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성산(星山). 일명 대하(大夏). 자는 계도(啓道), 호는 강재(剛齋)·대계(大溪)·한계(韓溪). 이진상(李震相)의 아들이다.
20세 전후부터 평생을 위정척사운동에 앞장서 흥선대원군에게 시국대책문을 올려 당시의 정국을 바로 잡으려고 하였다.
무분별한 개국(開國)에 대해서는 척사소를 올려 성리학적 전통사회의 질서를 옹호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곽종석(郭鍾錫) 등 문인과 함께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각국 공사관에 전달하였다. 그 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을사오적을 참수하고 조약을 파기하라는 상소를 올려 대구감옥소에 투옥되기도 하였다.
1907년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자 일제의 침략을 폭로하는 서한을 보내고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노령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유인석(柳麟錫)·이상설(李相卨)·김학만(金學滿)·장지연(張志淵) 등을 만나 국외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이상설 등과 함께 소만국경에 있는 길림성(吉林省) 봉밀산(蜂密山) 밑 황무지를 사들여 한인(韓人)을 집단 이주시켜 한흥동(韓興洞)을 건설하여, 청소년을 교육하고 민중계도와 독립정신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1914년 요동으로 가서 한인공교회(韓人孔敎會)를 창립하고, 북경 등의 유교성적지(儒敎聖跡地)를 순례하면서 유교의 진흥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한편, 동삼성(東三省)총독 등 중국고관들과 접촉하여 독립운동에 대한 원조를 청하였다.
그리고 위안스카이[袁世凱]와 손문(孫文)에게 서한을 보내어 한중 양국의 친선결속을 호소하였다. 유고로는 『한계유고』가 있다.
1963년 대통령표창이, 1977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