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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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무
처용무
무용
작품
문화재
신라 헌강왕 때의 「처용설화(處容說話)」에서 비롯된 가면무.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국가무형문화재(1971년 01월 08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내용 요약

처용무는 신라 헌강왕 때의 「처용설화」에서 비롯된 가면무이다. 1971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궁중에서 잡귀를 쫓던 나례 의식을 행한 뒤에 전도와 후도 두 차례에 걸쳐 처용무를 추었다. 조선 초기 성현의 『용재총화』와 『악학궤범』에 따르면 원래 한 사람이 추었다고 한다. 이후 5명의 처용이 오방의 방위와 빛깔에 따라 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 처용탈은 모시풀로 짠 저포 혹은 옻칠을 한 칠포로 만든다. 두 귀에는 주석고리와 납주를 걸고 복숭아열매와 가지를 단다. 2009년 처용무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목차
정의
신라 헌강왕 때의 「처용설화(處容說話)」에서 비롯된 가면무.
내용

1971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고려사』 악지(樂志)에는 처용무가 소개되어 있지 않지만 『고려사』 충혜왕조와 신우조(辛禑條)에는 처용희(處容戱)를 즐겼다는 기록이 전한다. 성현(成俔)『용재총화(慵齋叢話)』 권1에는 처용무는 원래 흑포사모(黑布紗帽)하고 한 사람이 추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보면, 주1로 구성된 시기는 조선 초기로 추정된다.

『악학궤범』에 따르면 12월 주2 하루 전날 궁중에서 나례(儺禮: 잡귀를 쫓기 위해 베풀던 의식)를 행한 뒤에 전도(前度)와 후도(後度) 두 차례에 걸쳐 처용무를 추었다. 전도에서는 오방처용무만 추고, 후도에서는 역시 오방처용무를 추되, 요신극환(搖身極歡)이라는 설명에서 보듯이 전도처용무와는 다른 점이 있다.

즉, 전도처용무는 구나(驅儺: 악귀로 분장한 사람을 쫓아내는 의식) 뒤에 오는 의식적인 춤이고, 후도처용무에 이어 「학무(鶴舞)」 · 「연화대(蓮花臺)」 정재를 연출한 다음, 미타찬(彌陀讚) · 본사찬(本師讚) · 관음찬(觀音讚) 등 불가(佛歌)를 화창(和唱)하게 되는데, 이는 다분히 오락적인 요소를 띠고 있다고 하겠다.

조선 말기의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에 따르면, 성종 때에 연출되던 그 후도처용무의 잔영(殘影)으로 미타찬 이하 불가가 끼어 있는 점이 주목된다.

그러나 현재는 불가는 부르지 않고 춤만 추게 되어 있다. 또, 『악학궤범』의 처용무에서는 처용만기(處容慢機: 鳳凰吟一機)에 의한 「처용가」, 봉황음중기(鳳凰吟中機)에 의한 「봉황음가(鳳凰吟歌)」(山河千里國詞), 삼진작(三眞勺)에 의한 「정과정(鄭瓜亭)」, 북전급기(北殿急機)에 의한 「북전의 노래」(山河千里壯詞)를 각각 노래하였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 이르면 춤추며 노래부르던 원래의 「처용가」 중에서 그 첫 부분인 “신라성대(新羅聖代) 소성대(昭盛代) 천하태평(天下太平) 나후덕(羅候德) 처용 아바 이시인생(以是人生)에 상불어(相不語)하시란대”를 가곡(歌曲) 중 언락(言樂) 가락에 얹어 부르고, 그 다음은 세종 때 개작한 “산하천리국(山河千里國)에/가기울총총(佳氣鬱葱葱)하샷다/금전구중(金殿九重)에/명일월(明日月)하시니/군신천재(群臣千載)에/회운룡(會雲龍)이샷다”로 시작되는 원래의 봉황음중기의 가사를 가곡 중 편(編) 곡조에 얹어 부른다.

처용탈은 주3 혹은 주4로 껍질을 만들고 채색은 적면유광(赤面油光)으로 「처용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유덕(有德)한 모습으로 만들어지며, 탈에 씌운 사모는 대[竹]로 망을 얽어 종이를 발라 만들고 모란꽃을 그린다. 두 귀에는 주석고리와 납주(鑞珠)를 걸고 복숭아열매와 가지를 단다.

복식을 보면, 옷은 오방의 방위 빛깔에 따라서 동쪽의 청, 중앙의 황, 남쪽의 홍, 서쪽의 백, 북쪽의 흑으로 구분하고, 앞과 뒤 그리고 소매에는 만화(蔓花)를 그린다. 천의(天衣)는 녹단(綠段)에 만화를 그리고, 안은 오방이 모두 홍주(紅紬)를 쓴다. 주5은 겉과 안 모두 홍초(紅綃)를 쓴다. 상(裳)은 황초(黃綃)를 쓴다. 군(裙)은 동과 북은 홍단(紅段), 서와 남은 흑단(黑段), 중앙은 남단(藍段)을

한삼(汗衫)주6은 오방이 모두 백초(白綃)를 쓴다. 대(帶)는 홍정(紅鞓)을 쓴다. 혜(鞋)는 오방이 모두 백피(白皮)로 만들고 끈을 단다. 처용무는 일명 오방처용무라고도 이르며, 오방을 상징하는 동 · 남 · 중앙 · 서 · 북의 다섯 처용의 군무(群舞)이다.

춤은 처음에 처용 5인이 두 팔을 허리에 붙이고 청 · 홍 · 황 · 흑 · 백의 차례로 「수제천(壽齊天)」(빗가락 정읍)을 아뢴 다음 들어와 좌로 돌아 북향한다. 처용 5인이 모두 두 소매를 들었다가 다시 어깨 위에 걸쳐놓고 허리를 구부려 마주본다(무릎디피춤). 다시 발을 들고 소매를 들어 안으로 낀다(도돔춤). 그 다음 내디디며(발바딧춤) 중앙에서 북향한다.

각기 무진무퇴(舞進舞退)하여 각 방향에 선다(발바딧작대무). 다시 무릎디피춤을 추고 5인이 가지런히 선 다음 무퇴하여 북향하고 노래를 한다. 끝날 때에는 4분의 6박자 한 장단인 잔도들이[細還入]의 반주와 그 장단에 따라 낙화유수(落花流水)의 춤사위, 즉 두 팔을 양쪽 어깨로 들었다가 뿌리는 동작을 하면서 한 사람씩 퇴장한다.

처용무는 1971년 1월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2014년 예능보유자로는 김용(金龍) · 김중섭(金重燮)이 있다. 2009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삼국유사(三國遺事)』
『악학궤범(樂學軌範)』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고종 계사)
『교방가요(敎坊歌謠)』
『한국전통무용연구』(장사훈, 일지사, 1977)
주석
주1

궁중의 연희 때와 세모(歲暮)에 역귀를 쫓는 의식 뒤에 추던 향악의 춤. 파랑ㆍ노랑ㆍ빨강ㆍ하양ㆍ검정의 옷을 입은 다섯 무동이 각기 처용의 탈을 쓰고 다섯 방위로 벌여 서서 여러 장면으로 바꾸어 가며 춤을 추는데, 그 사이에 처용가와 봉황음을 부른다. 국가 무형 문화재 정식 명칭은 ‘처용무’이다.    우리말샘

주2

음력으로 그달의 마지막 날.    우리말샘

주3

모시풀 껍질의 섬유로 짠 피륙. 베보다 곱고 빛깔이 희며 여름 옷감으로 많이 쓰인다.    우리말샘

주4

옻칠을 한 헝겊.    우리말샘

주5

조선 시대에 처용무의 복식에 사용하는 긴 천. 신라 여자 복식의 대(帶)와 비슷한 것으로 홍초로 안팎을 하고 양 끝에 녹색 비단을 잇대어 단다. 양 끝은 제비부리 모양이며, 세 개의 노란 구슬이 달려 있다.    우리말샘

주6

손을 가리기 위하여서 두루마기, 소창옷, 여자의 저고리 따위의 윗옷 소매 끝에 흰 헝겊으로 길게 덧대는 소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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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장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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