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은 영조의 아들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서자이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신군이다. 장현세자의 서자 가운데 첫째 아들인 은언군(恩彦君)에 이어 둘째 아들로 숙빈 임씨(肅嬪林氏)의 소생이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조부이다. 형인 은언군과 함께 영조에게서 노비가 많다는 비판을 받고, 이어 홍봉한이 양인 출신의 여자를 들여 유모로 삼은 일이 밝혀져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7세에 병들어 죽었다.
1765년(영조 41)에 관례를 치르고 1769년(영조 45)에 혼례를 하였다. 1771년(영조 47)에 영조가 창의궁에 거둥하여 기강을 엄정히 할 것을 하교하면서 은언군과 은신군이 참람하게 초헌과 교자를 타고 다니고, 그들의 겸종(傔從)과 복예(僕隸)가 많은 것을 비판하였다. 그래서 당시 17세인 은신군과 18세인 은언군을 서용하지 말고, 임장(任掌) 황경룡(黃景龍)을 정배하도록 명하였다.
황경룡의 공초에서 이흥록(李興祿)의 비리가 밝혀졌는데, 그 내용은 이흥록이 은신군 형제에게 학문을 가르친다는 핑계로 황경룡의 뇌물을 받아 은언군에게 그를 임장으로 삼도록 추천하고, 시민의 재물을 침탈하였다는 것이다. 또 영조는 홍봉한이 양인 출신의 여자를 들여서 은신군의 유모를 삼게 하는 등 만고에 없는 일을 하였다고 하여 그를 서용하지 말도록 하고, 은언군과 은신군도 전라도 능주목으로 정배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둘 다 제주도로 정배되었다.
은신군은 1771년 4월 제주도의 유배지에서 병에 걸려서 17세의 나이로 죽었다. 영조는 이에 종신(宗臣)의 예에 따라 운구하도록 하고, 부인에게도 휼전을 베풀었다. 이후 인평대군의 6대손인 남연군이 가계를 이어 흥선대원군과 고종에게로 계승되었다.
1774년(영조 50)에 관직이 회복되었다. 1776년(정조 즉위년)에 영조의 유교(遺敎)에 따라 연령군(延齡君)의 후사로 삼았으며, 은신군의 어머니인 숙빈 임씨도 복작되었다. 1779년(정조 3)에 은신군의 묘를 이장한 뒤에 '소민(昭愍)'의 시호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