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창은 백광훈 · 이후백(李後白)과 함께 양응정(梁應鼎)의 문하(門下)에서 공부했다. 1555년(명종 10) 17세 때에 을묘왜란(乙卯倭亂) 당시 왜구를 만났는데, 최경창이 퉁소를 구슬피 불어 왜구들을 향수에 젖게 하여 물리쳤다는 일화(逸話)가 전할 정도로 퉁소를 잘 불었다고 한다.
1561년(명종 16) 23세 때부터 성균관 생원[上庠]이 되어 성균관에서 공부했다. 1568년(선조 1)에 증광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북평사(北評事)가 됐다. 예조(禮曹) · 병조(兵曹)의 원외랑(員外郎)을 거쳐 1575년(선조 8)에 사간원정언에 올랐다. 1576년(선조 9) 영광군수(靈光郡守)로 좌천(左遷)되자 충격을 받고 사직(辭職)하였다.
다음 해에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으로 복직(復職)했다. 1582년(선조 16) 53세에 선조가 종성부사(鍾城府使)로 특별히 제수(除授)했다. 그러나 북평사의 무고(無辜)한 참소가 있었고 대간(臺諫)에서 갑작스러운 승진을 문제 삼아서 선조는 성균관직강으로 고치도록 명했다. 최경창은 상경(上京) 도중에 종성 객관(客館)에서 죽었다. 저서로 『고죽유고』가 있다.
최경창은 학문과 문장에 능하여 이이(李珥) · 송익필(宋翼弼) · 최립(崔岦) 등과 무이동(武夷洞)에서 서로 시를 주고받았다. 또한 정철(鄭澈), 서익(徐益) 등과 삼청동(三淸洞)에서 교류했다.
최경창은 당시(唐詩)에 뛰어나, 백광훈 · 이달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렸다. 송시풍(宋詩風)에서 당시풍(唐詩風)으로의 전환을 통해 우리 한문학사의 분기점을 이룩하는 데에 중심이 되었다. 호남 지역의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당시를 수용하여, 시 창작에 있어서 까다로운 수사(修辭)와 난해한 전고(典故)의 사용을 배제하고 자신의 삶에서 우러나온 솔직한 정서를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표현하였다.
특히 그의 시는 그의 인성에서 나와 시 속에 쓸쓸한 작가의 심사나 가을과 같은 심경이 시 내면과 통합되어 ‘청한(淸寒)’이 시의 주된 정조(情操)를 이루고 있다. 그의 시는 청절하고 담백하다는 평을 받았는데, 백광훈과 이달의 시와 비교할 때 ‘한경(悍勁, 기세가 빠르고 꿋꿋하다)’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경창은 문장에도 뛰어나 이이 · 송익필 등과 함께 8문장으로 일컬어졌으며, 서화(書畫)에도 뛰어났다.
숙종 때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고, 강진(康津) 서봉서원(瑞峯書院)에 봉향(奉享)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