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나암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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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유적
중국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集安市)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석축 성곽. 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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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중국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集安市)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석축 성곽. 산성.
내용

기원후 3년(유리왕 22) 국내성(國內城)으로 도읍을 옮기고 쌓은 성으로 오늘날의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으로 보고 있다.

또, 일부에서는 198년(산상왕 2)에 쌓았다는 환도성(丸都城)도 위나암성과 같은 성으로 보고 있다. 집안현 성에서 북쪽으로 2.5㎞ 지점 해발 676m의 산 위에 위치한다. 지방민들은 이 산을 산성자산 혹은 환도산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산성자산은 장백산 줄기의 한 지맥인 노야령의 줄기가 압록강 북쪽에서 매듭을 지은 고지로서, 성의 남쪽에는 통구평야와 압록강이 있고 서쪽에는 압록강의 지류인 통구하가 있다.

성내에는 2개의 하천이 있는데, 하나는 성의 서북 모퉁이에서, 또 하나는 동쪽 산기슭에서 자연적으로 형성된 조그만 개울이며, 성의 남쪽 용성 부근에서 합쳐져 통구하로 흐른다. 축성에 사용된 석재는 화강암으로 길이 20∼50㎝, 너비 29∼40㎝, 두께 10∼27㎝ 정도의 잘 다듬은 돌을 사용하였다.

산성자산성은 자연적인 지세를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성벽의 규모는 동벽 1,716m, 서벽 2,440m, 남벽 1,786m, 북벽 1,009m, 총길이 6,951m에 이르는 큰 성이다. 성벽에는 여장(女墻:성가퀴)도 남아 있는데 높이 0.78∼1.3m, 너비 0.73∼1m 가량이다.

여장의 내벽 밑에 길이 10㎝, 너비 25㎝, 깊이 45∼80㎝의 장방형 기둥구멍이 있는데 대개 1.7∼2m 간격이다. 동벽 남단에 20개가 있고 북벽·서벽에도 있는데, 노(弩)를 고정시켰던 구멍들로 고구려의 산성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성의 문지는 5개로서 동벽과 북벽에 2개, 남벽에 옹문(甕門) 1개가 있고 서벽에는 없다. 옹문은 남벽 중앙의 안으로 들어간 지점에 위치하며 성문을 나서면 평탄한 통구하곡에 닿는다. 이 길은 국내성으로 통하던 중요한 통로였다.

문의 좌우 벽에는 성안으로 뻗은 너비 10m, 길이 15∼20m, 높이 1.5m 가량의 장방형 평대(平臺)가 남아 있다. 동벽의 2문은 문폭이 3m, 북벽 2문은 2m 가량이다.

성안에는 1개의 연못이 있는데 규모는 50∼60㎡로서 속칭 음마지(飮馬池)라는, 돌로 쌓은 연못이다. 28년(대무신왕 11) 요동태수(遼東太守)가 이 성을 침입하였을 때 이 연못에 잉어를 수초에 싸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성안에는 궁전터로 보이는 건물터도 남아 있는데 규모는 남북 92m, 동서 62m로 3단으로 되어 있다. 이 건물들은 본래 서향으로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고구려시대의 기와들이 널려 있다. 또, 성안에는 고구려시대의 고분이 37개나 있다.

특징

이 성의 건축사적인 특징은 남옹성의 구조와 노를 고정시켰던 기둥구멍과 성벽의 축조공법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역사적으로 고구려가 국내성에 도읍할 때 도성민들의 피난처로서 중요한 구실을 하던 산성이었다.

참고문헌

『通溝』(日滿文化協會, 1938)
「고구려환도산성」(이전복, 『문물』 19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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