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사상 ()

목차
관련 정보
유교
개념
극단 혹은 충돌하는 모든 결정(決定)에서 중간의 도(道)를 택하는 유교교리.
내용 요약

중용사상은 극단 혹은 충돌하는 모든 결정에서 중간의 도를 택하는 유교교리이다. 유학에서 중용 두 글자는 치우침 없음과 일상적 꾸준함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형이상학적으로 중은 진리가 있는 곳이며 용은 진리가 쓰이는 곳이다. 공자의 중용지도는 인성의 선악 양면을 모두 인정하고 일의 대소후박을 참작하여 시의를 좇아 그 가운데를 취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유교의 중용은 형이상학적 개념에서 출발하여 가치론적인 수양방법으로까지 발전했다. 한국에서도 이이와 이황 그리고 실학파의 정약용에 이르기까지 중용의 실천적 의미에 대한 많은 탐구가 있었다.

목차
정의
극단 혹은 충돌하는 모든 결정(決定)에서 중간의 도(道)를 택하는 유교교리.
내용

신중한 실행이나 실천을 뜻한다. 이 사상은 중국 외에도 인도와 서양에서는 그리스의 플라톤(Platon) 또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에 의하여 주로 전개되기도 하였다.

즉, 플라톤은 어디에서 그치는지를 알아 거기서 머무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최고의 지혜이며 따라서 크기의 양적 측정이 아닌 모든 가치의 질적인 비교를 중용이라 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마땅한 정도를 초과하거나 미달하는 것은 악덕이며, 그 중간을 찾는 것을 참다운 덕으로 파악하였다. 또한, 불교의 중도(中道)도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유교사상에 있어서 중용이란 현실에 적용되는 행도(行道)의 최선의 길을 뜻하며, 형이상학적인 개념에서 출발하여 가치론적인 수양방법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서, 『중용』의 핵심사상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전체의 핵심이며 상대가치개념의 중간인 중(中)을 인식하여 그로써 실행하는 사상인 것이다.

여기에서는 유학사상에 있어서 중용의 의미와 그 이해에 관한 접근을 다각도로 시도하고, 나아가 한국유학에 있어서 이이(李珥)정약용(丁若鏞)의 중용설(中庸說)을 고찰하여 그 사상적 발전양태를 살펴보기로 한다.

『중용』은 원래 『대학』과 함께 『예기』 49편 중에 있던 것을 주희(朱熹)가 따로 뽑아내어 비로소 유교의 기본경전인 사서의 하나가 되었다. 송대에 불교의 융성에 따른 유교의 자기반성과 불교의 심성론이나 도교의 형이상학적 이론에 대항하기 위하여 유교사상 자체 내에도 깊은 철학적 원리가 뒷받침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할 시대적 요청에서 유교의 철학적 배경을 간명하고 심도 있게 밝히는 책으로 특히 취택된 것이 바로 『중용』이었다.

저자에 대한 학설은 구구하나 자사(子思)와 그의 제자의 작이라는 설이 가장 지배적이다. 이 책의 가장 주된 사상이 ‘중용’과 ‘성(誠)’이라는 데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는데, 주로 중용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중용을 분석해 보면, 중은 양극(兩極)의 합일점이고, 용은 영원한 상용성(常用性), 즉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정이(程頤)는 “치우치지 않는 것을 중이라 하고 바뀌지 않는 것을 용이라 한다(不偏之謂中 不易之謂庸).”고 하였는데, 이것은 곧 중은 공간적으로 양쪽 끝 어느 곳에도 편향하지 않는 것인 데 비하여, 용은 시간적으로 언제나 변하지도 바뀌지도 않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주희는 중용을 주석하기를, “중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기대어 있지 않아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것으로서 인성(人性)이 지극히 중정(中正)하여 질서를 이룬 안정된 상태가 사물에 접하여 감이동(感而動)하기 이전의 인성본연(人性本然)을 나타내는 말이며, 용은 일상생활에 있어서 평상(平常)됨을 나타내는 뜻”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중용의 참된 뜻과 그 실현은 중과 용, 즉 알맞음과 꾸준함이 서로 떨어지지 않는 관계를 유지하면서, 치우치거나 기대어 있지도 않고 지나치거나 모자람도 없는 중덕(中德)뿐만 아니라, 꾸준한 용덕(庸德)을 겸비하여야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겠다.

위의 내용을 종합하여 살펴볼 때, 결국 중의 위치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고, 그에 따라 의로(義路)를 견지하여 불변하는 것이 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중은 객관적 대상세계에 있고 용은 주관적 자아세계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지만, 또한 변화되는 세계에 맞게[中] 쓰는[庸] 것이 곧 중용이라 할 수도 있으므로, 이로 보면 주관과 객관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일체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중용, 즉 ‘맞게 쓰는 것’의 내용은 무엇인가? 객관이 주관에 맞는 것[中]이 진(眞)이라 한다면, 주관이 객관을 쓰는 것[庸]은 이(理)라 할 수 있다. 이 진리는 중용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형식에 얽매여 있는 것이 아니며, 이 진리의 일차적 내용이 인의(仁義)이고 인의의 구체적인 내용이 예악(禮樂)인 것이다.

따라서, 인의의 이상을 예악으로써 현실에 중정하도록 쓰는 것이 곧 진리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중은 진리가 있는 곳(所在)이고 용은 진리가 쓰이는 곳(所用)이라면, 진은 중용의 인식이고 이는 중용의 실행이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인의는 중용의 이상이고 예악은 중용의 현실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유교의 교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중용의 의의는 지행(知行)의 덕을 존중하고 있다. 공자는 “도가 행하여지지 못하는 까닭을 내가 알겠도다. 지자(知者)는 지나치고 우자(愚者)는 미치지 못하는구나. 도가 밝혀지지 못하는 까닭을 내가 알겠도다. 현자(賢者)는 지나치고 불초자(不肖者)는 미치지 못하는구나(중용 제4장).”라 했다.

또 “중용은 주1한 것이나 인간들은 그것을 능히 행하지 못한 지가 이미 오래이다.”라고 하여, 중용의 도는 지와 행의 상호조화 내지는 상보적인 관계 속에서 실천될 수 있는 것임을 역설하고 있다. 또, 공자는 군자와 소인을 비교하여 말하기를, “군자는 중용을 체행(體行)하고 소인은 중용에 반(反)한다. 군자가 체행하는 중용은 군자로서 시중(時中)함이요, 소인이 중용에 반함은 소인으로서 거리낌이 없음이다(중용 제2장).”라고 하여 군자의 중용은 때에 따라 알맞게 도를 행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중용사상의 본체론적 · 심성론적 논리전개를 살펴보면, 우선 주자의 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주희는 『주자어류 朱子語類』에서, 성정(性情)에 대해서는 중화(中和)를 말하여 중을 도의 체(體), 화를 도의 용(用)으로 보았고, 또 이의(理義)에 대해서는 중용을 말하여 중은 천하의 정도로서 용(用)으로 보아 시중의 중으로 보았다. 용은 천하의 정리로서 체로 보고 있다.

또, 중화와 중용을 비교함에 있어서는 중화는 체, 중용은 용(用)이라 하였는데, 이는 결국 중화는 성정으로 심성적인 것을 가리키는 것이고, 중용은 그것이 행위로 드러난 것을 가리킨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중화의 ‘중’은 희로애락이 아직 발현되지 않은 상태로서, 천부본연(天賦本然)의 성이며 천명의 성(天命之性)인 것이고, 그것은 미발(未發)의 상태이므로 불편불의(不偏不倚)요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상태이며, 심지체(心之體)로서 은(隱)인 것이다. 이 미발지중(未發之中)은 곧 천명의 정으로서 천하의 대본(大本)이므로,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마음의 본체라 하겠다.

그리고 중화의 ‘화’는 희로애락이 절도에 맞는 것, 즉 중절(中節)을 말하는 것이므로 천하의 달도(達道)이며, 심지용(心之用)으로서 삼라만상에 현현(顯現)되는 것으로 비(費)라 하겠다.

한편, 『중용』의 첫머리에서는 천명(天命) · 성(性) · 도(道) · 교(敎)를 말하여 중용의 철학적 근거와 내용을 밝힘으로써 ‘치중화(致中和)이면 천지위언만물육언(天地位焉萬物育焉)’이라는 중용의 최고 · 최후의 경지를 그렸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곧 중용의 도이다. 그런데 이렇게 숭고한 중용의 도는 오직 성인만이 능히 실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하여 군자의 중용의 도는 해괴하거나 비현실적인 도는 아니며, 또 일상생활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도 아니다. 일반 부부의 우(愚)로도 가히 알 수 있고 부부의 불초(不肖)로도 능히 행할 수 있는 비근하고 평범한 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용의 도는 일상생활의 전역에 걸쳐 있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그 전역에 걸친 다양한 양상을 통일하는 근본원리의 제시를 전제하고 있는데, 그것이 곧 『중용』 제12장에서 밝히고 있는 이른바 ‘군자지도 비이은(君子之道 費而隱)’인 것이다.

주희는 비를 용지광(用之廣), 은을 체지미(體之微)라 주석하였는데,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중과 용, 중과 화를 비와 은으로 비교한다면, 중용의 중은 ‘비’, 용은 ‘은’이라 할 수 있으며, 중화는 체로서 은이요, 중용은 용으로서 비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유교에 있어서 중용사상의 현실적 의의를 불교나 도가철학 및 법가의 사상과 비교하여 그 의미를 되새겨 보기로 한다.

도가와 불교에서는 대체적으로 위로 고상한 이상만 추구함으로써 주2이나 무욕(無欲)을 내세워 인간 본성의 선한 측면만 보고 거기에 무위순응(無爲順應)할 것만을 주장하며, 유위유의(有爲有意)로서의 인의 · 도덕 · 예악 등의 제도를 아래로 봄으로써, 단번에 이상을 실현하려는 상달(上達)만 내세우고 단계적인 현실긍정과 실현을 의미하는 하학(下學)을 도외시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므로, 이는 초인문(超人文) · 초인도적(超人道的)인 태도로서 중용의 의의에 어긋나는 지나침(過之)인 것이다.

또, 아래로 현실타개의 방술(方術)로서 무자비한 위력으로 제도적 억제만을 내세우는 반인문(反人文) · 반인도(反人道)의 법가류(法家流)는 인성을 악으로만 보고 복종만을 강요하고 있으므로, 이는 중용을 알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하는 이른바 ‘모자람(不及)’이라고 할 수 있다.

유교에서는 인성의 선악 양면을 모두 인정하고 또 일[事]의 대소후박(大小厚薄)을 참작하여 시의에 좇아 그 가운데를 취하는 것이므로 이것이 전술한 바 있는 공자의 중용지도(中庸之道)인 것이다. 이는 바로 이상과 현실의 가장 바람직한 조화를 의미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유학의 정통은 성리학을 그 철학적 기반으로 하였고, 이 성리학이 16세기 중엽 이황(李滉)과 이이를 통하여 그 절정을 이루었다. 그런데 이황과 이이는 성리설에서 서로 입장의 차이가 뚜렷해 두 봉우리를 이루었거니와, 그 성리설의 성격은 그들이 시대현실 속에서 고뇌와 사색을 통하여 발견한 해답이었다.

이황이 이기이원론의 입장에 서서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한 것도 사실은 거듭된 사화(士禍)를 거치면서 시대사회 속에서 정의와 불의가 대립된 현실을 절실히 인식하였던 사실과 연관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이 역시 이기일원론의 입장에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하여 시대사회가 지닌 모순과 불합리성을 통찰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적극적인 참여의식과 개선의지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황이 존리사상(尊理思想)에 근거한 도덕세계에 보다 더 많은 가치를 두었다면, 이이는 이기지묘설(理氣之妙說)을 주창하여 현실적 문제에까지 관심을 집중시켰다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황은 성(誠)을 기본으로 하여 일생 동안 경(敬)의 실천에 노력한 반면, 이이는 이황보다는 현실문제와 학문의 세계를 더 연관시키려 하였다.

한편, 『중용』의 전체적인 내용을 요약한다면, 그 전반부는 중용의 철학적 의미를, 후반부는 그것의 실현에 대한 천도와 인도의 문제인 성을 다루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이의 중용에 대한 이해는, 실천에 중심을 둔 성에 대한 언급이 주를 이루고 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이이의 중용설은 주로 『성학집요 聖學輯要』에 나타나 있다.

앞에서도 중용과 중화의 의미를 비와 은으로 살펴보았지만, 이이는 비(費)와 은(隱)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비를 이(理)가 사물 또는 인사(人事)에 산재한 바의 소당연자(所當然者), 즉 당위성으로 보고, 부자(父慈) · 자효(子孝) · 군의(君義) · 신충(臣忠)의 유(類)로 이를 용이라 하고, 은(隱)은 그 소이연자(所以然者), 즉 존재성으로서 체라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이는 비 속에도 소이연으로서의 은, 즉 이치가 내재하여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이이는 전술한 바 있는 주자의 성정론에 대하여 자기의 견해를 <답성호원 答成浩原>에서 밝히고 있는데, 즉 미발은 태극의 체[太極之體]이며, 또 지선의 체[至善之體]로서 천명의 성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성(誠)을 천지실현(天地實現)으로서의 심(心)의 본체로 규정하고, 더 나아가 대본(大本)은 재심의 중[在心之中]이요, 달도(達道)는 재사물의 중[在事物之中]이고, 또 재심의 중은 미발의 중으로 지선 그 자체이며, 재사물의 중은 지선의 용[至善之用]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주자는 성(誠)에 대하여 진실무망(眞實無妄)한 것이며 천리(天理)의 본연이라 하였지만, 이이는 『율곡전서』 권4 성의(誠疑)에서, 성에는 실리의 성[實理之誠]과 실기심의 성[實其心之誠]이 있다고 밝혀, 실리의 성은 소이연으로서 천리의 본연이고, 실기심의 성은 소당연으로 인간의 마음을 진실되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곧 천도로서의 성이 소이연의 뜻이라면, 인도로서의 성은 소당연의 뜻이므로 성에는 실리와 실심, 즉 천도와 인도의 양면성이 있음을 말한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이이는 이황이 정주(程朱)의 존양성찰(存養省察)과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위학(爲學)의 방법을 계승, 거경궁리(居敬窮理)로써 인(仁)의 실현방법, 즉 수양론을 언급한 반면에, 주성(主誠)을 내세워 독특한 수양론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이의 성사상(誠思想)은 천인(天人)을 관통하는 것으로서 중용에 있어서의 체용의 은비관계(隱費關係)를 설명하고 있다.

정약용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까지 활약한 실학의 대가로 실학파 중에서 경세치용파의 종사(宗師)인 이익(李瀷)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켜 이를 집대성한 인물이다. 정약용의 실학사상을 근원적으로 이해하려면, 우선 그의 많은 경전주석에 나타난 경학사상을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정약용의 야심적인 경전연구를 통한 주석체계는 경학사(經學史)에서도 중요한 업적임에 틀림없을 뿐더러, 이것은 곧 그의 철학적 근본입장을 밝혀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가 자신의 경학체계를 통하여 성리학과 훈고학을 비판적으로 극복하고 유학의 근본정신을 재천명하려고 하였던 것은 단순한 복고주의라기보다 그 시대에서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여기서 다산철학(茶山哲學)의 근본견해가 유학의 본질과 전통에 따라 인간문제에 대한 관심에 초점이 놓여 있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그의 중용설을 고찰해 보기로 한다. 정약용은 <중용자잠 中庸自箴>에서, 중용이 원시유가의 실천적 행동규범임을 강조하여 그 중요성을 제시하는 한편, 『중용』의 사상과 내용을 ‘중용’으로써 주지(主旨)로 하고 또 일관시키고 있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는 또 중과 중화와 중용을 구분하여 중과 중화는 같고 중용은 ‘중이용(中而庸)’ 또는 ‘중화지용(中和之用)’이라 하였다. 여기서 중과 중화가 같다는 것은, 미발일 때에는 집중(執中)을 하고 이발(已發)일 때에는 중절(中節)을 하기 때문에 중 · 화 2자(字)는 이것을 합하여 중 1자로 하여도 무방하다는 견해인 것이며, 중용을 ‘중이용’ 또는 ‘중화지용’이라고 한 것은 중과 중화가 일시적인 데에 그치지 않고 항구불이(恒久不已)하여야 덕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인 것이다.

이것은 위에서 언급한 주자학적인 해석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또, 정약용은 <중용강의>에서, 주희가 중용의 용을 평상이라 한 것에 대하여, 이러한 문구는 불교에서 온 것이지 유가의 옛 경전에는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여 주희의 설을 반박하고 있다. 자신은 용덕(庸德)을 상덕(常德)이라 하였고, 상의 뜻을 세 가지로 나누어 항상 · 경상(經常) · 평상이라 강조하였다.

이렇게 볼 때, 정약용의 중용해석은 다분히 분석적 · 구체적인 것이고 실천에 역점을 둔 이론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정약용은 성(誠)에 대하여 “성이라는 한 글자는 만덕(萬德)의 근원이 되며 『대학』과 『중용』의 두 책은 모두 ‘성’ 한 글자로써 수공(首功)을 삼는다.”라고 <중용자잠>에서 밝히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중용지도’와 ‘신독(愼獨)’과 ‘성’을 연관시켜 중용지도의 실현은 신독이 아니면 안 되며 신독의 공부 역시 성이 아니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여기에서도 주자의 지나친 관념적 해석에 반기를 들고, 현실적이며 구체적인 면에 입각하여 인간의 후천적인 성실성을 역설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철학이론이 유교의 한계성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점은 있으나 논리전개는 실학적인 긍정적 요소가 있다 하겠다.

이상에서 살펴본 내용을 토대로 중용사상의 현대적 의의와 의미를 조명해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현대에 있어서 객관적 진리만을 추구하고 실현하려는 과학이나, 주관적 진리에만 몰두하는 철학유파들은 각기 이상과 현실의 결여와 무시로 인한 괴리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대과학과 철학의 편중된 진리관에 반하여, 유교사상은 객관적인 자연에 대한 인식과 주관적인 인간이 하는 실용의 ‘중용’을 진리로 하기 때문에 새로운 방향제시를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의 진리는 단순한 객관적 세계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순전한 주관적 세계에만 있는 것도 아니며,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용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율곡전서』
『여유당전서』
『유교와 한국사상』(금장태,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1980)
「중용사상에 관한 연구」(심우섭, 동국대학교박사학위논문, 1981)
주석
주1

‘지요하다’의 어근.    우리말샘

주2

사람의 힘을 더하지 않은 그대로의 자연. 또는 그런 이상적인 경지.    우리말샘

집필자
최영진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