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부여(扶餘). 자는 군수(君受). 호는 만죽(萬竹) 또는 만죽헌(萬竹軒). 아버지는 진사 서진남(徐震男)이며, 어머니는 광주이씨(廣州李氏)로 직제학 이약해(李若海)의 딸이다.
1554년(명종 9) 13세 때 향시(鄕試)에 장원하고, 1564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569년(선조 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병조·이조좌랑, 교리, 사인(舍人)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서천군수·안동부사·의주목사 등을 지냈다. 문장과 도덕, 그리고 기절(氣節)이 뛰어나 이이(李珥)·정철(鄭澈)로부터 지우(志友)로 인정받았다.
의주목사로 있을 때에는 정여립(鄭汝立)으로부터 탄핵을 받은 이이와 정철을 변호하는 소를 올렸다가 파직되기도 하였다. 의주에서는 이이의 영향을 받아 육조방략(六條方略)으로써 북방을 선무(宣撫)하였으며, 돌아와서는 12책(策)을 올리기도 하였다.
충청남도 은진(恩津)의 갈산서원(葛山書院)에 배향되었고, 효암서원을 거쳐 현재 행림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저서로는 『만죽헌집(萬竹軒集)』 1권과 시조 2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