)의 제1자 포뢰(蒲牢)는 울기를 좋아하였고, 제2자 수우(囚牛)는 소리를 좋아하였다.

그래서 범종 천장에 음통을 뚫고 용뉴(종의 꼭대기 부문의 장식)를 설치하였으며, 북통[鼓筒]에 용 그림을 그렸다고 전해진다. 구룡자(蒲牢 · 囚牛 · 蚩吻 · 嘲風 · 睚䀝 · 眉贔 · 狴犴 · 狻猊 · 覇下)의 모습은 현존하는 궁궐건축 지붕에 여러 가지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고 『삼재도회』에도 나타나 있다. 그 형상은 용의 모습과는 다른 괴수의 꼴로 나타나 있어서 용의 형상을 추구하는 데 다소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여섯째로 용은 학문의 세계에서도 숭상되었으며, 철학적으로 『역경』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였으며, 문학 · 동양서예 · 정통회화사 등에 두루 나타나고 있다. 용(龍)자의 대자글씨는 예로부터 서예가들이 다투어 쓰던 글씨였고 때로는 용 그림을 대신하여 사용되기도 하였다. 정통화 계통의 용그림은 대작이 보존되지 못하여 유감스러운 일이나 석경(石敬)「운룡도」, 현재(玄齋)의 「승룡도(昇龍圖)」, 최북(崔北)의 「의룡도(醫龍圖)」, 정수영(鄭遂榮)의 「등룡도(登龍圖)」 등 몇몇 작품들이 전해지기는 하였으나, 중국 진용화(陳容華)의 「구룡도(九龍圖)」같은 대작에 비하면 왜소한 자료들이다.

정통화 화제에 있어서 비룡재천(飛龍在天) · 용반호거(龍盤虎踞) · 용비봉무(龍飛鳳舞) · 용호상박(龍虎相搏) · 어변성룡 · 용문소미(龍門燒尾) 등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정통화 속에도 다분히 민속적인 요소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나라의 용 미술자료를 역사적으로 정리하여보면 고구려의 벽화, 신라의 용뉴와 이수, 백제의 용문전, 고려의 귀부, 조선조의 용민화 등이 각 시대를 대표하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 방대한 자료는 고대 용신앙이 불교와 습합되어 불교식 신앙행위와 불화 공들의 탁월한 솜씨로 완숙되었다. 미술사자료로는 종뉴 · 이수 · 귀부 · 치문 · 당간용두 · 용문단청 · 벽화 · 용신탱화 · 용문부도 · 용고 · 목어(木魚) · 용문와전 등 용의 그림과 조각의 걸작들이 거의 불교미술에서 나왔다.

용의 전체적 형상을 정리해보면, 사형(蛇形) · 사족수형(四足獸形), 그 중간형, 그리고 어룡형(魚龍形)으로 크게 분류해볼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창룡(蒼龍 : 별이름)은 사족수형의 대표적 작품이고, 조선조의 운룡도는 모두가 다 사형으로 나타난다. 이에 비하여 신라시대 와당(瓦當기와 마구리)에 나오는 용은 그 중간형으로 보이고, 절간 누각에 모셔진 목어는 어룡상으로 일관되어 있다. 색채를 중심으로 나누어보면 청(靑) · 백(白) · 주(朱) · 현(玄) · 황(黃)의 오방색으로 나타나서 『용왕경』이나 오행설 기록상의 용과 일치된다.

용 그림의 배경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구름을 배경 삼는 운룡도, 물속에서 뛰어나오는 수룡도, 아무 배경 없이 나오는 반룡도, 한쌍으로 꾸며지는 쌍룡도, 호랑이와 짝을 짓는 용호도, 호랑이와 힘 다툼하는 용호상박도, 용궁의 용왕으로 나오는 용신도, 하늘로 올라가는 승룡도, 잉어가 용으로 변하는 어변성룡도, 용꿈을 그린 몽룡도 등으로 나누어진다. 용의 조형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은 귀두(鬼頭) · 뿔 · 촉각 · 앞배 · 수염 · 뒷등 · 영치(靈齒) · 비늘 · 발가락 · 꼬리 · 여의주 등으로 구성된다. 용의 모습은 이러한 구성의 표현 여하에 따라서 용격이 이루어지고, 미술적인 화격이 정해진다. 특히, 용의 얼굴은 전통 귀면과 일치되며 눈 · 코 · 입 · 이 · 뿔 · 눈썹 · 촉각 · 수염의 표현이 용의 관상을 결정짓는다.

호랑이 · 도깨비 · 해태 같은 다른 벽사미술의 한국적 특성은 용의 미술에 있어서도 되풀이되어 무섭다든가 징그럽다기보다는 부드럽고, 맑고, 친밀감 넘치는 작품이 많다. 이러한 작품 중에는 할아버지 얼굴과 같은 인격을 갖춘 것도 있고, 바보스러운 표정도 나오고, 토끼같이 귀여운 모습도 나온다. 때로는 용두를 남근형으로 그려 웃음을 터뜨리는 매우 해학적인 모습도 나타나서 놀라게 한다. 신흥사 대웅전의 계호석 석룡조각은 부드러운 우리나라 용조각의 대표적인 걸작이라고 하겠으며, 신라시대의 이수조각은 귀염성을 여지없이 나타내었고, 조선조의 용그림은 매우 해학적이다.

용의 발가락도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 한나라 고조(高祖) 때는 제왕과 제1 · 2왕자만이 다섯 발가락의 용을 쓸 수 있고, 제3 · 4왕자는 네 발가락의 용을 쓰도록 규정하였다. 이 규정이 후세에 와서 중국의 황제만이 다섯 발가락의 용을 쓸 수 있고, 한국의 왕은 네 발가락의 용을, 일본의 왕은 세 발가락의 용으로 규정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정통화에서는 이러한 규정을 온순하게 지킨 것 같고, 민화의 세계에서는 다섯 발가락의 용 그림이 자유롭게 나타나 있다. 용의 몸집은 뱀을 닮은 탓으로 그 자세가 자유로워서 천변만화의 가지가지 자세를 취하면서 나타난다. 하늘을 나는 비룡상은 운룡으로서 표현되는데, 그림의 운룡도뿐 아니라 조각에 있어서도 환상적인 대작은 운룡으로서 용 미술의 멋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 나라의 용 미술은 중국의 경우와는 달리 민족적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민속적인 상징미술로서 깊이 뿌리를 내리고 광범위하게 성장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빠짐없이 참여한 가운데 일상생활에서 같이 살고, 초복벽사의 뜻을 품고, 한국미술의 멋을 여지없이 발휘한 특이한 창작으로서 미술사에 공헌하였다.

용의 모습, 의미의 현대적 변용

용은 어디까지나 상상의 동물이다. 그래서 각 민족은 그들의 시대와 사회환경에 따라 그들 나름대로 용의 모습을 상상하고, 그 용이 발휘하는 조화능력을 신앙해 왔다. 따라서, 민족에 따라 시대에 따라 용의 모습이나 조화능력은 조금씩 달리 묘사되고 인식되어왔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묘사해온 용의 모습은 크게 세 민족들이 상상해온 용의 모습이 한데 어울린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우리 민족은 일찍이 중국 민족이 상상해온 용의 모습을 받아들였다. 거기에 불교의 수용과 더불어 인도의 불교적인 용의 모습이 겹쳐 들어왔다. 그러면서 우리 민족 스스로의 상상력과 창조력에 의한 또 다른 새로운 용의 모습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세 가지 모습들이 한데 어울려 나타난 것이 우리 나라의 용이라 할 수 있다.

여러 동물의 특징적인 무기와 기능을 골고루 갖춘 것으로 믿어져온 용은 웅비와 비상, 그리고 희망의 상징동물인 동시에 지상 최대의 권위를 상징하는 동물로도 숭배되어왔다. 이러한 용은 운행우시를 자유롭게 하는 수신으로서, 불교의 호교자로서, 그리고 왕권을 수호하는 호국룡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면서 가지가지 용신신앙을 발생시켰고, 많은 설화의 중요한 모티프가 되어주었다. 거기서 민족이 융성하고 국운이 왕성할 때의 용은 보다 힘차고 용맹스러운 자태로 승천의 웅지를 떨치면서 민중 앞에 군림하였다. 반대로 민족의 기상이 미미하고 국운이 쇠진되었을 때의 용은 승천의 희망과 용기를 상실한 채 힘없는 뱀의 모습으로 비추어졌다. 용이 갈구하는 최후의 목표와 희망은 구름을 박차고 승천하는 일이다. 승천하지 못하는 용은 한갓 웅덩이의 이무기로 머물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민족이 상상해온 용의 승천은 곧 민족의 포부요 희망으로 표상(상징)되고 있다.

참고문헌

『용재총화(慵齋叢話)』
『유원총보(類元叢寶)』
『광박물지(廣博物志)』
『본초강목(本草綱目)』
『삼재도회(三才圖會)』
『동양화대관』(김용권 편, 한점수 역, 대성출판사, 1979)
「풍수」(이종항, 『한국민속대관』 3, 1982)
「고대용신사상에 관한 연구」(박계홍, 『한국민속연구』, 1973)
「용전설과 용가의 용」(장덕순, 『한국설화문학연구』, 1970)
「용신사상과 설화문학」(류증선, 『어문학』 11, 1964)
『東洋紋樣史』(渡邊素舟, 東京 : 富山房, 1978)
주석
주1

논에 물이 넘어 들어오거나 나가게 하기 위하여 만든 좁은 통로.    우리말샘

주2

곡식 만 섬가량을 거두어들일 만한 논밭을 가진 큰 부자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3

중국 은나라ㆍ주나라 때에 도철이라는 상상 속의 동물 모양을 본떠 종이나 솥 따위의 동기(銅器)에 새긴 무늬.    우리말샘

주4

상상 속에 등장하는 동물의 하나. 모양이 뱀과 같고 몸의 길이가 한 길이 넘으며 넓적한 네발이 있고, 가슴은 붉고 등에는 푸른 무늬가 있으며 옆구리와 배는 비단처럼 부드럽고 눈썹으로 교미하여 알을 낳는다고 한다.    우리말샘

주5

전설상의 동물로 뿔이 없는 용. 어떤 저주에 의하여 용이 되지 못하고 물속에 산다는, 여러 해 묵은 큰 구렁이를 이른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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