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익운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 개성 있는 시를 쓴 문신.
이칭
성명
심익운(沈翊雲)
붕여(鵬如)
지산(芝山), 합경당(盍耕堂)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34년(영조 10)
사망 연도
1783년(정조 7)
본관
청송(靑松)
주요 저서
백일집(百一集)
주요 관직
사헌부 지평|승지
내용 요약

심익운은 조선 후기 역적의 후손으로 관직에서 수난을 겪다가 개성 있는 시를 남긴 문신이다. 효종의 부마였던 심익현의 후손이지만, 동시에 영조의 즉위를 막으려다 역적이 된 심익창의 후손인 관계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도 논란이 되었다. 형인 심상운이 세손의 대리청정을 저지하다가 영조에게 화를 입어 유배로 일생을 마감하였다.

정의
조선 후기 개성 있는 시를 쓴 문신.
가계 및 인적 사항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붕여(鵬如), 호는 지산(芝山) 또는 합경당(盍耕堂)이다. 5대조는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沈之源), 방계 4대조가 효종의 부마 심익현(沈益顯), 증조할아버지는 심정옥(沈廷玉), 할아버지는 심중오(沈重歍), 아버지는 심일진(沈一鎭)이다. 어머니는 이구(李構)의 딸이다. 문인화가 심사정(沈師正)이 작은할아버지이다.

주요 활동

1759년(영조 35)의 문과 정시에서 장원 급제하여 낭관의 보직을 받았는데, 이조판서로부터 적절하지 않다는 비판을 받았다. 영조의 즉위를 막으려다 역적으로 죽은 심익창(沈益昌)의 후손이라는 이유에서이다. 이후 1760년에 예조판서 정휘량이 다시 양부 심사순과의 주1을 요청하는 심일진의 혈서를 전하면서 심익운이 손가락을 잘랐다는 소식을 전하여 논란이 되기는 하였지만, 1765년에 지평이 되었다.

이후 1774년 4월과 5월에 승지에 제수하라는 명이 있었다. 그러나 1775년 12월에 세손인 정조주2을 저지하기 위해 형인 심상운이 상소를 올려 영조의 격노를 사서 심상운은 흑산도로, 1776년 1월에 심익운은 북변으로 유배를 갔다. 이후 심익운은 제주목(濟州牧, 제주도 북제주군의 옛 행정구역)으로 이배되었다가 다음 해에 대정현으로 이배되었다.

학문과 저술

타고난 천재적 재주가 있었지만 뜻을 펴지 못하고 오직 시문으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문집으로 필사본 『백일집(百一集)』이 있다. 최근 충북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된 『백일년집(百一年集)』이 발굴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백일집(百一集)』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단행본

김동준, 『겨울을 향하는 풀벌레의 울음처럼- 지산(芝山) 심익운(沈翊雲)의 백일시집(百一詩集)』(태학사, 2017)

논문

김수영, 「심익운(沈翼雲)의 「열성어찰언서발」(列聖御札諺書跋)과 『숙명신한첩』(淑明宸翰帖)」(『인문논총』 78,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21)
김동준, 「심익운 한시에 나타난 문학적 지향과 비극적 체험의 격차」(『한국한시연구』 25, 한국한시학회, 2017)
박동욱, 「심익운의 『백일년집(百一年集)』 연구」(『어문연구』 42, 한국어문교육연구회, 2014)
주석
주1

양자 관계의 인연을 끊음.    우리말샘

주2

왕이 병이 들거나 나이가 들어 정사를 제대로 돌볼 수 없게 되었을 때에 세자나 세제가 왕 대신 정사를 돌봄. 또는 그런 일.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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