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숭배는 죽은 조상의 영혼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여 숭배하는 신앙행위이다. 한국 고대에는 내세가 현세와 단절되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는 계세사상을 토대로 조상숭배가 이루어졌다. 시체 훼손 방지·순장·명당·사자에 대한 제사 등의 기록은 그러한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현대적인 우리의 조상숭배는 조선 시대에 와서 유교적 질서에 바탕을 둔 가족 제도가 확립되면서 제도적·정신적으로 크게 정비된 것이다. 여기에는 고려말 수입된 주자의 『가례』가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이를 토대로 조상숭배에 관한 이념적 토대와 실천적 형식이 정착되어 지금에 이른다.
조상 숭배의 의미를 탐구하려는 연구는 여러 각도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먼저 지금까지 연구되어 온 학설들을 간단히 간추려 볼 필요가 있다.
첫째로, 조상 숭배의 기원과 본질을 중심으로 한 연구의 경향이다. 이 영역에 들어가는 종교인류학자로는 타일러(Tylor, E. B. )와 스펜서(Spencer, H. )를 들 수 있다. 이들은 당대에 유행하던 진화론의 영향을 받아 종교 기원을 조상 숭배에서 찾았다.
특히, 스펜서는 조상 숭배 현상과 다른 종교 현상 사이의 차이를 구별하지 않고, 종교는 근본적으로 조상 숭배에서 진화, 발전한 것이라고 하였다.
타일러는 동식물에서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만물은 모두 인간과 똑같이 살아 움직인다는 관점에서 출발하였다. 만물이 살아 있다는 관념은 그것들도 인간과 똑같이 영혼을 갖고 있다는 관념으로 이어진다.
또, 만물 각각의 영혼은 인간의 그것과 같이 일시적 혹은 영구적으로 그 물 자체를 떠나서 독립해 존재할 수 있다는 관념에서 인간의 사령(死靈) 등과 같이 독립해 있는 정령이 존재한다는 신념을 낳고, 이로부터 마침내 신들의 관념이 발전한다고 하였다. 그는 육체로부터 분리, 독립된 존재로 있는 영혼 혹은 사령을 애니미즘(animism) 발생의 핵심으로 삼았다.
둘째로, 사자(死者)에 대한 숭배자의 태도에 주안점을 두고 연구한 경향을 들 수 있다. 즉, 사자에 대해서 적극적이고 친밀한 감정을 갖느냐 혹은 적대감을 갖느냐에 따라 구분하는 것이다.
제본스(Jevons, F. B.)는 선조와 자손은 적극적이고 친밀한 관계에 있다고 보고 있다. 이에 반해, 프레이저(Frazer, E. B.)는 선조는 인간에게 근본적으로 적대적이므로 선조에 대한 공포는 사체(死體)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의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특히, 사자가 예기하지 않은 불의의 사고로 죽었을 때, 사령에 대한 두려움은 더욱 커진다고 한다.
한편, 양쪽 학설을 절충, 종합하는 설도 있는데, 말리노브스키(Malinowski)나 프로이트(Freud, S.)가 여기에 속한다. 말리노브스키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사체에 대한 공포(fear)도 있고 애정(affection)도 있어 죽음에 대해서는 양극 감정(ambivalence)이 지배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견해는 프로이트에게서 더욱 두드러져, 그는 양극 감정은 비단 사자에게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고 생자(生者)에게도 해당된다고 하였다.
셋째로, 조상 숭배와 사회 구조의 상호 관계를 연구하는 입장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고대 로마 사회를 사료로 조상 숭배와 혈연 집단 구조의 관계에 대해 연구한 쿨랑쥬(Coulanges, F.)를 들 수 있다. 그 뒤 쿨랑쥬의 영향을 받은 많은 학자들은 다양한 입장에서 조상 숭배를 연구하였다.
특히, 뒤르캥학파는 쿨랑쥬의 영향을 받고 장례(葬禮)의 연구에 집중하였다. 그리고 헤르츠(Hertz, R.)는 보르네오의 다야크족(族)을 연구하고, 죽음은 근본적으로 사회 현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죽음에 의해 사회 제도의 존속이 위태롭게 되기 때문에 그 위기에 대해 사회가 자기 방어책으로 사후의 신앙을 만들어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사령의 위치를 높이는 의례는 최소한 잠재적으로는 사회 제도의 영속성과 사회 구성원의 일시성 사이의 모순과 근본적인 관련이 있다고 한다. 이 학설을 지지한 학자들은 종교의 기능은 사회의 존속을 유지시켜 주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조상 숭배라고 하였다.
이상의 세 가지 연구 동향만으로는 조상 숭배의 기원에 대한 설득력 있는 해답을 이끌어내기 어렵고, 다만 사회학파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조상숭배의 의미를 해명하는 데 약간의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먼저, 가장 오래된 종교적 풍습 가운데 순장(殉葬)과 시체를 매우 중요시하는 종교 현상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순장은 이미 밝혀진 바와 같이 특히 현실에서 권력과 부(富)를 갖고 있던 사람이 사후에도 생전과 같은 안락한 생활을 누리기 위해 많은 부장품(副葬品)과 함께 시종자(侍從者)들을 함께 무덤에 묻은 것을 말한다.
『위지 魏志』 부여전(夫餘傳)에 의하면 살인 순장한 사람이 많으면 백수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 풍습은 부여뿐만 아니라 한민족의 보편적인 현상이어서 후대에도 지속되었다. 고구려나 백제에서는 이미 국법으로 순장을 금하고 있었지만, 가장 후진 사회였던 신라는 지증왕 3년(502)에 이르러서야 순장을 금할 정도로 순장이 의외로 후대까지 전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고대에는 죽은 시체를 귀중히 여기는 풍습도 보편적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훼손된 시체에는 영혼이 되돌아갈 수 없다는 샤머니즘적 관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죽은 자가 산 자와 이별하는 종교 의식인 장례 의식도 대단히 성대하게 치러졌던 것 같다.
『위지』 부여전에는 여름에는 시체가 부패하지 않도록 얼음을 사용한 기록을 남기고 있으며, 상(喪)을 당해 남녀가 모두 흰 옷을 입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 장례에는 유력한 자의 죽음일 경우 순장의 풍습도 뒤따랐다고 보기 때문에, 그 의례에 참여하는 공동체의 집단 정서는 매우 강하거나 흥분 상태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시체를 상하지 않게 하고 중히 여기며 순장을 하였던 배경은 사후에도 현실의 생활과 똑같은 생을 누릴 것이라는 사상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에는 고대부터 일종의 한국적 계세 사상(繼世思想)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지배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대에는 시체를 훼손시키는 것이 큰 형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보면 마한의 구장(舊將)이었던 주륵(周勒)이라는 사람이 우곡성(牛谷城)에서 쿠데타를 하려다가 발각되어 자살하였는데, 온조왕은 그의 시체를 몇 조각으로 자르는 형벌을 가하였다. 이와 같은 사례는 고구려에도 있었는데,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연나라와의 전투에서 패해 숨어버리자 연왕(燕王)은 고국원왕의 항복을 확실히 받아내기 위해 그의 아버지인 미천왕릉을 발굴해 시체와 부장품을 갖고 갔다. 고국원왕은 할 수 없이 연에 칭신(稱臣), 입조(入朝)하고 부모의 시체를 찾아왔다고 한다.
명계(冥界)에서의 삶이 현세에서의 삶과 다를 것이 없다는 관념은 죽은 자가 거처하는 지역이 명당(明堂)이 아니면 안 된다는 관념도 낳았다. 죽은 자가 묻히는 곳은 바로 그의 주거지가 되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민중왕은 사냥을 하다가 한 석굴(石窟)이 있음을 발견하고 자기가 죽거든 이곳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였다. 명당의 주거지에서 현세와 흡사한 삶을 사는 사자에 대한 제사가 매우 중요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미 『위지』에는 한인들이 조상의 제사를 끊이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고, 그것은 신라에도 이어져서 탈해왕의 시체를 소천구(疏川丘)에서 파내어 소상(塑像)을 만들고 토함산(吐含山)에 봉안하고 나라에서 끊이지 않고 제사하였다고 한다.
이상과 같이, 한국 고대의 조상 숭배가 현세와 내세의 단절이 아니라 연속에서 이루어지는 사고 방식에서, 시체의 훼손을 방지하고 존중하거나 순장을 하거나 시체의 주거지인 명당에 대한 관념이 생긴 것은 유교나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은 왜 죽은 자에 대해서 이와 같이 극진한 대우를 하였겠는가? 이에 대한 해답으로 타일러의 애니미즘설이나 제본스의 시체에 대한 애증설, 프레이저의 공포설만으로는 설득력 있는 답을 얻기는 어렵다. 사회학파에서 말하는 대로 산 자와 죽은 자가 하나의 가족 공동체를 이루어 죽은 자의 안녕과 행복이 산 자에게도 영향을 미쳐서 가변적인 현세 상황에 불변적인 연속성을 부여하려는 것이라는 설명 방식이 설득력을 준다.
조상과 자손은 명계와 현세를 초월해 하나의 가족 공동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조상의 잘못이나 화(禍)는 그 자손에게 미치고, 반대로 조상의 공훈은 자손에게 수 대에 걸쳐 은덕을 미친다고 생각되었다. 이러한 사고에서 조상은 항상 자손들을 보호한다는 관념이 배태되었다.
뿐만 아니라, 가족 공동체의 순수한 혈통을 중시해 제사 상속 및 장자 상속을 하였고, 그것이 여의치 않았을 때는 첩을 두기도 하였다. 우리 나라 고대에는 가족 혈통의 정결을 보장하기 위해 여인의 간음에 대해 지나치게 엄격하였던 흔적도 보인다. 부여에서는 부인으로서 간음하는 자가 있으면 모두 죽였고, 그 죽인 시체도 부패할 때까지 산 위에 두었다.
이미 강력한 부권제에 의해 제사 상속이 이루어졌던 것을 알 수 있고, 이것은 삼국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져서 남자의 간음은 비교적 관대하였던 데 비해 여인의 간음은 용서하지 않고 극형에 처하였다. 순수한 혈통에 의해 가족 공동체를 초시간적으로 유지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제사를 상속할 자식이 없다는 것은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산천에 자식 얻기를 비는 행위도 고대부터 있었던 일임을 보게 된다.
이처럼 한국의 조상 숭배를 현세와 명계를 잇는 계세 사상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라면 공동체의 유지가 가장 중요한 것이었고, 그 공동체의 유지 기능에서 정점을 이루었던 것은 시조 신앙(始祖信仰)에까지 연결되는 것이었다.
조상 숭배가 철학적 · 윤리적인 체계를 갖추고 인식된 것은 유교의 정착을 통해서이다. 유교에서 천신(天神) · 지기(地祇)와 함께 인귀(人鬼)를 제사하는 것을 길례(吉禮)로 삼은 것은 이미 『주례(周禮)』 이래의 정설처럼 되었다.
여기에서 인귀는 죽은 조상을 말하는데, 『예기』 분상편(奔喪篇)에 보면 장례를 치른 뒤 곧바로 할아버지의 묘(廟)에 같이 모시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3년 후 대상(大祥)을 지낸 다음에는 점차적으로 독자적인 묘에서 제사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이제부터 정식으로 종묘(宗廟)의 제사가 행해진다.
이 때 종래의 고조묘(高祖廟)를 옮겨 놓고 증조묘(曾祖廟) · 조묘(祖廟)를 한 단계씩 높이고, 신망자(新亡者)의 묘를 새롭게 추가해 종묘의 전 체제가 갱신된다. 그리고 새로운 가장(家長)에 의해 유족들의 생활이 통솔되어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종묘의 제사는 새로운 가족의 체제에 입각해 복상(福祥)을 기원하게 되지만, 이와 함께 천신 · 지기에 대한 제사도 공식으로 하게 된다. 이처럼 종묘의 조신(祖神)이 수호신으로서 천신 · 지기와 똑같이 복상 기원의 대상이 된다. 조상을 제사하는 것이 길례가 되는 것은 그 복상을 기원하는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조상의 정령이 자손의 제사를 받지 못하면 굶주린 영, 즉 아귀(餓鬼)가 된다. 이 때는 그 영이 선조의 자격을 잃고 조상신으로서의 대접을 받지 못한다. 이런 면에서 보면 조상신은 분명히 천신 · 지기와 차원이 다르지만, 조상신이 같은 반열에 있을 수 있는 것은 다만 복상의 기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죽은 자와 산 자가 한 공동체를 이루어 먼 조상에까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조상 숭배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생물학적 견지에서만 보면 자신의 생명의 근원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똑같고, 거슬러 올라가면 부모의 양친인 조부모도 똑같은 자격을 갖고 있다. 이 4명의 조상뿐만 아니라 그 전 대의 8명, 또 그 전 대의 16명, 이렇게 한없이 거슬러 올라가 선조는 무한히 연결된다.
그러나 부권적 가족 제도를 취하는 사회에서는 선조의 계통을 아버지 쪽으로 연결해 단지 한 쪽만의 계통을 유지한다. 무수한 선조 가운데 특수한 한 계열만에 한정, 생명의 흐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을 혈통 · 혈맥이라 하며 선조라 부르는 것이다. 이처럼 선조는 원래 생명의 원리이며, 죽음과는 아무런 관계를 갖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선조에 대한 제사는 이 생명의 원리에 대한 회고이며, 그 원리의 강화라 할 수 있다. 조상 숭배가 길제(吉祭)이고, 복상이 기원되는 것은 실상 가족적 사회의 생명의 강화가 기원되는 것과 같다. 조상 숭배는 이처럼 가족 제도와 표리의 관계에 서게 된다. 가족 제도는 근대적인 생물학적 생명관과는 대조적으로 생명의 흐름을 단지 하나의 계열에 한하고 한 쪽만을 존중하는 것이므로 그 계열의 가장 꼭대기에 시조가 있어서 생명의 본원이 된다.
가족의 시조를 중심으로 하면서 한 쪽 계열에 제사하는 것에서 조상 숭배의 특성을 볼 수 있지만 이것을 제도적으로 구체화한 것이 종묘의 제도이다. 종묘의 일반적 정형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예기』 왕제편(王制篇)인데, 여기에서 천자는 7묘, 제후는 5묘, 대부(大夫)는 3묘, 사(士)는 1묘를 제사할 수 있고, 서인(庶人)은 묘가 없고 단지 침(寢)에서 제사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천자 7묘로부터 사 1묘를 규정하는 종묘의 제도는 봉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각 계급에 따른 제도를 규정한 일종의 관제(官制)라고 할 수 있다. 각 계급의 특권의 한계를 규정한 것은 선조를 제사하는 것보다 사회 계급의 상하의 구별을 명확히 해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데 주안점을 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묘수(廟數)에 따라 제사 방법은 다르지만 제사의 대상인 신의 성격에는 차이가 없다. 천자나 사나 조상신은 시조로부터 근친의 직계의 조신에 이르기까지 모두 제사의 대상으로 받들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제사 방법이 천자에게는 완비된 것을 하지만 지위가 낮아짐에 따라 점차로 제사 형식이 간소화될 뿐이다. 특히, 4친묘(親廟)를 받드는 데 있어서는 천자와 서민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조상 숭배의 종교적 성격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 천자가 받드는 7묘의 제도이다. 그런데, 그 7묘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조상 숭배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위에서 인용한 『예기』 왕제편에서 “天子七廟, 三昭三穆, 與大祖之廟而七(천자칠묘삼소삼목여대조지묘이칠)”이라 한 구절을 생각해 보면, 7묘는 우선 대조묘(大祖廟), 즉 시조묘(始祖廟)와 다른 6묘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가계의 원천으로 시조를 특별히 세우고 다른 역대의 선조들과 구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종묘의 제도에서 역대의 조상은 예외 없이 반드시 소목(昭穆 : 사당에 신주를 모시는 차례, 왼편을 昭, 오른편을 穆이라 하며, 天子 1세를 가운데 모시고 2 · 4 · 6세를 소에, 3 · 5 · 7세를 목에 모심) 어딘가에 속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데 반해, 시조만은 소목의 밖에 두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서 시조는 원역사(Urgeschichte)로서 역사(Geschichte) 가운데 있는 조상들을 초월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역사의 시원에 서서 역사의 근원, 역사의 범형을 이루고 역사 전체를 대표하며 동시에 역사를 초월하고 있는 시조가 역대의 선조와 구별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7묘를 태조와 삼소삼목의 두 개의 단락으로 구분할 때에 삼소삼목은 시조 이외의 역대의 선조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가계를 더듬어 일대(一代)에 위치하는 것을 모두 똑같은 유(類)에 속하는 것으로 일군(一群)으로 삼고 그것을 소(昭)라 하며, 다른 일군을 목(穆)이라 부른다. 아버지가 소에 속하면 그 아들은 목이고 손자는 또 소로서 조부와 똑같은 유에 속한다. 선조들도 소에 속하든가 목에 속하든가, 전체로서 소와 목 두 군(群)으로 나뉜다.
이러한 소목의 구별은 가족 제도에서 중요한 특질을 이루어 결코 그 서열을 흐트러뜨리지 않는다. 즉, 가계의 서열을 흐트러뜨리지 않게 해 역사를 올바로 잡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삼소삼목을 모두 합하면 6개인데, 4친묘와 다른 두 개로 이루어져 있다.
『예기』 왕제편에 대한 정주(鄭注)를 보면 태조와 문왕, 무왕, 그리고 4친묘로 되어 있다. 즉, 시조묘, 문무의 2묘, 4친묘 등 합해 7묘가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로는 천자 5묘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이 때는 문무 2묘가 빠지고 시조와 함께 4친묘를 들고 있는 것이다. 제후 5묘라 할 때에는 물론 시조묘와 4친묘를 말한다. 그러므로 천자 7묘 가운데서 중간의 2묘는 생략할 수도 있을 정도로 가장 가벼운 것이고, 중요한 것은 시조묘와 4친묘이다.
전체적인 선조 가운데서 시(始)가 되는 시조와 종(終)이 되는 4친묘[특히, 4친묘는 아직 친연(親緣)의 정이 다하지 않은 고조 이하의 근조(近祖)이다]만을 중요시하는 것이다. 친연의 정이 다하지 않았다는 것은 생존자의 기억에 남아 있는 조상의 면영(面影)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묘라는 말 자체가 조상의 형보를 뜻한다고 정현(鄭玄)은 『예기』 제법(祭法)편에서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조상은 추억 속에 남아 있고 식별할 수 있는 인간적 존재이다. 그러나 만약 기억에 남아 있지 못하는 원조(遠祖)들이 있다면 그들은 인간적 존재에서 조령(祖靈)과 같은 영적 존재로 변하게 된다. 이것이 시조와 4친묘 사이에 있는 2묘이다.
다만, 시조만은 다시 인간적 존재로 변형되어 묘에 모셔지게 되는데, 그렇다고 시조는 친연의 계열을 거슬러 올라가 제1대의 선조라고 하는 혈연적 존재로서 인간적 형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고 있는 존재로서 숭배되므로 단순한 원조와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시조는 소와 목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오히려 그 소목의 근거를 이루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시조는 인간적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인간을 초월하고 있는 신적 존재라고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시조는 신화적 선조(mythical ancestor)라고 할 수 있다.
『예기』에는 천자가 천(天)을 교사(郊祀)할 때 시조를 거기에 배제(配祭)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배제라는 것은 천과 함께 시조를 합제(合祭)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하여 조상 숭배는 천신에 대한 숭배로 연결되어 버린다. 천신과 4친연의 귀(鬼)가 분화되지 않고 하나로 합쳐진 것이다. 이처럼 조상 숭배는 일관되게 밑바탕에 시조 신앙이 기초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죽은 자의 숭배나 조령의 숭배나 그것이 참 종교적인 숭배이기 위해서는 시조 숭배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 죽은 자의 관념으로부터 조령의 관념으로 나아가고, 이 조령이 시조에 포섭됨으로써 세 가지 종류의 선조 사이에 일관된 연결이 있게 된다.
사자와 조령, 시조 사이에는 분명히 이질적인 요소가 있고, 단절이 개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시조에게 포섭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인간의 생명의 근원은 천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유교에서 발전시킨 종묘제가 나타내는 생명관이라 말할 수 있다.
조상 숭배의 정신을 도덕적으로 발전시킨 사상을 몇 가지로 나누면 다음과 같은 대표적인 예를 들 수 있다.
첫째로, 철저한 보은(報恩)에 대한 사상이다. 『예기』 제의(祭義)에는 “성인은 본을 돌아보고 시를 다시하여, 생의 근원을 잊지 않는다(聖人反本復始 不忘其所由生也)”라고 말하고 있다. 반본복시(反本復始) 혹은 반고복시(反古復始)라는 말은 지나간 조상을 섬기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본이나 고라고 하는 것은 이미 지나간 것을 말하고 시라는 것은 자기의 생명이 시작된 것을 말한다.
보본(報本)이라는 것은 생명을 공급해 준 은혜를 잊지 않음을 말한다면, 복시(復始)라는 것은 자기 생명의 직접적인 원인을 잊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보은의 정신에서 첫 번째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의 의미는 국가 사회에서 많은 공을 남긴 사람을 잊지 않음이다. 첫 번째가 생명의 근원을 잊지 않는 것이라 한다면, 두 번째는 사회적인 인간의 공적이 끼친 고마움을 잊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둘째로, 조상 숭배의 정신이 우리에게 철저히 가르치고 있는 것은 효(孝)에 대해서이다. 『예기』 제통(祭統)에 보면 “무릇 제의 사물됨은 크기도 하다……밖으로는 군장을 존경하도록 가르치고 안으로는 그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것을 가르친다(夫祭之爲物大矣……外則敎之以尊其君長, 內則敎之以孝其親)”고 표현하고 있다. 또 “제는 봉양을 좇아서 효도를 계속하는 것이다(祭者 所以追養繼孝也)”라고도 말하고 있다.
이런 구절들에서도 두 가지를 알 수 있는데, 하나는 자기의 직접적 생명의 근원인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밖으로 사회적인 군장에게 충(忠)할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충과 효는 전통적인 도덕 체계 가운데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덕목이 됨을 알 수 있다. 이 두 가지 덕목은 조상 숭배의 종교 의식 가운데서 끊임없이 배양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조상 숭배는 인간의 도덕적 발양의 원천이고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로, 조상 숭배는 모든 교화(敎化)의 근본이 되었다. 『예기』 제통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체로, 제사에는 십륜(十倫)이 있다. 신을 섬기는 것을 보여 주고, 군신의 의리를 보여 주고, 부자의 인륜을 보여 주고, 귀천의 등급을 보여 주고, 친소(親疏)의 차이를 보여 주고, 작록(爵祿)과 보상(報償)을 베푸는 것을 보여 주고, 부부의 분별을 보여 주고, 정사(政事)의 균등한 것을 보여 주고, 장유(長幼)의 차서를 보여 주고, 상하의 나누어짐을 보여 준다. 이것을 십륜이라 한다.” 또 말하기를, “제는 가르침의 근본이다(祭者, 敎之本也)”라 하여 비록 제사를 조상에 대한 제사라 명백하게 말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제사가 모든 가르침(十倫)의 근본임을 밝히고 있다.
십륜이라 한 것은 10가지 종류의 가르침 혹은 효용을 말하니 사회 정치적인 각종의 관계를 포괄한다. 뿐만 아니라 전통 문화적 중요한 영역도 포괄해서 모든 관계가 조상 숭배의 정신에서 교화되어 나온다고 말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조상 숭배가 차지하고 있는 동양 사회에서의 위치를 알 수 있다.
우리 나라의 조상 숭배는 관념적인 규범면에서나, 일반 민중의 실제적인 실천면에서나 모두 조상에 대한 유교적인 제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우리 나라 고래의 민간 신앙 속의 조상 숭배는 유교 제례에 가려서 그 모습을 뚜렷하게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다.
조상 숭배는 세계 어디서나 혈연 의식과 친족 조직들과 중요한 관련성들을 가진다. 그러나 그것은 그 문화 형태에 따라서 복잡한 양상들을 띠기 때문에 한 마디로 조상 숭배라고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우리 나라 고래의 조상 숭배도 역시 그러한 다양성을 띠어 왔던 것으로 보이는 점들이 있다.
그러나 또한 우리 나라 민간 신앙 속의 조상 숭배는 전혀 옛 기록이 없는 민속 전승이었기 때문에 그 발생 요인이나 역사적인 전개 과정을 밝히기가 어렵다. 그 점은 같은 민간 신앙이라도 공동체적인 동제(洞祭)처럼 공공성을 띠지도 못하였고, 집안의 서민 부녀층의 가정적 현상이었기 때문에 한층 더한 느낌이다.
거기에다 조선 시대 500년간 유교 제례에 눌려 왔을 뿐만이 아니고, 그 이전에도 상층 종교였던 불교와 많은 상관 관계를 갖고 영향도 받고 변형도 되어 왔으리라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가 있다. 그래서 우리 나라 본래의 조상 숭배는 지금 그 개념마저도 불분명하고 대단히 애매하다.
우선, 신체의 이름에 있어 통칭은 ‘시조 단지’ 또는 ‘조상 단지’이지만, 실제로 영남 지방에서는 ‘세존(世尊) 단지’이고, 호남 지방에서는 ‘제석(帝釋)오가리’로 다같이 불교적이나 이름이 각각 다르다.
여기서 ‘오가리’라는 것은 작은 ‘뚝배기’라는 말이다. 또, 유교 제례의 조상 신주의 변형과 뒤섞이는 수도 있다. 신주(神主)란 제례에서 사대 봉사(四代奉祀)하는 조상의 위패를 말하는 것인데, 이것은 별채인 사당에 모셔지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지금 아무리 종가(宗家)라도 사당을 따로 갖고 있는 집은 드문 실정이다. 그래서 이른바 ‘벽감(壁龕)’이라는 약식을 만들어서 사랑채나 대청 마루에 모셔 놓는 경우들이 있으나, 일반 농어촌에서는 그것도 제대로 안 된 것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조상 당세기라는 조그만 고리짝에다 제사지내는 조상 대수대로 표시를 해 놓고 조상 단지와 나란히 안방에 모셔 놓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고비(考妣)별로 한 대를 두 개의 고리짝으로 모시는 경우도 있고, 합해 하나에 모시는 경우도 있어서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고리짝이 8개일 수도, 4개일 수도 있고 실제로는 가지각색이다. 조상 단지들은 대개 안방에 모셔 놓는데, 지방에 따라서는 조상 단지 대신 똑같은 형태의 삼신 단지를 역시 고리짝들과 나란히 안방에 모시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본래 구분 의식이 선명하지 못한 농어촌 부녀자들이 주재자가 되는 신앙 형태라 더 구분이 잘 안 가는 실정이다. 현재의 잔존 현상을 볼 때 조상 숭배의 농경 민족성에 여신성까지도 띠고 있어서 분명하지는 못하지만 유구한 역사성을 느끼게 하고 있다. 그러한 역사성은 먼저 현대의 잔존 자료들을 면밀하게 검토함으로써 반대로 추정해 올라갈 수밖에 없는 실정이나, 그 역사성은 다각적으로 증명이 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호남 지방의 경우, ‘제석 오가리’ · ‘제석 단지’ · ‘조상 단지’ 등이 대표적인 명칭이다. 조상 단지는 조상 혼령의 상징으로 하나만 종손 또는 장자들의 집에서 모시고, 그 옆에는 신주 단지 또는 ‘몸 오가리’라고도 부르는 것을 1개에서 원칙적으로는 8개까지 모시는 경우들이 있다.
이 복수의 신주 단지는 유교 제례의 신주의 변형이다. 그래서 종손의 경우 4대 봉사로 남녀별이면 원칙적으로 8개, 남녀 합사(合祀)하면 4개가 되는 셈이다. 따라서, 2대 장자라면 2개 또는 4개가 되는 셈이다. 이 조상 단지와 신주 단지들은 흔히 마루 또는 안방에 시렁을 매어서 그 위에 모셔 놓는다.
조상 단지 안에는 쌀을 넣고 해마다 가을에 신곡이 나면 갈아 넣으며, 묵은 쌀로는 밥을 지어서 식구들끼리만 나누어 먹는다. 그 단지 속의 쌀이 불으면 풍년이고 줄거나 상하면 흉년이 든다고 해 정성껏 담고 모신다. 그래서 농사 잘되게 해주는 농사 오가리라고도 하고, 자손 잘되게 돌봐 주는 조상신이라고도 한다.
결국, 단지 속의 곡령(穀靈)이 조령(祖靈)을 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명절이나 좋은 음식을 만들었을 때, 혼인 등 집안의 대사가 있을 때에는 차린 음식들을 바치되 술이나 고기는 제외해 불교적 성격을 띤다. 그래서 명칭도 ‘제석 오가리’라는 이름이 많이 쓰이는 것이다.
그리고 신의 성별에 대해서는 ‘조상 할매’라고 한다는 여신격(女神格)의 경우도 간간이 있는데, 전라남도의 질문지 조사에서 신의 명칭의 통계 결과가 다음과 같이 나온 예가 있다. ① 조상 할매 167 ② 조상 180 ③ 조상 단지 2 ④ 지석신 2 ⑤ 가신(家神) 2 ⑥ 선영 7 ⑦ 선조6 ⑧ 조상 위패 3
여기에서 절대 다수인 167건이 ‘조상 할매’라는 여신격을 나타내고 있다. 조상이라는 응답들도 남녀별을 따지고 들면 여신격 수는 더 늘어날 것으로 생각되어서 조상 관념에는 여신격 관념이 상당히 강하게 느껴지고 있다.
이상을 요약하면, 1개에서 8개까지의 신주 단지가 같이 모셔진다는 것은 조선 시대 유교 제례가 가미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본다면 술과 고기를 안 바치고 ‘제석 오가리’라고 부른다는 불교적 성격은 삼국 시대 이래 고려 이전까지의 국교였던 불교성의 가미로 보인다.
그리고 다시 여신성 · 농신성 · 조상신성의 고색창연한 원초성은 그렇게 관념별로 본다면 불교 시대 · 유교 시대적인 관념보다는 더 오랜 원초적인 것이라 하겠다. 이리하여 조상숭배관념은 실로 유구한 원초 사회 이래의 우리 종교사의 집약적 상징물로 볼 수가 있을 듯하다.
한편, 영남 지방에서는 조상 단지를 흔히 ‘시조 단지’ 또는 ‘세존 단지’라고 부른다. 역시 흔히 안방 시렁 위에 모시는데, 여기에서도 시조 단지 옆에 나란히 신주의 변형을 모신다. 명칭은 대개 ‘조상 당세기’라 하거니와 조그만 고리짝을 1개에서 4개까지 모신다. 1개는 1대 장자이고, 4개는 4대 봉사하는 종손들의 경우가 된다. 그리고 이것을 유교 제례의 사당격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시조 단지에 쌀을 넣되 가을철 신곡이 날 때마다 갈아 넣고 구곡으로는 식구들끼리만 밥을 지어먹는 일들은 모두 호남 지방과 똑같다. 이것을 ‘세존 단지’라 부르고, 술과 고기를 안 바치는 불교적 성격도 호남의 제석 오가리와 똑같다. 한편, 조상 당세기에는 해당 조상들의 옷 조각을 넣는다든가, 글씨를 써넣는다든가, 삼베를 덮는다든가 일정하지는 않다.
그런데 그 조상 당세기들은 나란히 놓는 방법은 똑같으나, 맨 왼쪽에 놓는 시조 단지를 형태는 똑같지만 시조 단지나 세존 단지로는 부르지 않고 꼭 ‘삼신 단지’라고만 부르는 지역들도 있다. 술 · 고기를 안 놓는 불교적인 성격도 똑같고, 가을철마다 햅쌀을 갈아넣는 것도 똑같다.
다만 명칭이 삼신 단지로 되는 만큼 그 신은 자손을 점지해 준다든가, 자손의 성장을 잘 돌봐 준다는 산육신(産育神)의 성격으로 더 기울어진다. 그러나 삼신이란 자손을 돌봐 주는 신이니 조상신일 수도 있다는 사람도 더러 있다. 그리고 ‘삼신 바가치’ 또는 ‘삼신 단지’로 전승되는 지역과 ‘세존 단지’ 또는 ‘시조 단지’로 전승되는 지역의 분포도나 경계선은 분명하게 그을 수가 없다. 서로 뒤섞이고 있는 느낌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상북도에서도 질문지 조사 결과로는 삼신 단지는 물론 여신이 되지만, 시조 단지의 경우도 역시 여신 관념이 강한 통계 숫자를 보이고 있다. 안방에 모시는 신이름의 집계는 다음과 같다. ① 삼신 98 ② 삼신 할매 18 ③ 조상 할매 43 ④ 신주 단지 3 ⑤ 조상 단지 4 ⑥ 신주 19 ⑦ 조상신 19 ⑧ 성주 25
삼신 단지가 ① · ② 합계 116건으로 전승 분포가 많은 것으로 보이고, ⑧ 성주 25건은 대청 마루가 없어서 성주가 안방에 모셔진 것으로 볼 수 있겠다. ⑥ · ⑦의 신주, 조상신 합계 38건을 조상 당세기를 의식한 응답으로 가정하고, ③ · ④ · ⑤의 합계 50을 시조 단지 또는 세존 단지 종류로 일단 가정해 볼 수가 있겠다. 여기에서도 조상 할매 43이라는 많은 여신 관념의 비율을 읽을 수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도 호남 지방과 같이 조선 시대 유교 제례의 사당 신주격인 조상 당세기와 세존 단지가 갖는 삼국 시대 · 고려 시대의 불교적인 성격, 그리고 조상신 · 여신 · 농신성을 겸한 보다 원초적인 관념들로 이 조상 숭배 형태가 우리 나라 종교사를 집약하고 있는 다면성과 유구한 역사성을 아울러 짐작할 수 있다.
한편, 호남 지방의 제석 오가리가 맏아들 집에만 모셔져서 수가 적고 보기가 어려운 것과는 반대로, 영남의 삼신 단지의 경우는 신접살림 아니고는 모시는 마을에서는 거의 집집마다 모시고 있어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마을들도 간간이 있다.
그리고 이상의 서술은 극히 원칙적인 경향을 설명한 것이고, 이러한 각 가정적 민간 신앙에는 변형과 예외들도 적지 않다. 그런 대로 이상과 같은 조상 숭배 형태는 그래도 영남 · 호남 지방에나 민속적인 형태로 전승하고 있을 뿐, 여타 지역에서는 특수 개별 사례는 있어도 일반적인 신앙 형태로 전승하는 사례는 찾기 어렵고 지금까지는 보고 자료도 거의 없다.
이러한 조상 숭배를 다시 무속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가령, 이능화(李能和)의 『조선무속고 朝鮮巫俗考』의 가택신(家宅神) 항목 속에서 ① 성주, ② 터주, ③ 제석, ④ 업, ⑤ 조왕, ⑥ 문신 등 6개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으나, 조상신 관념에 대해서는 ③ 제석 항목에서도 언급이 없다.
그것은 임동권(任東權)의 『한국원시종교사』의 조선 시대 가택신 항목 속에서도 비슷해 조상 숭배 관념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고, 현대 부분에서도 언급이 없다. 그러나 이능화는 무당굿의 이름(巫行神事名目)이라는 항목 속에서는 성주굿 · 제석굿 · 조상굿 · 당산굿 · 별신굿 · 용신굿 · 내림굿 · 지노귀새남 등 16종을 든 가운데 조상굿의 이름을 들고 있다.
그렇지만 그 설명은 “무녀를 불러서 조상신을 청하고 먹이는 굿이며, 이것은 아마도 고려 이래의 신주를 무당 집에 맡기던 위호(衛護)의 유법이리라”고 그리 탐탁하지 않은 설명을 간단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전국 각 지방의 무속에서 굿거리의 이름을 보면 어느 지방이나 대개 조상 거리 또는 조상굿이라는 제의 절차의 이름이 보인다. 이 때에는 제석 거리의 이름과 같이 두 개가 보이는 경우도 많다. 이 때의 제석은 농신(農神)이고, 또 ‘삼불 제석(三佛帝釋)’이라는 이름으로 산육신의 성격을 띠기도 하니, 제석신을 농신 · 삼신 또는 수명신(壽命神)으로 보면 될 것이다.
그리고 위 제석 단지들은 제석 거리와 연결지어 설명되는 경우들이 많다. 따라서, 무당굿 속의 조상 거리는 또 조금 달라진다. 여기에서도 선대 조상들이 많이 들먹여지나, 그것은 반드시 유교 제례처럼 선대 조상에 국한되지 않고 망자의 상하에 관계없이 조상굿으로 낙지 왕생(樂地往生)이 기원된다.
무가의 채록을 보아도, 가령 평양 재수굿 속의 조상굿에서 “고모 · 이모 · 양모 · 득모에 애영모 · 숙모 · 아잡 · 조카에 처남 · 매부며 왕고모 · 차고모덜 다 들어오세서”(金泰坤, 韓國巫歌集)와 같이 나타난다.
이것이 좀더 고형(古型)을 간직한 것으로 보이는 제주도 같은 경우는 더 달라진다. 현용준(玄容駿)의 『제주도무속자료사전』에 의하면, “조상이라 하면 조부모 · 증조부모 · 고조부모 등 혈연 조상을 이르기도 하나, 무속에서는 이런 혈연 조상이 아니라, 그 집안 또는 한 씨족을 수호하는 신을 조상이라 일컫고 있다”고 하였다.
실제로 조상신으로 모시는 대상은 뱀 · 도깨비 등과 같이 혈연성이 전혀 있을 수 없는 경우들이 적지 않아서 크게 색다른 점이 있다. 이러한 조상신의 내력을 설명한 무가 조상 본풀이가 굿에서 무당에 의해서 불린다.
그리고 이러한 당이 한 가정의 울타리 안에 모셔질 수도 있고, 동네 어디에 모셔질 수도 있다. 굿에는 사자 의례(死者儀禮)가 많고, 위 본토의 조상굿들의 경우는 사령들을 모두 초청하고 있다. 그것은 죽은 자와 산 자들을 단절시키려는 것이 아니고, 죽은 자를 아주 망각하려는 것도 아니다. 기회 있는 대로 청해 대접하고 도움도 받으려는 점에서는 유교의 조상 제례와 상통하는 점이 있다. 거기에는 혈연성도 보이고, 선대 조상들을 받드는 유교 제례의 영향도 보인다.
4대 봉사를 하고, 5대 이상은 다시 묘제를 지내고 또 원대 조령(遠代祖靈)을 시조 단지에도 모시는 영구성을 띤 한국의 조상 숭배는, 사람이 죽으면 세상과 단절되고 망각되는 서양적인 경우와는 크게 다르다. 그리고 혈연적이 아닌 제주도의 조상신 관념은 한결 더 주목을 끈다.
다음에 민간 신앙 속의 조상 숭배의 또 다른 형태로 들어야 할 것에 골맥이 동제신(洞祭神)을 비롯한 일부 촌락 공동체의 수호신들이 있다. 영남 지방의 골맥이 동제신에서 조상 숭배적인 측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골맥이의 ‘골’은 장음(長音)으로 고을 동(洞), 고을 읍(邑), 고을 군(郡)처럼 집단 거주처를 의미한다. 그리고 맥이는 막다[防]의 명사형으로 이 골맥이라는 고형(古型)어린 복합 명사는 촌락 수호신이라는 뜻을 가진 말로 해석된다.
그런데 영남의 특히 동해안 지역 촌락들은 골맥이에 성씨를 붙여서 골맥이 김씨 할배니 골맥이 이씨 할매니 하는 이름을 많이 사용한다. 이 때 할배는 할아버지가 아니고 조상을 뜻한다. 그리고 그 골맥이 김씨 할배는 첫 입향(入鄕) 시조로서 그 마을의 창건신으로 여긴다. 결국, 골맥이할배는 특정 촌락집단의 시조신 · 창건신 · 수호신이라는 개념들을 아울러서 지니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는 초기 신라 김씨 집단의 시조인 김알지는 김씨 골맥이라고 볼 수 있고, 박씨 집단의 시조인 박혁거세는 박씨 골맥이로 볼 수 있다. 실제로 김알지가 탄생하였다는 계림(鷄林)은 현재 골맥이 당수(堂樹)나무라고 부르는 동제당들과 같은 신목(神木)들로서 신라 궁성내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삼국사기』의 박혁거세가 즉위했다는 정월 15일이라는 날짜도 현재 거의 대부분의 골맥이 동제가 거행되는 바로 그 날짜이다. 이 특정 집단의 시조신 관념 · 날짜 · 당 형태 등의 고금의 합치는 결코 우연한 것으로만 볼 수는 없다.
어디에서나 왕궁 제의(王宮祭儀)는 결코 무에서 창조되는 것이 아니고 흔히 민중 수준의 것이 승화(昇華)되어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그렇게 볼 때 신라 김씨 왕가의 시조신 김알지가 계림의 나뭇가지에 걸려 있던 황금 궤 속에서 출현하였다는 신화도 우리는 곧 이해할 수가 있다.
조령의 용기(容器)로서 우리는 앞서 많은 단지와 당세기에 바가지 종류까지 보아 왔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단지였는데, 그것은 농어촌 민가의 조령 용기로서 안성맞춤인 것이고, 적어도 통일신라의 김씨 왕가의, 그것도 시조 신화로서는 그 조령의 용기는 오지 그릇보다는 황금 제품이 가장 그럴싸한 것일 수밖에 없다. 이 때 황금 궤는 실제로 김씨 왕가가 모셨던 용기인지 또는 신화적인 미화인지 알 수가 없으나, 그 어느 편으로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결국, 오늘날의 시조 단지나 골맥이 동제당이나 민간 신앙에서 가지고 있는 조상 숭배 형태들이 그대로 다 투영되어 이루어진 것이 김알지 신화이다. 이렇게 볼 때에 앞에서 본 시조 단지나 골맥이 동제당의 조상 숭배 형태들은 전기한 바 있기도 하지만, 삼국 초기 이래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전승체였다는 짐작도 동시에 가능해지는 셈이 된다.
그러나 김알지 신화는 왕실의 시조 신화로 승화된 것의 그것도 간략한 기록일 뿐이고, 오늘날의 민간 신앙은 그보다 더 고형어린 모습들을 많이 보여 주고 있다. 그 한 예로서, 질문지 조사로 골맥이 동제신의 성별을 집계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이것은 1968년도에 경상남북도 · 강원도 동제당 조사서 3,000여 매 가운데 신명 기입란에 골맥이로 기입된 740건 중에서 성별을 집계한 것이다. 남신 93, 여신 226, 성 미상 421, 합계 740. 위의 조상 단지에서도 여신 관념이 강했던 것을 본 것처럼, 이 골맥이 동제신의 경우도 여신이 남신보다 2. 4배나 더 많아서 그 주류도 역시 여신 관념으로서 풍요 다산의 지모신 신앙(地母神信仰)임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그 분포는 특히 동남 해안 지방에 밀집되어 있고, 밀집 지대일수록 보다 원형을 잘 갖추고 있다. 그리고 내륙으로 들어올수록 수가 적어지면서 쇠잔 변화형들이 많아지다가 영남 지방과 강원도 남부를 벗어나면 골맥이라는 말은 들을 수가 없게 된다.
그러나 골맥이 동제당 형태도 필경은 우리 나라 동제당 형태의 하나이다. 세부적으로는 차이점들이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다 같은 지연 공동체의 농경 의례들이다. 그래서 가령 골맥이 동제당과 똑같지는 않으나 유사한 조상 숭배성은 제주도의 3성 시조 신화에도 보인다.
3성 시조 신화의 기본이 현재도 전승하는 당신 신화인 본풀이고, 따라서 고(高) · 양(梁) · 부(夫) 3성 시조도 지연 공동체의 수호신이고 창건신이며 시조신들이었다는 점에서는 골맥이들과 성격을 같이하고 있다.
한 예로, 포항시 구룡포읍 대보리에서도 3위의 골맥이를 모시고 있었다. 그것은 하(河) · 최(崔) · 양(梁) 할배들로서 세조찬위(世祖簒位) 때에 난을 피해 이 곳에 정착, 대보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 마을에서는 하 · 최 · 양 3성의 후손을 골맥이집이라 부르고, 이 3성은 대보리 동제향계(洞祭享稧)의 주동역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하씨와 최씨 후손들은 자기네 할배가 먼저 이곳에 와서 마을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하 · 최 · 양의 순서상 선위 다툼이 생겨서 최 · 하 · 양의 순서라느니 하 · 최 · 양의 순이라느니 주장하는 경우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 점까지 마치 제주도의 3성 시조를 그 후손들이 서로 고 · 양 · 부니 양 · 고 · 부니로 선위를 다투는 일이나, 그 제사의 주재자들이 되는 점들과 성격을 같이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나라의 조상 숭배는 조선 시대에 와서 가족 제도가 확립되면서 제도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크게 정비가 된 것이다. 여기에는 고려 말기부터 수입되기 시작하였던 주자의 『가례』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삼국과 고려 시대의 정신 세계를 지배하였던 불교는 유교의 조상 숭배에 비하면 조상에 대한 인식은 희박한 편이었다. 더구나, 그 이전의 조상 숭배에 대해서는 기록도 없어서 정확한 모습은 알 길이 없다. 다만, 오늘날까지 민간에 전승하는 민속 신앙들과 약간의 시조 신화들을 통해 옛 조상 숭배 상황을 유추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조상신 관념은 농경 민족답게 농신 관념과 지모신(地母神)적인 여신 관념을 아울러서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을 짐작시켜 주던 오늘날의 민간 신앙은 또 민간 신앙답게 불교성과 유교 제례성까지 혼연히 시조 단지라는 한 몸에 지니고 유구한 우리 종교사를 집약한 상징물로서 지금까지 전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