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백규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 전라도 장흥에서 활동한 실학자.
이칭
자화(子華)
존재(存齋), 계항(桂巷), 계항거사(桂巷居士)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27(영조 3)
사망 연도
1798(정조 22)
본관
장흥(長興)
주요 저서
존재집(存齋集)
주요 작품
정현신보(政鉉新譜)|사서차의(四書箚義)|환영지(寰瀛誌)|본초강목(本草綱目)
내용 요약

위백규는 조선 후기 전라도 장흥에서 활동한 실학자이다. 윤봉구에게서 수학하여 노론의 학문을 계승하였으나, 다양한 학문에 대한 탐색 속에서 지방 사회의 현실과 접목하여 다양한 경세론을 제시하였다. 향촌의 자율성을 근거로 향중공론에 입각한 개혁론이라는 점에서 특징이 있다.

정의
조선 후기, 전라도 장흥에서 활동한 실학자.
가계 및 인적 사항

위백규(魏伯珪)의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자화(子華), 호는 존재(存齋) · 계항(桂巷) · 계항거사(桂巷居士)이다. 할아버지는 위세보(魏世寶), 아버지는 진사 위문덕(魏文德)이다. 부인 김해김씨는 김시성(金始聲)의 딸이다.

주요 활동

가학으로 배움을 시작하여 천문, 지리 등 다양한 서적을 공부하고 실용적인 학문도 접하였다. 20세 이후 향촌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등 교화에 힘쓰다가, 1750년(영조 26) 장흥부사의 주1을 받기도 하였다.

1751년(영조 27) 25세 때에 충청도로 윤봉구(尹鳳九)를 찾아가서 사제가 된 후에 15년 동안 학문에 전념하였다. 39세인 1765년에 생원시에 입격하였으나 대과를 포기한 후 40세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향촌사회의 교화와 자제들의 교육에 힘썼다.

고향의 계항산에 다산정사(茶山精舍)를 세우고 독서와 저술에 힘쓰는 한편, 양정숙(養正塾)을 세워 문중의 자제와 노비까지 모아 교육하였다. 그의 학숙은 향리에게 큰 영향이 있었으며, 중앙정부에까지 알려져 70세가 되던 해에 그의 문집이 내각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서영보의 천거로 기장현감 · 태인현감 · 옥과현감 등에 제수되었으나, 자신의 경세사상(經世思想)을 '만언봉사(萬言封事)'로 적어 올리고 사직하였다. 정조는 다시 장원서 별제(정6품), 경기전령(종5품) 등의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노환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72세로 생을 마쳤다.

학문과 저술

윤봉구를 통해 서인- 노론의 학맥을 계승하였고, 다양한 학문을 섭렵한 위에 지역의 현실을 반영하여 경세학(經世學)과 지리학 등에 남다른 성과를 냈다.

위백규의 학문적 특성은 첫째, 박학을 지향하였다. 경학(經學)이나 경세학 분야 외에도 지리학, 역사학, 문학, 유서학(類書學) 등 다방면에 걸친 저술을 남겼다. 그중에서도 『환영지(寰瀛誌)』와 같은 지리서 혹은 유서나 「상론(尙論)」과 「대명기(大明紀)」 같은 사론, 이 밖에 『정현신보(政鉉新譜)』, 『경서조대(經書條對)』, 『경서차록(經書箚錄)』, 『고금(古琴)』, 『시소전기서설(詩疏傳記序說)』 등이 있다.

둘째, 사회 개혁에 관한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였다. 토지 제도, 세제, 군역, 공물, 상공업, 지방행정, 관리 선발 제도, 도량형 제도, 민생안정론, 향토방위론까지 국정 전반에 걸친 내용이었다. 특히, 이러한 개혁을 위해 향촌 사회의 지식인들을 주도 계층으로 설정하여 지역의 향촌, 그 가운데서도 주2의 공론과 자율성이 중심이 되는 개혁안을 제시하였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상훈과 추모

1805년(순조 5) 향리 유생들의 발의로 죽천사(竹川祠)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매산집(梅山集)』
『병계선생문집(屛溪先生文集)』
『사마방목(司馬榜目)』
『존재집(存齋集)』

논문

김봉곤, 「『환영지(寰瀛誌)』를 통해 본 존재 위백규의 역사지리인식」(『역사와 실학』 61, 역사실학회, 2016)
김덕진, 「존재 위백규의 현실인식과 경제 개혁론」(『한국실학연구』 27, 한국실학학회, 2014)
김호, 「존재 위백규의 향촌 교화」(『정신문화연구』 37-1, 한국학중앙연구원, 2014)
오항녕, 「존재 위백규의 독사론(讀史論)- 「상론(尙論)」과 「대명기(大明紀)」를 중심으로」(『전북사학』 42, 전북사학회, 2013)
이해준, 「존재 위백규의 사회개선론: 18C말 향촌의 자율성 모색을 중심으로」(『한국사론』 5, 서울대학교, 1979)
주석
주1

고을 안의 인재를 천거함.    우리말샘

주2

향원(鄕員)의 동아리.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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