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계춘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후기 진주 민란 당시의 주모자.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862년(철종 13) 5월 30일
목차
정의
조선후기 진주 민란 당시의 주모자.
생애 및 활동사항

호사가(好事家)로 평소 향회(鄕會)나 이회(里會)를 자주 가졌으며, 읍소(邑訴)와 영소(營訴)도 빈번히 하였다.

그러던 중 1861년(철종 12) 가을, 경상우병사 백낙신(白樂莘)의 탐학과 지방관의 수탈에 따른 읍폐(邑弊) 및 민막(民瘼) 문제로 장터에서 동지들과 모임을 가졌다. 또, 자신이 지은 노래 「언가(諺歌)」를 사람들에게 부르게 하고, 회문(回文)·통문(通文)·초군언서방목(樵軍諺書榜目) 등을 지어 돌렸다.

진주에 이사온 지 10년 밖에 안 되는 유망민(流亡民)으로 자기의 농토는 없었다. 맨 처음 민란을 모의한 것은 1862년 1월 유곡동(杻谷洞)에 사는 박수익(朴守益)의 사랑방에서였다. 이곳에서 농민을 충동할 방법과 동원된 민중을 효과적으로 이끌어나갈 행동 지침도 세웠다.

그 뒤 2월 중순, 수곡(水谷) 장터에서 농민군의 동원 문제와 철시(撤市)·훼가(毁家) 등 농민 봉기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며칠 뒤인 2월 18일 새벽, 먼저 수곡 장터를 휩쓸고 다시 불참자에게 협박해서 자금을 받아내고, 반대자는 집을 부수었으며, 모든 농민을 일시에 동원하기 위해서 서편의 덕산(德山) 장터로 몰려갔다.

이 날 해질 무렵에 유계춘이 이끈 농민군은 수만 명으로 불어났다. 그들은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손에는 농기구나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2월 23일까지 6일간의 봉기로 우병사 백낙신과 목사 홍병원(洪秉元)으로부터 통환(統還)과 도결(都結)을 영구히 혁파한다는 내용의 완문(完文: 관청의 증명서)을 받아냈다.

이 난으로 평소에 농민을 수탈하던 향리 4명이 죽고, 수십 명이 부상하였다. 또한 아전이나 부호의 집을 부수거나 불태운 것이 126호, 재산을 빼앗은 것이 118호나 되었다. 조정에서 파견한 안핵사 박규수(朴珪壽)가 현지에 도착해 주동자를 모두 체포하였다. 이에 유계춘은 김수만(金守萬)·이귀재(李貴才)와 함께 5월 30일 효수형(梟首刑)에 처해졌다.

참고문헌

『철종실록(哲宗實錄)』
『일성록(日省錄)』
『임술록(壬戌錄)』(한국사료총서 8, 1958)
「진주민난의 연구」(김진봉, 『백산학보』8, 1970)
집필자
김진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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