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

한문학
인물
조선 중기에, 『손곡집(蓀谷集)』을 저술한 시인.
이칭
익지(益之)
손곡(蓀谷), 서담(西潭), 동리(東里)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39년(중종 34)
사망 연도
1612년(광해군 4)
본관
홍주(洪州)
출생지
홍주
주요 저서
손곡집(蓀谷集)
주요 작품
만랑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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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이달(李達)은 조선 중기에 『손곡집(蓀谷集)』을 저술한 시인이다. 본관은 홍주(洪州)이며, 자는 익지(益之), 호는 손곡(蓀谷)·서담(西潭)·동리(東里)이다. 이수함(李秀咸)과 홍주 관기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선 중기 시풍을 송시(宋詩)에서 당시(唐詩)로 바꾸었으며, 당대 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 일컬어졌다.

정의
조선 중기에, 『손곡집(蓀谷集)』을 저술한 시인.
가계 및 인적사항

자는 익지(益之), 호는 손곡(蓀谷) · 서담(西潭) · 동리(東里). 원주 손곡(蓀谷)에 묻혀 살았기에 호를 손곡이라고 하였다. 이수함(李秀咸)의 서자이다. 이달의 제자 허균(許筠)은 이달의 전기 「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을 지으면서 “손곡산인 이달의 자는 익지이니, 쌍매당(雙梅堂) 이첨(李詹)의 후손이다.”라고 기록하였다. 『고려사(高麗史)』 열전에 기재된 이첨의 관향(貫鄕)에 관한 서술 및 『태종실록(太宗實錄)』 태종 5년 3월 30일 기사에 수록된 이첨의 졸기(卒記)에 따르면, 이첨은 “홍주인(洪州人)”이라고 하였다.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 9권 문장부(文章部)에 따르면, “이달은 홍주인(洪州人)이다. 부정(副正) 이수함(李秀咸)이 고을의 기녀(妓女)를 축첩(畜妾)하여 낳은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활동사항

성수시화(惺叟詩話)』에 의하면, 이달은 조선 중기 당시 유행에 따라 송시(宋詩)를 배우고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으로부터 두보(杜甫) 시를 배웠다고 한다. 허균은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에서 이달은 박순(朴淳)에게서 “시도(詩道)는 마땅히 당시(唐詩)로써 으뜸을 삼아야 한다. 소식(蘇軾)이 비록 호방하기는 하지만, 이류로 떨어진 것이다.”라는 가르침을 받고 이백(李白)의 악부(樂府), 가(歌), 음(吟)과 왕유(王維), 맹호연(孟浩然)의 근체시(近體詩) 등을 통해 당풍을 습득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백, 왕유, 맹호연의 시를 보고 시의 오묘한 이치가 그들의 작품에 있음을 깨닫고, 원주의 손곡장(蓀谷庄)에서 칩거하며 5년 동안 두문불출하면서 『이태백집(李太白集)』과 성당십이가(盛唐十二家)의 글, 유우석(劉禹錫)과 위응물(韋應物)의 시, 양백겸(楊伯謙)의 『 당음(唐音)』 등을 모두 외웠다고 전한다. 이렇게 5년 동안 열심히 당시를 배운 후, 시풍이 예전과 달라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편, 1572년 경에는 호남 땅을 유람하면서 비슷한 품격의 시를 쓰던 최경창(崔慶昌), 백광훈(白光勳)과 어울려 시사(詩社)를 맺어, 문단에서는 이들을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봉은사(奉恩寺)를 중심으로 하여 여러 지방을 찾아다니며 시를 지었는데, 주로 전라도 지방에서 많이 모였다.

1578년 봄에는 남원부사(南原府使)로 승진한 손여성(孫汝誠)이 주최한 ‘광한루시회(廣寒樓詩會)’에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은 손여성과 이달을 포함하여 백광훈, 양대박(梁大樸), 임제(林悌), 고경명(高敬命) 등이었으며, 이후 이들과 자주 어울려 시를 지었다. 1580년 최경창이 대동찰방(大同察訪)으로 평양(平壤)에 있을 때 평양으로 찾아가 대동강과 부벽루를 유람하고 시를 지었다. 평안도를 두루 유람한 후 만년에 평양에 칩거하며 살았다.

이달은 서얼이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문과에 응시할 생각을 포기했으나, 또 다른 서얼들처럼 잡과(雜科)에 응시하여 기술직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특별한 직업을 가지지도 않았고, 온 나라 안을 떠돌아다니면서 시를 지었다. 한때 한리학관(漢吏學官)이 됐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겨서 벼슬을 버리고 떠났으며, 1609년 중국 사신을 맞는 접빈사의 종사관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일흔이 넘도록 자식도 없이 지내다가 평양의 한 여관에서 죽었다. 무덤은 전하지 않으며,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홍성군청 앞과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 손곡초등학교 입구에 그의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

작품 경향

이달의 시는 신분 제한에서 생기는 울적한 심정과 가슴 속에 간직한 상처를 기본 정조로 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의 시어를 맛깔나게 사용했다. 근체시 가운데서도 오언절구(五言絶句)에 뛰어났다. 김만중(金萬重)은 『 서포만필』에서 조선시대의 오언절구 가운데 이달이 지은 「별이예장(別李禮長)」을 대표작으로 꼽았다.

한편 허균은 「손곡산인전」에서, “이달의 시는 맑고도 새로웠고, 아담하고도 고왔다[淸新雅麗]. 그 가운데에 높은 경지에 오른 시는 왕유, 맹호연, 고적(高適), 잠삼(岑參)의 경지에 드나들면서, 유우석과 전기(錢起)의 기풍을 잃지 않았다. 신라 · 고려 때부터 당나라의 시를 배운 이들이 모두 그를 따르지 못했다.”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달이 평소 지었던 수천의 시편은 그가 죽자 산일되었으나, 제자 허균이 암송했던 200여 수와 홍유형(洪有炯)으로부터 얻은 130여 수 등 360여 수를 얻어 이재영(李再榮)에게 시체별로 편차하여 6권으로 편집하여 엮은 『 손곡집』 6권 1책이 전한다.

이밖에 최경창의 외당질 유형(柳珩)이 엮은 『서담집(西潭集)』이 있다고 전하나 현재 확인되지 않으며, 1623년(광해군 15, 인조 1) 이수광(李睟光)이 쓴 『서담집』의 서문(序文)만이 전하고 있다.

의의 및 평가

이달은 기존의 한시 통념과는 다르게 개척하고 기존의 가치를 바꾸어 놓음으로써 당대 문학의 질서를 뒤흔드는 구실을 수행했다. 이달은 삼당시인의 한 사람으로 학당(學唐)의 문을 열어 시가 서정의 문학이라는 인식을 제고해 주었다는 점에서 그 특징을 인정할 수 있으며, 이들의 시는 이조 중엽 이후의 시풍을 탈바꿈 시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서포만필(西浦漫筆)』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손곡집(蓀谷集)』
『제호시화(霽湖詩話)』
『학산초담(鶴山樵談)』

단행본

송준호 역, 『손곡 이달의 시 역해』(학자원, 2017)
허경진, 『손곡이달시선』(평민사, 1991)
이종묵, 「조선 중기 시풍의 변화 양상」(『한국 한시의 전통과 문예미』, 태학사, 2002)

논문

김종서, 「16세기 湖南詩壇과 三唐詩人」(『한국한시연구』 11, 한국한시학회, 2003)
김종서, 「<蓀谷山人傳>과 李達의 生涯」(『한문학보』 11, 우리한문학회, 2004)
김종서, 「蓀谷 李達 詩의 風格-淸新雅麗, 苦節을 중심으로-」(『한국한시연구』 13, 한국한시학회, 2005)
성충모, 「손곡 이달의 시세계」(인하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송준호, 「손곡 이달 시 연구」(『동방학지』 64,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89)
宋寯鎬, 「우리 漢詩의 理解를 위한 省察과 하나의 試論」(『한국한문학연구』 19, 한국한문학회, 1996)
李鍾虎, 「蓀谷 李達과 三唐詩」(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0)
전관수, 「이달의 시세계와 형상화 방식 연구」,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7.
이종호, 『삼당집해제(三唐集解題)』(해동문화사, 1985)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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