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수 ()

경암유고 / 윤동수
경암유고 / 윤동수
유교
인물
조선 후기에, 호조참의, 공조참의 등을 역임하였으며, 『경암유고』를 저술한 학자.
이칭
사달(士達), 대원(大源)
경암(敬庵)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74년(현종 15)
사망 연도
1739년(영조 15)
본관
파평(坡平)
출생지
미상
주요 관직
승정원동부승지|공조참의
정의
조선 후기에, 호조참의, 공조참의 등을 역임하였으며, 『경암유고』를 저술한 학자.
개설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사달(士達) 또는 대원(大源), 호는 경암(敬庵). 윤선거(尹宣擧)의 증손자로 윤자교(尹自敎)의 아들이다. 처음 부모의 명에 따라 과시(科試) 준비를 하였으나, 얼마 뒤 그 뜻을 버리고 성리학 공부에 전념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06년(숙종 32) 우의정 최석정(崔錫鼎)의 추천으로 내시교관에 제수되고, 1710년 시강원자의, 이듬 해에 종부시주부를 거쳐 익위사위수(翊衛司衛率)가 되고, 1716년 사헌부지평에 올랐다. 그러나 사문시비(斯文是非)에 관계되어 파직되었다가 한 달만에 복직되었다.

이듬 해 증조부 윤선거와 종조부 윤증(尹拯)에게 추탈(追脫)의 화가 미치자 벼슬을 버리고 종적을 감추었다가, 1722년(경종 2) 윤선거와 윤증의 관작이 복위되고 시호가 내려짐에 따라 사헌부지평에 다시 기용되었다.

이어 시강원진선(侍講院進善)으로 옮겼다가 이듬 해 사헌부장령에 강직(講職)을 겸하고, 이어 성균관사업(成均館司業)을 거쳐 단양군수로 나갔다. 1724년 하차은 사건으로 벼슬을 사직하고 돌아왔으나 다시 장령에 임명되었고, 1727년(영조 3) 진선과 집의를 거쳐 군자감정에 제수되었으며, 승정원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이듬 해 청주의 이인좌(李麟佐)의 난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던 중 난이 평정되었다는 말을 듣고 성에 들어가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가 이것이 허물이 되어 파직되었다. 이듬 해 다시 승지로 복직된 뒤 1731년 호조참의, 1737년 공조참의를 역임하였다.

학문에도 매우 전심하여 영조가 두 번이나 별유(別諭)로 소명(召命)하여 『주역』과 『성학집요』를 강의시킨 일이 있다. 저서로는 『경암유고(敬庵遺稿)』가 있다.

참고문헌

『경암유고(敬庵遺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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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권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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