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교 ()

개신교
단체
기독교(개신교)의 한 교파.
이칭
이칭
장로회
단체
설립 시기
1884년(선교사 입국), 1887년(첫 조직교회 설립), 1907년(노회 설립), 1912년(총회 설립)
전신
미북장로교 선교회, 미남장로교 선교회, 호주장로교 선교회, 캐나다장로교 선교회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장로교는 기독교(개신교)의 한 교파이다. 종교 개혁자 칼뱅의 신학과 신앙 고백을 중심으로 발전한 개혁교회의 한 지파로 한국에서 가장 큰 교세를 가진 개신교파이다. 한국에는 1884년 알렌이 첫 정주 선교사로 입국하였고 같은 해 사상륜 등에 의해 황해도 장연 솔내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1887년 새문안교회가 장로교 직제를 갖춘 첫 조직교회로 설립되었다. 1907년 선교회 간의 협력으로 독로회를 조직하였고 1912년에는 총회가 조직되었다. 해방 이후 분열을 거듭하여 2018년 현재 300개가 넘는 장로교 교파가 있다.

정의
기독교(개신교)의 한 교파.
개설

16세기 제네바에서 종교 개혁자 칼뱅(Calvin, 주1의 신학과 신앙 고백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한 개혁 주36의 한 지파이다. 웨스트민스터의회의 『교리문답』과 『신경(信經)』에 신앙의 표준을 두고 있지만, 최고의 표준은 칼뱅 신학의 특징인 하나님의 말씀에 두고 있다. 즉, 성서의 말씀을 교회와 전통의 권위 위에 두고, 성서를 정확하고, 오류가 없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의 교리는 근원적으로 칼뱅주의적이고, 예정론과 신의 영광에 핵심을 두고 있다. 주34 예식은 주2의 임재(臨在)는 영적인 임재이며,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동시에 은혜를 받는 주37으로 생각하여 빈번히 지켜지도록 되어 있고, 설교와 성찬을 교회의 두 기둥으로 삼고 있다.

연원 및 변천

연원

장로교 선교사의 한국인들과의 접촉은 한미 수교 이전에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다. 즉, 1866년(고종 3) 9월에 발생하였던 제너럴셔먼호 사건 때 이 배에 동승한 영국의 런던선교회 소속 장로교 선교사인 토머스(Thomas,R.J.)가 대동강까지 올라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한문으로 된 성서를 나누어 주었다. 그는 그 배의 선원들과 함께 사망하였으나, 그가 전해준 성서가 평양 지방 사람들 사이에서 읽혀지고 있었다는 설이 있다.

또, 만주 동북지방에서 선교하던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선교사 로스(Ross,J.), 목사 매킨타이어(Macintyre,J.)의 전도를 받은 서상륜(徐相崙)과 이응찬(李應贊) 등 여러 명이 로스의 한국어 성서 번역과 출판에 협력하는 동시에 기독교에 입교하고, 1883년에 서상륜은 복음서들을 몰래 국내로 가지고 들어와 그의 고향 황해도 솔내[松川]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배포, 전도하였다. 1884년 11월 그 곳에 우리나라 최초의 주3 교회를 마련하였다.

한편, 1884년 9월 북장로교의 의료 선교사로 파송된 알렌(Allen,H.N.)이 왕실의 신임을 얻어 1885년 4월에 주4을 개원하고, 이와 더불어 같은 시기인 1885년 4월 미국북장로교의 주5주6 부처와 함께 인천에 상륙함으로써 장로교의 한국 선교는 막을 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갑신정변 후의 불안한 정국과 선교 활동의 제한 때문에 1887년 7월 11일에 이르러 비로소 언더우드는 자기 집에서 처음으로 한국인 개종자 1명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는데, 이것이 새문안교회의 출발이 되었다.

그는 또한 빈곤한 아이들을 모아 먹이고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뒤에 연희학교(延禧學校)로 발전해 나갔다. 그 뒤 헤론(Heron, J. W.)을 비롯한 장로교 선교사들이 속속 입국했다.

캐나다장로교 출신 주8이 1888년 겨울 입국하여 미국북장로교선교회에 소속되어 부산 지방을 답사하였고, 목사 주7은 1890년 1월에 입국하여 평양 · 의주 지방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미국북장로교선교회에 이어서 오스트레일리아의 장로교외국선교위원회에서 파견한 데이비스(Davis,J.H.)와 그의 누이동생 메리가 1889년에 입국했으나, 데이비스는 입국한 지 일 년도 지나지 않아 병으로 죽었다.

이에 충격을 받은 그의 모국 교회의 여신도연맹에서는 맥카이(Mackay) 부부와 멘지스(Menzies,B.) · 페리(Perry,J.) · 포셋(Fawcett,M.)을 파송하여 부산 초량에 자리를 잡고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1891년 언더우드가 미국에 일시 귀국하여 한국 선교 상황을 보고하였을 때, 여기에 감명을 받은 사람들이 미국남장로교선교회의 한국 선교를 지원하고 나서, 1892년 2월에 테이트(Tate,L.B.) · 레이놀즈(Reynolds,W.) 등 7명의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들어왔으며, 캐나다 선교사들이 입국한 것은 1898년 9월이었다.

캐나다해안지방노회에서 파송한 선교사는 그리슨(Grieson,R.) 의사 부부와 목사 푸트(Foote,W.R.) · 맥래(McRae,D.) 부부였다. 이들보다 앞서 1893년에 개인적으로 입국하였던 캐나다장로교목사 맥켄지(McKenzie,W.J.)가 황해도 솔내에서 모범적인 선교로 우리 나라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으나, 주35과 고열로 정신 이상을 일으켜 자살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캐나다해안지방노회에서 한국 선교를 서둘러 그들을 파송한 것이었다.

초기 선교정책

4개 장로교선교회는 1893년 1월 28일에 장로교선교회 협의회를 조직하여 한국에서 단일 장로교회를 세울 것을 결정하고, 선교 활동의 모든 문제를 협의하기로 하였다. 4개 선교회가 연합적으로 선교함으로써 인적 · 물적 자원을 절약하고, 불필요한 경쟁을 피하여 효과적인 선교를 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선교 구역을 분담하여, 미국북장로교선교회는 낙동강 이북의 경상남 · 북도와 평안도 · 황해도의 서북 지방을, 오스트레일리아선교회는 경상남도를, 캐나다선교회는 함경도와 만주 동북 지방을 각각 담당하였는데, 이러한 선교 지역 분담은 감리교와도 협의하여 이루어졌다.

이러한 주39예양(禮讓)[^38]의 정신은 장로교가 일찍이 1891년부터 적용하기 시작한 이른바 네비우스 방법이라는 선교 정책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는 중국 주9에서 선교하던 목사 네비우스(Nevius,J.L.)가 그곳에서 실시하던 정책을 말한다.

첫째는 각자 자신이 발견한 생업에 충실하면서 그리스도를 위한 개인적인 일꾼이 되어 이웃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하되, 자기의 생계는 자기의 직업을 통하여 해결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는 주10에 의한 개인 전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자전원칙(自傳原則)이라고 부른다.

둘째는 자치원칙인데, 본토인 교회로 관리하고 운영할 수 있는 범위로만 교회 기구와 방법을 발전시켜야 함을 말하는 것으로, 이 원칙은 본토인 교인의 교회로 육성시키는 방법인 동시에 점진적인 교회 기구의 발전을 뜻하는 것이다.

셋째는 본토인 교회가 인재와 비용을 마련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보다 나은 자질을 가진 사람을 뽑아 기용하는 것인데, 이를 자급원칙이라고 부른다.

넷째는 본토인 교인들이 자신들의 교회 건물을 마련하도록 하며, 그 건물은 본토인의 건축 양식을 따라야 하는데, 주11에 국한된 문제이다. 이 원칙은 자급원칙과도 통하나, 교회 건물은 본토인 건축 양식에 따라야 한다는 점에서 자기표현원칙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러한 자립선교 · 자립정책 · 자립수급의 3원칙에 따라 우리 나라 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의 노력과 재력과 지혜로 세워지고, 유지되고, 발전해 나가는 토착교회 선교 정책에 의해 급속한 성장과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정치제도

장로교의 정치, 즉 체제는 장로제도이다. 개체교회의 운영과 관리는 장로(長老)들과 목사로 구성되는 주12가 장악하는데, 장로나 목사 어느 한 편이 없어도 당회는 구성되지 않거나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이 당회 아래 남녀 집사들로 구성되는 주13가 있어 교회의 여러 가지 일을 돕는다. 집사직의 경력이 10년 이상이 되어 50세가 된 사람은 주14로 피택된다.

집사는 주15이고, 권사는 주16이며, 장로는 정년 때까지 유임된다. 목사도 신급(信級)은 장로이지만, 목사 교육을 이수하고 교회에서 주17을 받으면 주18에서 절차에 따라 주20를 받고 주19 한다.

장로는 개체교회의 세례 교인들로 구성되는 공동 의회에서 투표로써 규정에 따라 선택되어, 노회의 시험을 거쳐 안수를 받아 임직하게 된다.

목사의 청빙은 공동 의회의 결의에 따라 시행되며, 노회는 행정 단위 지역별로 구성되는데, 목사들과 장로들로 조직되어 소속교회들의 목회와 사무를 감독하는 주21기관이다.

노회는 그 교구 안에서 지리적 형편에 따라 몇 개의 시찰회를 조직하여, 시찰회 교구내의 교회들 사이의 목회와 사무의 협력과 감독을 행한다.

독로회와 총회 설립

한국장로교는 1907년에 이르러 비로소 노회 하나를 조직하였는데, 이를 독로회(獨老會)라 불렀다.

한국장로교회가 독로회 형식으로 조직된 것은 평양신학교의 졸업생 7명이 안수를 받은 1907년 9월 17일을 기해서였는데, 이 때 네 장로교 선교부가 한국에서의 단일 장로교회 설립에 합의하여 그 통일을 성취할 수가 있었다. 초대 독로회장에는 모페트가 선출되었다.

독로회 창립 당시의 교세는 선교사 32명, 한국인 목사 7명, 세례 교인 1만 7890명이었고, 교회수는 1,022개소, 각급 학교 402개소에 달하였다. 그 뒤 각 도내에 노회가 계속 조직되어 1912년 9월 1일에는 평양 여자성경학교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소집되어 처음으로 장로교회는 총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이 총회에는 전국 각지에서 선교사, 한국인 목사와 장로 등 모두 221명이 주40로 참석하여 총회장에 언더우드, 회계에 블레어(Blair,W.N.)를 선출하고, 그 밖의 임원에는 한국인 회원이 선출되었다.

총회는 각 노회에서 총대로 주22 목사와 장로로 구성하되, 목사와 장로의 회원수는 동수인데, 총회는 장로교회의 최고 치리 기관으로 매년 소집된다. 이 창립 총회를 기념해 한국장로교회는 중국 산둥성 라이양[萊陽]에 한국인 선교사를 파견함으로써 선교하는 교회로 발돋움하였다.

교육과 의료선교, 민족운동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는 의료 선교와 학교 교육에서도 큰 공헌을 하였다.

1885년에 이미 서울에 고종의 윤허로 광혜원을 설립한 바 있는데, 이것이 뒤에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으로 발전되었고, 그 밖에도 평양에 기홀병원(紀笏病院), 부산 · 대구 · 여수의 주29, 세브란스의 결핵병원 등을 설립하여 병고에 시달리는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과 함께 구제 사업을 펴나갔으며, 교육 사업으로는 경신학교(儆新學校) · 정신학교(貞信學校) · 숭실학교(崇實學校)평양신학교를 설립하여 민족 교육에 정진하였다.

이 결과 1909년 당시 장로교계 학교 수는 이미 600개가 넘어섰고, 학생 수도 1만 5000명에 달하고 있었다. 한국 장로교회는 이와 같은 의료 사업과 교육 사업을 통해 신앙의 보존과 민족 정신의 함양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일제는 기독교회가 그들에게 암적 존재임을 깨닫고 교회에 대한 탄압을 가중시켜 이른바 105인 사건을 날조했는데, 105인의 실형자 가운데 97명이 장로교인이었다. 이는 장로교회의 민족주의적 배경을 보여준다.

이러한 배경은 3·1운동으로 이어져, 수많은 교회 지도자와 교인들이 참가하여 일제 통치에 항거함으로써 교회의 전통과 민족 정신을 세계 만방에 과시하였다.

그 뒤 교회 성장과 함께 점차 토착적 민족교회 지향의 종파 운동이 싹트기 시작하여, 대구에서 이만집(李萬集)조선기독교회, 봉산(鳳山)에서 김장호(金庄鎬)의 기독교회, 차학연(車學淵)의 자유교회, 함태영(咸台永) · 전필순(全弼淳)적극신앙단(積極信仰團) 등 종파 운동도 일어났다.

1920년대부터 사회 풍조의 변천과 농촌의 피폐라는 현실에 직면한 교회는 사회 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일제의 민족 정신 말살 정책에 대항하였다.

즉, 전국적인 규모의 농촌 강습소를 통하여 농민들의 경각심을 일으켜 농촌 부흥을 도모하였고, 협동조합 운동으로 소작인의 권익 옹호에 앞장섰으며, 유곽 폐지와 단연금주운동(斷煙禁酒運動)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말에 이르러 일제의 탄압은 더욱 극심해져, 이러한 사회운동마저 마비되고, 만주로의 강제 이민으로 인한 농민의 격감은 점차 교회의 누출 현상을 가져와 문을 닫는 교회가 속출하였다.

그러다가 신사참배를 강요당해 교회의 신성은 더럽혀지고, 교회당은 가마니 공장으로 사용되고, 헌병대로 징발되었으며, 선교사들은 국외로 추방되었고, 주기철(朱基徹)을 비롯한 수많은 교인들이 순교 또는 투옥당하는 박해를 겪었다.

교회 재건과 분열

8·15광복이 되자 교회는 재건과 부흥에 힘썼다. 그러나 곧 장로교회 안에서는 내분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분열이 생겼다. 원인은 복합적인 것이기는 하나 대체로 신학적인 면과 정치적인 면으로 집약된다.

신학적인 원인은 광복 이전의 보수 단일 신학(保守單一神學)과 거기에 수반된 보수적 교권이 광복 후에 진보적인 새 신학 사상과 충돌한 데 있었으며, 정치면에서는 표면상으로는 신학 사상을 앞세웠지만 실제는 교권 장악을 위한 분쟁에 있었다.

이러한 분열은 특히 보수파 장로교회 안에서 주로 생겨났다. 그 첫 번째로 나타난 분파가 고신파(高神派)의 분립인데, 일제 말기에 신사참배에 항거한 장로교인들 가운데 투옥되었다가 석방된 목사 · 장로 · 전도사들이 경상남도에서 목사 한상동(韓尙東)을 중심으로 교회 재건을 위하여 고려신학교(高麗神學校)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일제 치하 때의 주31 문제, 신앙 보수의 문제들이 엇갈려 경남노회 내에서 분쟁이 일어났고, 이것이 총회로 주24 1952년 총회에서 고려신학교 중심의 교회들이 이탈, 독립적으로 노회와 총회를 조직함으로써 완전 분립되었다. 고신파 교회의 신학은 주41 신학 중에서 전통주의 신학을 표방하고, 네덜란드의 개혁 주42와 선교적 유대를 가지고 있다.

두 번째가 기독교장로회의 분립이다. 이는 1947년 봄에 서울역 앞 동자동에 있던 장로교의 조선신학교에서 일부 학생들이 목사 김재준(金在俊)의 성서관(聖書觀)을 반대하여 일으킨 신학적 문제가 발단이 되어서 생긴 분립이다.

1935년에 평양 장로회신학교가 신사참배 사건으로 폐교당한 뒤 우리나라의 목회자 양성을 위해 교회 지도자들이 한국교회 자력으로 1940년 4월 서울에 세운 신학교가 조선신학교였다. 그러므로 광복 직후 남한에서는 장로교의 유일한 총회 직영 신학교였는데, 김재준의 성서관을 반대하고 나선 학생들이 총회와 주25에 성명서를 발송함으로써 신학 논쟁이 벌어졌다.

이것은 결국 보수주의 신학자 박형룡(朴亨龍)과 신 신학자 김재준 사이의 신학 논쟁으로 확대되고, 이어 장로교 총회가 김재준의 신학, 특히 성서관을 조사하게 되었으나, 총회는 그를 이단으로 단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선신학교와 박형룡의 남산신학교와의 합동은 실현되지 못하였고, 김재준을 제명하려는 보수 세력은 1·4후퇴 후 월남한 서북지방의 목사들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으므로, 1952년 봄에 열린 장로회 총회에서 조선신학교의 총회 직영이 취소되었다.

한편, 김재준의 파직을 그가 속하여 있던 경기노회에 지시하였고, 또한 이 신학교 졸업생에게는 목사 후보 자격을 부여하지 않기로 결의하였다.

이러한 결의가 장로교 헌법에 위배됨을 지적하고, 이의 시정을 호소한 주30운동이 일어났으나 총회는 호헌운동을 묵살하였으므로, 결국 조선신학교측과 호헌파가 합류되어 1953년 6월에 분립 총회를 열고 새 교단의 발족시켰다.

이렇게 하여 생긴 한국기독교장로회는 복음과 학문과 양심의 자유, 노예적 의존 사상의 배격, 세계 교회운동인 에큐메니컬 정신의 주26 및 그리스도의 전적인 복음을 인간 생활 전면에서 살리는 사회적 관심을 표명하였다.

고신파 장로교는 교회의 재건을 부르짖고 기성교회를 단죄하면서 도전하다가 총회로부터 배격을 받아 분립되었으며, 조선신학교측, 즉 기독교장로회는 신신학 또는 이단으로 몰려 총회로부터 분립되어 나왔다.

그리고 남아 있던 장로교회는 박형룡을 중심으로 총회신학교를 세워 옛날 평양신학교의 재건을 실현하였으나, 신학교기지 매입 문제를 둘러싼 사건과 세계기독교협의회(WCC) 탈퇴문제 등이 얽혀 다시금 분열을 일으키게 되었다.

즉, 교회 주32 매입을 위해 선교부로부터 받은 3,000만 이 대지 구입도 하지 못한 채 흐지부지 없어진 데 대해 끝내는 박형룡이 책임을 지고 신학교에서 사임을 하게 되자, 박형룡의 옹호파와 반대파 사이에 갈등이 더욱 깊어졌다.

이 무렵 미국에서 조직된 NAE(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sm)라는 보수적 복음주의운동이 세계교회협의회의 에큐메니컬 운동을 반대하고 있었는데, 박형룡 옹호파는 현재의 WCC가 자유주의 신학과 주27주28 있다고 공격하면서, 교단이 WCC로부터 탈퇴할 것을 강요하고 나왔다.

그들이 국내에서 1952년에 NAE를 조직하여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키우자, 마침내 1960년에 교단은 둘로 분열되어 박형룡측은 NAE파라고 불리고, 그 반대파는 에큐메니컬파라고 불렸는데, 이러한 명칭이 후에 합동파와 통합파라는 말로 바뀌었다.

이렇게 하여 합동파는 박형룡을 교장으로 하여 총회신학교를 세웠고, 통합파는 장로회신학교를 세웠다. 그런데 보수주의를 표방한 합동파에서는 계속 자체 내에서 신학적 분쟁이 생겼고, 그 분쟁은 으레 교권주의자들의 이용물이 되어 신학 논쟁이 교회 분열을 유발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분열의 확산과 연합기구 설립

총회신학교의 주33 교수들의 신학은 반드시 박형룡의 신학 사상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고, 이러한 견해 차이는 박형룡의 사망 후 더욱 심화되어 신학 논쟁을 불러 일으켰는데, 이 논쟁의 새로운 술어는 이제까지의 전통주의라는 말을 대신하여 ‘복음주의’와 ‘신복음주의’라는 말로 논쟁을 일삼았다. 그리하여 박형룡과 같은 정통주의자로서 그의 동역자였던 박윤선(朴允善)도 종국에는 총회신학교를 빠져나와 다른 신학교를 세웠다.

그 뒤에도 합동측 장로교 내부의 분열은 가속화되어 1980년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아래에 주류측 총회와 교단, 중립노회측 · 비주류측이 있고, 비주류측 아래에는 통암동측 총회와 교단, 방배동측 총회와 교단, 그리고 합동진리측이 있었으며, 방배동측 아래에는 다시 합동계승측 총회와 교단, 연합노회 총회와 교단이 있었고, 그 뒤에도 분열 작용은 계속되었는데, 이러한 혼란 속에서 신학교는 난립되어 당국의 설립인가 없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은 다른 교파들의 분열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하고도 계속적인 것이었다. 한국기독교장로회를 제외하고는 모든 장로교 교단들이 한결같이 교단 명칭을 대한예수교장로회라 표기하고, 그 총회 횟수도 같아 일반 신도에게 주는 혼란은 극심하였다. 2018년을 기준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를 명칭으로 사용하는 교단이 337개에 이를 정도로 혼란은 극심한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1978년부터 분열된 장로교의 재일치를 모색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어 협의회 내지는 연맹 형식의 접근이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81년 2월에 기독교 장로회 · 통합측 장로회 · 합동측 장로교, 고신측 및 대신측 장로교회들이 한국장로교협의회 창립총회를 새문안교회에서 개최하고 협의회 규약을 통과시켜, 그 해 9월에 소집된 5개 교단의 총회에서 채택됨으로써 그 뒤 5개 교단들 사이의 친교와 협력이 가속화되었다.

이 협의회의 목적은 지난 날의 쓰라린 분열의 상처를 치유하고 앞으로는 협력과 협동 단계로 들어가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운은 1983년 미국의 연합장로교와 남장로교와의 일치에 자극을 받아 더욱 진지하게 추진되었다. 1997년에는 한국장로교협의회와 대한예수교장로회협의회가 합동 총회를 개최하여 한국장로교총연합회로 재출범하였다. 2022년 현재 26개의 장로교단이 가입되어 있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큰 교세를 가진 개신교 교파이다.

참고문헌

단행본

민경배, 『한국기독교사』 (대한예수교서회, 1982)
백낙준, 『한국개신교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3)
이영헌, 『한국기독교사』 (컨콜디아사, 1978)
이호운, 『한국교회초기사』 (대한예수교서회, 1970)
임희국, 『기다림과 서두름의 역사, 한국 장로교회 130년』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13)
총회100년사발간위원회 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통합) 100년사: 미래로 열린 100년의 기억』 (한국장로교출판사, 2015)

인터넷 자료

한국장로교총연합회(http://www.cpck.kr/index.html)

기타 자료

'예장 교단 300개 넘어… “분열은 정당화 될 수 없다”', 『아이굿뉴스』 (2020. 6. 11)
주석
주1

장 칼뱅, 프랑스의 종교 개혁자(1509~1564). 칼뱅파의 교조로, 제네바에서 종교 개혁을 단행하여 일종의 신권 정치를 하였다. 프로테스탄트의 교설(敎說)을 체계화하고, 예정설에 따른 금욕의 윤리와 같은 엄한 규율을 만들었다. 저서에 ≪기독교 강요(綱要)≫가 있다. 우리말샘

주2

예수에 대한 칭호. 머리에 성유(聖油)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나 구세주라는 뜻이다. 우리말샘

주3

16세기 종교 개혁의 결과로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떨어져 나와 성립된 종교 단체 또는 그 분파를 통틀어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4

조선 고종 22년(1885)에 일반 백성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아래에 두었던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 지금의 서울 재동에 미국인 선교사 알렌(Allen, H. N.)의 주관 아래 세웠으며, 같은 해에 제중원으로 이름을 고쳤다. 우리말샘

주5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미국의 의학자ㆍ선교사(1859~1916). 우리나라 이름은 원두우(元杜尤). 1884년에 초대 주한(駐韓) 선교사로서 경신 학교를 설립하고, 1915년에는 연희 전문학교의 교장이 되어 교육 사업에 헌신하였다. 저서에 ≪영한사전≫, ≪한영사전≫ 따위가 있다. 우리말샘

주6

앨리스 아펜젤러, 미국의 선교사ㆍ교육가(1885~1950). 이화 학당의 전문부(專門部)를 신촌에 이전하여 새 교사를 짓고 제6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광복 후에는 이화 여자 대학교 명예 총장을 지냈다. 우리말샘

주7

새뮤얼 오스틴 모펫, 미국의 장로교 선교사(1864~1939). 1890년 조선에 건너와 3년 동안 서울에서 전도한 뒤, 평양으로 옮겨 성경을 가르쳤다. 1907년 장로교 신학교 교장, 1918년 숭실 전문학교 교장이 되어 포교와 교육에 전념하다가 1936년 일제의 암살 위협에 다시 돌아올 것을 기약하고 일단 귀국하였으나 1939년 본국에서 사망하였다. 우리말샘

주8

제임스 스카스 게일, 캐나다의 선교사(1863~1937). 1888년 내한하여 선교 활동을 하였고 아펜젤러, 언더우드 등과 성경을 한역(韓譯)하였다. 1898년 최초의 한영(韓英) 사전을 편찬ㆍ출판하였으며, <구운몽>ㆍ<춘향전#GT#따위의 한국 고전을 영역(英譯)하였다. 우리말샘

주9

중국에 있는 성 가운데 하나. 황허강(黃河江) 하류 유역과 산둥반도로 이루어져 있다. 농산물ㆍ수산물ㆍ광산물이 많이 나며, 기계ㆍ화학ㆍ조선 따위의 공업이 발달하였다. 수공업으로 직포, 도자기, 기와 따위가 생산된다. 성도(省都)는 지난(濟南), 면적은 15만 3600㎢. 우리말샘

주10

필요한 비용을 자기가 부담하는 것. 또는 그 비용. 우리말샘

주11

기독교에서, 공동체가 되는 교파에 속하여 있는 개별적 교회당을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12

장로교, 성결교 등에서, 교회 안의 목사와 장로가 모이는 회합. 모든 교인의 신앙 행위를 관찰하고 학습ㆍ입교ㆍ세례 따위의 사무를 처리하며, 장로와 집사의 선출ㆍ출교(黜敎)ㆍ해벌(解罰) 따위를 감독한다. 우리말샘

주13

장로교에서, 교회의 직책을 맡은 사람들이 교회 업무를 결정ㆍ수행하기 위하여 여는 모임. 우리말샘

주14

교역자를 도와 교우를 권면하고 돌보며 위로하는 교직(敎職). 또는 그런 사람. 장로교에서는 여성 교인을 안수하지 않고 임직하며, 성결교와 감리교에서는 남녀 교인 모두를 임직한다. 다만 성결교에서는 안수 후에 임직하고, 감리교에서는 안수하지 않고 임직한다. 우리말샘

주15

기관이나 단체에서 어떤 직책에 있게 됨으로써 마땅히 맡게 되는 직책이나 직무. 우리말샘

주16

평생 동안 일할 수 있는 직위. 유죄 선고 또는 징계 처분에 의하거나 스스로 그만두지 않는 한 면직되지 않고 계속한다. 우리말샘

주17

부탁하여 부름. 우리말샘

주18

장로교에서, 각 교구의 목사와 장로 대표들이 모이는 모임. 우리말샘

주19

직무를 맡기다. 우리말샘

주20

기도를 할 때 또는 성직 수여식이나 기타 교회의 예식에서, 주례자가 신자의 머리 위에 손을 얹는 일. 우리말샘

주21

장로교에서, 교인으로서 교리에 불복하거나 불법한 자에 대하여 당회에서 증거를 수합ㆍ심사하여 책벌하는 일. 우리말샘

주22

선거에 뽑히다. 우리말샘

주23

전체를 대표하는 사람. 우리말샘

주24

어떠한 일의 영향이 직접 관계가 없는 다른 데에까지 번지게 되다. 우리말샘

주25

영향력이 있는 중요한 자리나 지위. 또는 그 자리나 지위에 있는 사람. 우리말샘

주26

명성이나 권위 따위를 널리 떨치게 함. 우리말샘

주27

공산주의의 주장을 받아들이거나 그 정책에 동조하는 일. 우리말샘

주28

어떤 견해나 입장 따위를 굳게 지니거나 지키다. 우리말샘

주29

나병 환자를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의료 시설. 우리말샘

주30

헌법을 보호하여 지킴. 우리말샘

주31

방향을 바꿈. 우리말샘

주32

건축물의 기초. 우리말샘

주33

젊고 기운찬 기개를 지닌 사람들로 이루어진 파. 우리말샘

주34

성찬식 때 쓰는 음식. 예수의 살을 상징하는 빵과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이른다. 우리말샘

주35

강한 태양의 직사광선을 오래 받아 일어나는 병. 한여름에 뙤약볕에 오래 서 있거나 행진, 노동을 하는 경우에 생긴다. 심한 두통, 현기증이 나고 숨이 가쁘며 인사불성이 되어 졸도한다. 우리말샘

주36

16세기 중세 유럽에서 종교 개혁 때 생긴 여러 교파의 교회를 통틀어 이르는 말. 종교 개혁기 이전부터 가톨릭 교회의 부패와 타락에 맞서 개혁 운동을 벌인 교파들이 이 이름을 사용하였다. 종교 개혁 이후에는 개신교 교회를 통틀어 이르거나 칼뱅주의 교회만을 따로 구분하여 부르기도 한다. 우리말샘

주37

예의에 관한 법칙. 우리말샘

주38

예의를 지켜 공손한 태도로 사양함. 우리말샘

주39

종교에 관련된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활동 분야. 우리말샘

주40

전체를 대표하는 사람. 우리말샘

주41

16세기 프랑스의 종교 개혁자 칼뱅에게서 발단한 기독교 사상. 신의 절대적 권위를 강조하고 예정설을 주장하였으며, 신앙생활에서는 자기를 신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보는 활동주의적 경향을 지녔다. 우리말샘

주42

16세기 중세 유럽에서 종교 개혁 때 생긴 여러 교파의 교회를 통틀어 이르는 말. 종교 개혁기 이전부터 가톨릭 교회의 부패와 타락에 맞서 개혁 운동을 벌인 교파들이 이 이름을 사용하였다. 종교 개혁 이후에는 개신교 교회를 통틀어 이르거나 칼뱅주의 교회만을 따로 구분하여 부르기도 한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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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승호(한국기독교역사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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