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수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 황해도관찰사,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지낸 문신.
이칭
치가(稚可)
급건(及健)
시호
충정(忠正)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45년(영조 21)
사망 연도
1821년(순조 21)
본관
연안(延安)
주요 작품
속북정시(續北征詩)
주요 관직
이조판서|호조판서|영의정
내용 요약

이시수는 조선 후기 황해도관찰사,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지낸 문신이다. 정조 초년에 본격적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대사간, 한성부판윤, 병조판서, 호조판서 등을 거쳐 우의정, 좌의정 등을 지냈다. 순조 대에는 영의정을 지냈다. 청을 다녀온 뒤에 연행 경험을 적은 「속북정시(續北征詩)」라는 장편의 시를 남겼다.

정의
조선 후기 황해도관찰사,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지낸 문신.
가계 및 인적 사항

이시수(李時秀)의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치가(稚可), 호는 급건(及健)이다. 고조할아버지는 이봉조(李鳳朝), 증조할아버지는 이정신(李正臣), 할아버지는 이철보(李喆輔)이다. 아버지는 좌의정을 지낸 이복원(李福源)이고, 어머니 순흥안씨는 안수곤(安壽坤)의 딸이다. 부인은 해평윤씨이다.

주요 활동

1771년(영조 47) 진사시, 1773년 증광시 문과주1로 급제하였다. 1776년(정조 즉위년)에 한림 권점에 뽑혔으며, 1780년에 홍문록, 도당록에 뽑혔고, 이후 부교리, 시독관, 이조좌랑 등을 지냈다. 같은 해에 영남 암행어사로 관리들의 부정과 대구 감영의 고리대업, 환곡과 주2의 폐단을 보고하였다. 1781년에 교리 재임 시에도 경상도 감영의 주3의 폐단과 대책을 보고하였다.

이후 1782년에 성균관 대사성, 1784년에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 같은 해에 승지로 있으면서 왕세자의 이름에 의견을 제시하여 결정되었다. 이후 이조 참의, 황해도관찰사, 개성부 유수, 한성부판윤, 공조판서, 병조판서, 호조판서 등을 거쳐 정조 대에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하였다.

순조 대에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무슨 일이든 치밀하고 기민하게 하였으며, 처세와 처신을 잘 하였다. 1804년(순조 4)에 정순왕후가 다시 수렴청정을 하려고 하자 대의를 내세워 끝내 반대하였다.

학문과 저술

68세 때 주4 책봉 주청사정사(正使)로서 청을 다녀온 뒤에 연행 경험을 적은 「속북정시(續北征詩)」』를 남겼는데, 1,606운, 3,212구, 16,060자로서 유례없는 장편의 시이다. 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참고문헌

원전

『국조방목(國朝榜目)』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순조실록(純祖實錄)』
『일성록(日省錄)』
『정조실록(正祖實錄)』
『청선고(淸選考)』

논문

김동준, 「「속북정시(續北征詩)」, 이시수가 시(詩)로 쓴 연행기(燕行紀)」(『서지학보』 25, 한국서지학회, 2001)
주석
주1

조선 시대에, 과거 합격자를 성적에 따라 나누던 세 등급 가운데 셋째 등급. 문과(文科)에서는 23명, 무과(武科)에서는 20명을 뽑아 정구품의 품계를 주었으며, 성균관ㆍ승문원ㆍ교서관의 임시직인 권지(權知)에 임명하였다.    우리말샘

주2

조선 시대에, 사섬시 등 중앙의 각 시(寺)에 둔 노비.    우리말샘

주3

남에게 빚진 돈.    우리말샘

주4

‘황태자’나 ‘왕세자’를 달리 이르던 말.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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