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자 ()

청자 사자형뚜껑 향로
청자 사자형뚜껑 향로
공예
개념
철분이 조금 섞인 백토로 만든 형태 위에 철분이 1∼3% 정도 들어 있는 장석질 유약을 입혀 1,250∼1,300℃ 정도에서 환원염으로 구워낸 자기.
정의
철분이 조금 섞인 백토로 만든 형태 위에 철분이 1∼3% 정도 들어 있는 장석질 유약을 입혀 1,250∼1,300℃ 정도에서 환원염으로 구워낸 자기.
개설

이 때 유약의 색은 초록이 섞인 푸른색으로 비취색(翡翠色)과 흡사하고 투명에 가까우며 태토(胎土)의 색은 흐린 회색이기 때문에 청자의 색은 회색이 바탕이 된 녹청색이 되며 고려사람들은 이를 비색(翡色)이라 하였다.

청자의 태토와 유약은 청자를 만든 나라와 지방, 그것을 만든 시대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고 굽는 방법도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여기에 따라서도 태토와 유약의 색이 조금씩 다르다.

우리 나라 청자도 신라·고려시대에는 앞에 설명한 것과 같으나 조선시대에는 태토가 백색인 백태(白胎)청자도 있다. 중국의 경우에는 월주요청자(越州窯靑磁), 북송(北宋)의 여관요청자(汝官窯靑磁), 남송(南宋)의 관요청자(官窯靑磁), 용천요청자(龍泉窯靑磁)와 북방청자라 불리는 요주청자(耀州靑磁), 임여요청자(臨汝窯靑磁)가 모두 조금씩 다르며, 같은 용천요청자와 남송 관요청자 중에서도 조금씩 차이가 있다.

우리 나라 청자와 흡사한 중국청자는 월주요와 여관요청자인데 월주청자는 유약의 투명도가 약하고 갈색을 약간 머금은 올리브그린(olive green)색을 띠며 여관요청자도 유약의 투명도가 낮다. 남송 관요청자는 유약과 태토가 우리 청자와 비슷한 것도 있으나 태토가 흑색이며 청자색은 아주 흐리고 유약이 두껍고 불투명한 것이 있다.

용천청자는 유약이 두껍고 불투명하며 청자색이 아주 진한데 태토가 백색인 백태청자도 있다. 요주·임여요 청자계통은 유약이 갈색을 머금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주로 태토와 유약 속에 섞여 있는 철분의 함유량과 환원염이냐 산화염이냐에 따라 나타난다.

최성기 우리 나라 청자는 환원번조로 고운 비취빛의 아름다운 비색 청자이지만 불길이 잘못되어(산화염) 황색이나 갈색을 머금고 있는 것이 있으며, 같은 그릇인데 어느 부위는 비취색이고 다른 부위는 갈색을 머금은 예도 상당량에 달한다.

중국 만당(晩唐)·오대(五代)의 월주청자와 북송 여관요청자, 남송 관요청자·용천요청자도 어떠한 일정한 시기 중에서 제한된 수량만이 명품이고, 모두가 비색(翡色)의 아름다움을 지닌 청자는 아니다. 그 시대가 지향하는 가장 이상적인 아름다운 청자는 최고의 정점에 도달한 일정한 시기와 특정한 지역에서만 가능할 수 있다.

청자의 발생

회유토기와 중국청자의 발생

청자는 토기에서 발전한 것이다. 토기가 발전하여 고화도환원번조(高火度還元燔造)의 석기(炻器) 단계에 이르면 가마에서 자연히 생겨나는 재티가 고온의 토기 표면에 내려앉아 태토에 들어 있는 규사질(硅砂質)과 합하여져 녹아붙어 자연유가 되는데 이런 경우 재티를 많이 날게 하여 인위적으로 자연유를 입히기도 한다.

이러한 자연유의 성분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것을 잿물 또는 회유(灰釉)라 한다. 이 잿물을 토기 표면에 바르고 고온으로 구워내면 회유토기(灰釉土器, 또는 灰釉炻器)가 되고 이 회유토기가 청자발생의 시초이다.

중국 회유토기의 시원은 은대(殷代)이며,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부터 연유(鉛釉)가 발달하였지만 동양에서 유약의 기본은 회유였다. 이 회유는 한대(漢代)에 들어오면서 전 시대보다 유약 표면이 매끄럽게 되는데, 이러한 단계를 시원적 또는 초기적 청자라고 할 수 있다.

육조시대(六朝時代)에는 태토도 점차 양질이 되고 유약도 장석유(長石釉)에 가깝게 발전하여 질적으로 청자에 한 발 다가서게 되고 당대(唐代)에 이르러 청자가 세련되기 시작하여 만당·오대에는 질적으로 완벽한 청자가 되었다.

화남(華南)과 화북(華北)지방에서 다 같이 청자를 만들었지만, 화북지방의 것은 조질(粗質)이었으며, 오대까지 중국청자를 대표하는 것은 양쯔강 남쪽 하류에서 널리 생산되던 청자 중에서도 저장성(浙江省) 동북쪽 상린호반(上林湖畔) 일대를 중심으로 널리 퍼져 있던 가마에서 만들어낸 월주청자였다.

이 밖의 중국청자는 이른바 북방청자라고도 불리는 요주요 계통의 청자와 북송 여관요청자(河南省 寶豊縣 淸凉寺), 남송 용천청자·관요청자 등이다. 이 중에서도 중국 도자사상 가장 높이 평가되는 것은 11세기 말∼12세기 초 북송대에 만들어진 여관요청자이며, 남송대의 관요와 용천요의 명품도 높이 평가된다.

시유토기와 우리 나라 청자의 발생

우리 나라는 삼국시대에 고화도로 환원번조한 토기를 만들었다. 삼국토기 중에서도 신라·가야토기는 질적으로 가장 우수한 것이어서 1,200℃ 이상이나 올라가는 고화도환원번조로 표면색은 회청흑색이고 무쇠같이 단단한 것이었다. 삼국시대의 토기를 거쳐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토기에서 자기로 이행되는 기반이 확립되었다.

통일신라시대 토기는 부장용(副葬用)보다는 주로 실생활용으로 안정된 것이었다. 이때는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토기 표면에 유약을 입힌 연유계(鉛釉系)인 녹유토기(錄釉土器)와 갈유토기(褐釉土器)가 발달하여 세련되고, 8세기경부터는 회유토기가 발달하여 시유토기(施釉土器)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고 있어서, 토기에서 자기로 이행되는 기반이 확립되었다.

자기에 대한 지식은 삼국시대부터 중국 육조청자(六朝靑磁)의 유입이 상당량에 달하고 있고(일부 백자·흑유자의 유입도 있음.), 8세기부터 성당(盛唐)의 도자기가 들어왔으며, 특히 9세기경부터는 월주지방의 만당도자기(주로 청자와 일부 다른 지방 백자)와 그 기술이 해로(海路)를 통하여 활발하게 우리나라 서해안과 일부 남해안에 많이 유입되어 초기 청자인 이른바 일훈문굽계청자(日暈文─系靑磁 : 햇무리굽청자)와 소량이지만 백자도 만들기에 이르렀으며 뒤이어 녹청자(綠靑磁)도 만들었다.

중국 저장성 월주청자의 영향으로 생산하기 시작한 이 청자는 9세기 후반경부터 비롯되어 10세기까지 계속되었다고 생각되며, 일훈문굽계 청자요지는 주로 경주지방과는 멀리 떨어지고 중국과 가까운 우리 나라 서해안과 남해안 일대에 분포되어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곳만 하여도 8, 9개소에 이르고 있으며, 그중에서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용운리와 계율리 일대에 집중적으로 많이 분포되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첫째, 통일신라 말기가 되면 수도인 경주의 왕권이 약화되고 지방호족들의 세력은 확장되기 때문이다. 둘째, 그 대표적 호족세력인 장보고(張保皐) 등에 의한 중국과의 해상무역을 통하여 서남해안지역이 중국 도자문화의 영향을 가장 일찍 받게 되었다.

또한 풍부한 이 지역 물산과 함께 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 등으로 이 지방의 사회·문화·경제적 요건이 경주 등 타지역보다 앞섰다. 따라서 새로운 도자기문화에 대한 이해와 수용태세가 갖추어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9세기 전반 동북아 해상무역의 왕자였던 장보고 등의 해상활동에 의하여 중국청자(백자·흑유자도 포함)가 수입되고 청자번조기술이 도입·전파됨으로써 이 일대는 이미 토기를 사용하는 생활문화권에서 벗어나 자기를 사용하는 문화권으로 진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 서남해안의 가마에서는 석기에서 청자로 이행되는 초기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환원번조가 잘되고 갑발(匣鉢 : 도자기를 구울 때 재티 등이 자기 표면에 내려앉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도자기를 넣는 개비)을 사용한 본격적인 청자를 번조하기 시작하였고, 일부 백자와 흑유자도 번조하였다.

그 뒤 강진과 부안은 중앙인 개경과 연결되어 관요로 이어져서 이곳 가마가 집중적으로 운영되어 발전하게 되고, 중국 남북방요의 영향을 체계있게 정리, 이용함으로써 더욱 발전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초기 청자와 녹청자

햇무리굽청자는 양질이었기 때문에 생산비가 높아서 그 소비계층도 지방호족 등 부유한 계층이나 상류계층이었을 것이다. 9세기 무렵 햇무리굽 양질 청자의 수요가 늘어나자 서남해안 일대에는 수많은 가마가 생겼다.

이제까지 발견된 가마만 보아도 북쪽으로부터 황해도 송화군 운유면 주촌리와 봉천군 원산리,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흥동,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용인시 이동면 서리, 전라북도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 고창군 아산면 용계리, 강진군 대구면 일대와 칠량면,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 등 널리 분포되어 있다. 이들 가마는 규모가 방대하고 모두 갑발을 사용하여 값이 비싼 양질의 청자를 생산하려고 노력한 가마들이다.

청자문화가 이같이 급속히 퍼져나가게 되자 자연히 질이 떨어지는 조질의 값싼 청자가 역시 서남해안 일대에서 생산되어 일반 백성들의 수요에 충당하게 되었다. 이 조질청자는 태토에 모래 등 잡물이 섞이고 번조한 뒤에도 기공(氣孔)이 많은 등 치밀하지 못하고, 유약도 회유와 흡사하여 그 색이 녹갈색을 머금고 있으며 유면(釉面)도 고르지 못하다.

이러한 청자를 녹청자라고 하는데, 이 녹청자요지는 인천광역시 서구 경서동, 충청남도 서산시 성연면 오사리, 보령시 천북면 사호리, 전라남도 함평군 손불면 양재리, 영광군 염산면 오동리, 해남군 산이면 일대 등지에 있으며, 해남군 산이면에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만도 50개가 넘어 이 시기 청자문화의 급속한 발달을 엿볼 수 있다.

녹청자의 발생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현재로서는 햇무리굽청자가 발달, 보급되는 시점에서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보다 앞서 신라 회유토기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도 있으나 아직까지는 더 확실한 자료가 없다.

고려청자의 발달 및 쇠퇴

시대구분과 각 시대 개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미 통일신라 말기에 청자를 만들고 일부 백자와 흑유자도 만들기 시작하였으나, 고려에 와서 청자는 더욱 많이 만들어지고 발전, 세련되어 고려청자의 이름이 높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시기를 구분하여 고려청자를 살펴보고자 한다.

전기 : 고려 초기에 강진의 햇무리굽청자가마는 점차 확산되었으나 다른 지방의 햇무리굽청자가마는 점차 없어지거나 지방의 조질청자가마가 되고 녹청자가마도 생겨나게 된다.

강진가마에서는 청자의 질과 형태와 문양이 안정되고, 중국의 제반 양식과 번조수법이 고려적으로 변모해 나가 16대 예종연간까지는 그 질과 양식에서 중국적인 것을 거의 청산한 단계에 이른다. 그러므로 고려초에서 16대 예종(1122)까지를 전기로 한다.

중기 : 17대 인종 때부터 고려자기가 고려적으로 아름답게 세련되어 독창적 기형과 독특한 비색청자를 완성하고, 18대 의종 때에는 상감기법과 문양구성이 가장 뛰어났으며, 청자·청자상감(靑磁象嵌)·철채(鐵彩)·동화(銅畫)·동채(銅彩, 또는 辰彩)·연리문(練理文)·철채상감·화금자기(畫金磁器) 등 다종다양한 청자가 만들어졌고 청자기와도 만들었다.

인종대에 이미 귀족간의 알력이 심화되어 의종 때 무신의 난이 일어났는데, 무신이 집권한 시대의 고려자기는 질과 양식이 퇴보하였지만 고려자기의 모습에 커다란 변화는 없었다. 그러나 몽고군이 침입하면서부터 급격히 퇴보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1123년(인종 1)부터 몽고가 대군으로 침입하기 직전인 1230년(고종 17)까지를 중기로 한다.

후기 : 몽고 침입 이후에 원종대와 충렬왕 초까지 소수의 상품(上品)을 제외하고는 고려자기가 많이 퇴보하였으나 중기의 모습은 아직 남아 있고 충렬왕대부터 화금과 진사설채가 다시 나타나며 새로운 기형과 문양이 생기고 청자의 질이 좋아지는 등 일시적 성황을 보이다가 다시 퇴보하는 고려말까지를 후기로 한다.

전기(발전기)

9, 10세기는 청자가 발생하고 백자도 일부 만들어 그 질이 자질(磁質)로서 완성되는 시기이다. 이때의 청자와 백자는 현대에서 말하는 완전한 자기는 아니며 완전한 자기로 발전하는 과정이다. 이 때 청자·백자 이외에 흑유자도 일부 특수한 지역 (전라남도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에서 약간 만들었으며, 점차 고려도자기가 다양화되는 시기였다.

청자에는 청자의 기면(器面)을 파내어 상대적으로 파내지 않은 면이 두드러지게 보이는 대담하고 크게 나타낸 이형연판무늬가 등장하고, 오목새김문양(거친 국당초문 등)과 철화문(鐵畫文) 및 퇴화문(堆花文)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11세기 말∼12세기 초에는 중국의 산시성(陜西省) 요주요, 광저우(廣州) 서촌요·정요·자주요·수무요 등과도 교류가 있어 음각(오목새김)·양각(돋을새김)·양인각(압출양각)문과 철화문·퇴화문이 발전하는 등, 청자의 종류도 다양해지고 기형·문양·번조수법 등이 고려적으로 세련되어 갔다.

강진의 가마는 점차 확대되어 대구면의 용운리·계율리 일부, 사당리와 칠량면 삼흥리 일대에서 사당리 전면과 수동리 일대로 확산된다. 그리고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과 진서면 일대에도 청자가마가 생기고, 그 뒤 가마도 관요형태의 대규모의 청자요로 발전하였다.

중기(성기)

청자의 세련

12세기 전반기는 고려청자 중에서도 순청자가 가장 세련되는 시기였다. 청자의 색은 처음부터 환원번조로 시작되었으며, 이미 11세기에는 완벽한 환원번조로 독특한 청자색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12세기 전반기는 그 절정기로서 이 때 청자의 모습은 17대 인종왕릉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청자과형화병(靑磁瓜形花甁) 등 일괄유물로 대표된다.

1123년(인종 1) 북송 휘종의 사행의 일원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이 ≪고려도경 高麗圖經≫에서 “근년 이래 제작이 공교(工巧)하며 색택(色澤)이 더욱 아름답다.”라고 한 것이나, 북송말경으로 생각되는 태평노인(太平老人)의 기록인 ≪수중금 袖中錦≫에 “고려청자의 비색이 천하제일”이라고 지적한 바와 같이 반실투성(半失透性)의 빙렬(氷裂)이 거의 없는 우수한 비색 유약을 완성하였다(1차비색 완성).

비색 유약의 완성과 더불어 기형·문양·번조수법 등에 남아 있던 중국의 영향이 거의 사라지고 자연에서 소재를 얻은 독창적인 형태와 문양이 고려적으로 변형, 발전되며 독특한 세련을 보인다.

이와 같은 청자의 세련은 12세기 중엽까지는 또 다른 의미의 진전을 보여 유약은 반실투성에서 조금씩 더 밝아지고(2차비색 완성), 새롭게 구상된 음각·양각·투각문양 등이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이러한 발전은 ≪고려사≫ 세가 의종 11년(1157)조에 보이는 청자와(靑磁瓦)의 기록과,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당전마을에 산재한 청자와편(靑磁瓦片)을 반출하는 요지에서 증명이 된다.

이 당전마을의 청자와편을 반출하는 요지에서 출토되는 파편의 유약은 인종릉에서 출토되는 일괄유물인 1차비색 완성기(12세기 전반)의 것보다 유색이 조금 더 밝아졌으며 기형과 문양이 고려적으로 좀더 완숙한 상태를 보여 주고 있다.

또 획기적인 시문방법으로 고려자기에 상감기법으로 문양을 나타내는 새로운 기법이 등장하였다. 상감 완성과 때를 맞추어 상감을 여러 가지로 응용한 것, 또는 상감기법 외의 다른 여러 방법으로 문양을 나타내는 기법(철채상감·철채백퇴화·철유·철유상감·철유백퇴화문 등)이 싹텄을 뿐 아니라 이러한 여러 가지 기법이 완숙한 상태에 도달하였다.

1159년(의종 13)에 죽은 문공유(文公裕)의 지석(誌石)과 함께 출토된 청자상감보상당초문완(靑磁象嵌寶相唐草文盌)은 유약이 맑고 투명하며, 상감의 기법과 문양의 포치(布置) 등이 매우 발달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문공유묘 출토 대접을 만든 시기는 유약·기형·문양과 문양의 포치·번조수법 등이 가장 아름답고, 고려자기의 기준이 되는 그릇들을 만든 때였다.

청자유약은 기포가 적고 비색이 밝아져서 문양이 잘 보이게 되고 빙렬이 있는 것이 많아진다. 기형은 선이 더욱 유려해지면서도 유연하여 그 시대양식을 확실하게 지니게 된다.

문양은 사실적 문양을 약간 도식화(圖式化)하고 양식화(樣式化)하였지만, 자연의 향기를 지녔으며, 그 시대양식을 분명하게 확립하고 있고, 부위마다 적합한 문양을 개발하였다.

대접의 경우 각 문양의 포치·구성은 먼저 주문양(主文樣)과 종속문양(從屬文樣)이 있어 그릇의 넓은 중앙·중심부위에 주문양을 배치하고 구연부(口緣部)나 안쪽바닥 굽언저리 등 주문양 상하에 종속문양을 배치한다. 주문양은 사실적인 것에서 출발하여 공예의장의 성격으로 양식화되지만, 회화적이고 여백을 많이 살려 자연이 지니는 맛을 잃지 않는다.

종속문양은 동일 패턴이 반복되는 공예의장이지만, 주문양에 비하여 매우 좁은 공간에 시문되어 주문양의 상하여백을 마무리해 주고 안정감을 주는 구실을 하여, 전반적인 문양은 회화성을 갖춘 공예의장이나 그릇과 일체가 되어 상호 보완하는 입장에 있다.

이 시대는 문화적으로 매우 세련된 시기여서 비색·기형·문양뿐 아니라 그릇의 굽다리를 어떻게 깎느냐, 또 구울 때 굽다리에 어떻게 하여 눈 자국이 작게 남느냐 하는 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예의 검토, 실험되고 있다.

따라서 굽다리는 대체로 작게 하고, 매병류 등의 큰 그릇은 안다리굽이 많고, 보통 병류나 주전자 등의 그릇은 굽이 조그마하고 낮으며 큰 것은 내화토(耐火土) 모래비짐눈으로 번조하고, 일반 그릇(작은 것)은 규사(硅砂)눈을 받쳐 구워 굽이 작고 예쁘며 규사눈 자국이 작고 희게 보여 그릇의 바닥까지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제작하고 있음을 본다.

자기 자체를 정교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물론 청자(백자도 같음)의 비색을 더욱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이미 9세기부터 사용하던 갑(匣·匣鉢 : 개비)을 발전시켜 갑발의 내화도를 훨씬 높여 갑이 일그러지는 것 등을 방지하고 갑도 만드는 등 크게 발전하였다.

상감문양의 발생과 발달

12세기 전반 상감 발생기의 청자요지(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당전마을의 청자기와를 반출하는 요지)에서의 상감문양은 기명(器皿)의 일부에만 사실적인 문양으로 나타나며, 상감이 시문된 위치는 11세기 후반경이나 12세기초경의 기명에 음·양각으로 시문하던 자리의 일부 또는 전면에 나타난다. 이 경우 내외면 중 일면시문으로 문양도 음·양각문과 흡사하다.

이러한 초기 상감상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12세기 중엽인 상감 최성기에 이른다. 처음의 상감문양은 기명의 내측이나, 외측의 일부에 나타나다가 점차 전면에 나타나며 좀더 발전되면 내외면에까지 시문이 확대된다.

문양은 상감 발생 초기의 사실적인 문양에서 도식화되기 시작한다. 그릇의 면을 분할하여 구도를 잡아 주문과 종속문을 구분, 시문하여 상감되는 부위에 따라 새롭게 고안된 여러 가지 문양이 적절히 포치되어, 하나의 일정하고 통일된 구성과 조화를 이루게 된다.

문공유의 묘에서 출토된 청자상감보상당초문완은 바로 상감 최성기의 작품으로, 이러한 완숙한 경지까지 도달하려면 상감 발생기로부터 상당한 시일이 경과하였을 것이며, 따라서 상감의 발생시기는 12세기 전반인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상감발생기는 상감이 여러 가마에서 고안되어 일반화되는 처음 시기를 말하는 것이며, 특수한 지역 또는 특정한 기형에 예외적 또는 우발적으로 상감이 시문된 예는 12세기 초는 물론이고 11세기 또는 10세기에도 가능할 수 있다.

실제로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서리 백자·청자가마 발굴 때 10세기를 내려오지 않는 층위에서 서툴지만 특이한 상감을 한 파편이 발견되었고, 전라남도 함평군 손불면 양재리에서도 10세기경 청자가마에서 흑상감 파편이 발견되었다. 그 밖에 11세기로 추정되는 청자에 상감이 들어간 예는 여러 가지가 있다.

기타 청자문양

상감기법과 문양이 가장 세련된 12세기 중엽에는 상감기법 이외에 10세기경부터 나타난 화청자·퇴화문청자와 그 밖에 철채·철채백퇴화·철채백상감·화금청자·청자동화〔銅畫=辰砂〕설채·연리문〔絞胎〕자기 등이 함께 화려한 꽃을 피우고 있다.

특히 산화동 안료로 환원번조상태에서 선홍의 발색을 성공시킨 진사설채는 중국보다도 2세기 이상 앞서 세계에서 가장 먼저 사용하였지만, 절대로 붉은색을 자기 표면에 남용하지 않았다.

후기(쇠퇴기)

무신집권 이후 점차 그 폐단이 쌓이더니, 13세기 초부터는 고려자기에도 변화를 보여 기형이 조금 둔해지고 굽도 조금씩 커지고 밝은 유약의 비색이 조금 어두워지면서 문양도 조금씩 퇴보해 가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은 몽고의 침입으로 가속화되어 원종대와 충렬왕 초에 매우 타락한 청자로 전락된다.

이 때의 상황을 알아볼 수 있는 자료는 1269년(원종 10)부터 1287년(충렬왕 13) 사이에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는 간기(干記 : 己巳·庚午·壬申·癸酉·甲戊·壬午·丁亥)가 들어 있는 청자상감 그릇들이다.

이들 청자기명들은 암녹색이 비낀 흐린 유약과 뿌연 빛, 둔해진 곡선의 그릇으로 문양도 12세기 이래의 상감문양이 계속되고, 일부 새로운 당초계 문양도 나타나고 있지만 퇴화된 상태로 거칠고 생략되었으며, 굽도 둔하고 모래받침이 조금씩 나타난다.

≪고려사≫ 세가 충렬왕조와 ≪고려사≫ 열전 조인규전에는 고려에서 원나라 세조에게 화금청자(畫金靑磁)를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화금청자는 12세기 전반부터 극소수 만들어졌다고 생각되는데, 양식적으로 보아 충렬왕 때에 만들어졌다고 생각되는 것(청자상감화금원숭이토끼당초문편호·청자상감화금당초모란문대접)을 통하여 상감청자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충렬왕 즉위 중반 이후에 일시적인 안정으로 청자의 유약이 약간 불투명하지만 비색유약이 그전보다 아름다워졌고, 문양도 그 이전부터 시문하던 문양과 새로운 문양이 등장한다. 그전부터 사용하던 문양은 원형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상태였으며, 새로운 문양은 사실적으로 안정되었다.

주문양에 조그만 이파리가 많이 달린 새로운 당초문과 봉황문·용문양이 간혹 보이며 학의 몸에 봉황의 꼬리가 달린 기형이 나타나기도 하며, 종속문양이 여러 단으로 구성되기도 하며, 기형에도 양면을 두드려 편평하게 만든 항아리〔扁壺〕 등이 새롭게 등장한다.

이러한 변화는 충렬왕대부터 원나라를 통한 중동지방과 서방문화의 유입으로 일부 기형과 문양·번조수법 등에 조금씩의 변화를 보인 것 중 일부분이다. 그 밖에 번조 때에도 변화가 있어 상품은 환원번조하였으나 하품에는 산화번조가 있으며, 시대가 내려올수록 점차 환원이 보장되지 않아 청자의 색에 황색과 갈색을 머금게 되었다.

충렬왕·충선왕 이후 잠시의 안정이 다시 끊어지고 사회가 불안해져서 14세기 초를 조금 지나서부터는 주로 청자상감과 순청자기류만이 생산되었고, 14세기 중엽부터 질과 기형·문양·번조수법이 극도로 타락하고 퇴보된 상태에 이르렀다. 공민왕 때 상품청자가 일시 그 질이 향상되었으나 다시 타락하며, 이러한 타락한 상태가 조선왕조로 넘어와 분청사기의 모체가 된다.

고려청자의 특색

우리 나라 청자는 12세기 전반에 비색 순청자로서 유례가 없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나타냈고, 12세기 중엽 유약을 맑고 밝게 발전시켜 청자상감으로서 다시 한번 꽃을 피웠다.

고려자기 중에서는 청자가 특히 세련되고 많이 생산되었다. 토기에서 청자로의 발전이행은 인류문화 발전의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으나, 고려시대의 청자는 그 자연과 시대적 배경에 힘입어 더욱 많이 생산되고 가장 세련되었다.

중국청자가 색이 진하고 유약이 불투명하며 예리하면서 장중한 데 비하여 고려청자는 은은하면서 맑고 명랑한 비색, 유려한 선의 흐름과 탄력이 있고 생동감 있는 형태, 조각도의 힘찬 선, 기물과 일체가 된 회화적이며 시적인 운치가 있는 상감문양 등에 특색이 있으며 또한 세계에서 최초로 자기에 붉은색을 내는 구리의 발색기법을 창안해냈으면서도 한두 점 악센트로만 강한 색 [銅彩發色] 을 쓰면서 모든 색을 담담하게 구사하는 등 언제나 자연과 같이 호흡하고 일체가 되고자 하는 것이 그 특색이다.

조선청자

고려 말의 타락한 청자는 조선조로 들어오면서 큰 줄기는 분청사기로 이행되고 다른 한 줄기는 조선청자로 그 맥락이 이어진다. 고려청자를 계승한 조선 초기 청자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고려 말 퇴락한 재래의 청자를 계승하였으나 그 질과 기형·문양 등이 조선조의 특질을 조금씩 나타내면서 발전하는 청자이고, 또 하나는 새로운 백자가마에서 새로 만들어내는 청자이다.

재래식 청자는 고려청자의 퇴락한 상태의 말기적 조질청자에서 약간 발전, 변형되어 질이 향상되고 기형에 생동감이 있으며 문양이 활달해져 초기 분청사기상감과 기형·문양이 거의 같다.

새로운 청자는 백자가마에서 같이 생산되며 백자태토에 청자유약을 입혔고, 기형도 고려청자 기형에서 발달한 것이 아니고 새로운 백자와 거의 같고 음각문양이 있는 것도 있다.

광주 중앙관요 중에 조선 전기의 초기가마는 광주군 퇴촌면 우산리와 도마리, 중부면 번천리·오전리, 초월면 무갑리 등에 있으며, 전기의 중엽가마는 퇴촌면 정지리와 관음리 등에 있고, 전기의 말엽가마는 광주읍 탄벌리, 도척면 상림리, 초월면 선동리 등에 있다.

조선청자는 15세기 중엽까지는 두가지 계통 모두 질이 양호하고 기형과 문양이 생동감 있고 활달하였으나 15세기 후반부터 고려청자를 계승한 청자는 자취를 감추고 새로운 조선조 청자만이 백자가마에서 소량 생산되었으며 17세기 중엽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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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정양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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