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교 ()

개신교
단체
개신교의 한 교파.
단체
설립 시기
영국: 1609년, 한국: 1889년
설립자
영국: 존 스마이스, 한국: 말콤 펜윅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침례교는 『신약성서(新約聖書)』를 신앙의 본보기와 최고 권위로 삼는 개신교의 한 교파로, 17세기 영국 국교회(英國國敎會)의 박해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위해 유럽 대륙으로 망명했던 청교도(淸敎徒) 분리주의자들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영국의 복음주의적 부흥운동과 미국의 대각성 운동(大覺醒運動)을 거치면서 주류 교단으로 발돋음하였고, 19세기 미국의 남북전쟁(南北戰爭) 전후로 성장한 남침례회는 개신교 중에 단일 교파로 제일 큰 규모를 갖고 있다. 한국의 침례교는 1889년, 캐나다 출신 독립 선교사 말콤 펜윅의 내한으로 시작되었다.

정의
개신교의 한 교파.
개설

침례교(浸禮敎)의 기원에는 첫째로 침례교가 1세기 예수 그리스도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계승설(전승설), 둘째는 16세기 유럽의 성서에 따른 재침례파(Anabaptist)에서 비롯되었다는 재침례파 영적 혈연설이 있다. 그러나 가장 타당한 주장은 영국 분리주의 후예설로, 17세기 영국 국교회의 박해를 피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유럽 대륙으로 망명했던 영국의 청교도 분리주의자 존 스마이스(John Smyth)와 그를 따르던 이들이 1609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최초의 침례교회를 설립한 것이 그 시작이다. 이후 1611년, 존 스마이스와 함께했던 토마스 헬위스(Thomas Helwys)가 일부 침례교인들을 인도하여 영국으로 귀환하여 일반 침례교회를 세웠고, 1638년에 존 스필스베리(John Spilsbury) 등의 청교도들이 영국에 특수 침례교회를 세웠다.

연원 및 변천

영국에서 시작된 침례교는 아르미니우스 사상(Arminianism)을 따르는 일반 침례교회와 칼뱅주의(Calvinism)를 따르는 특수 침례교회로 구분되어 영국 국교회의 박해 속에서 성장하였다. 한편, 유럽의 침례교인 중 일부는 종교의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너온 청교도들과 함께 신대륙 미국에 정착했다. 이들은 17세기의 대각성운동을 거치면서 주류 교단으로 성장하였다. '근대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윌리엄 케리(William Carey)와 ‘설교의 황제’ 찰스 스펄전(Charles H. Spurgeon)의 활약으로 침례교의 영향력은 더욱 확대되었다. 19세기, 미국의 남북 전쟁을 전후로 형성된 미국의 남침례교회는 현재 단일 개신교로는 세계에서 제일 큰 교파이며, 가장 많은 해외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다.

한국의 침례교회는 1889년 12월, 캐나다 소재 한국 연합선교회(Corea Union Mission)에서 파송된 캐나다인 독립 선교사 말콤 펜윅(Malcolm C. Fenwick)의 내한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다른 교단과의 마찰을 피해 대도시가 아닌 오지(奧地)와 간도(間島) 지역을 주요 선교지로 삼아 활동했으나 평신도 선교사의 한계로 1893년에 귀국하였다. 펜윅은 아도니람 고든(Adoniram J. Gordon) 목사가 세운 보스턴 선교사 훈련학교(Boston Missionary Training School)에 수학하면서 한국 선교를 역설했다. 이로 인해 엘라씽 기념 선교회(Ella Thing Memorial Mission)가 설립되었다. 이 선교회를 통해 1895년, 에드워드 폴링(Edward C. Pauling) 목사 부부를 비롯해 5명의 남녀 선교사가 한국에 파송되어 1896년, 충청남도 강경, 공주(公州), 부여(扶餘)의 칠산에 최초로 침례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나 재정난으로 인해 이 선교회는 재차 내한한 펜윅이 인수하였다. 펜윅은 한국인 신자를 앞세운 순회전동활동으로 교회를 부흥시켰다. 이를 토대로 1906년, 충청남도 강경에서 첫 대화회(총회)를 열고 46개 조의 규약을 채택한 후 대한 기독교회(The Church of Christ in Corea)라는 최초의 침례교단을 조직하였다.

일제는 1915년 8월, 포교 규칙을 제정하여 한국 내 모든 종교계에 포교계 제출을 강요했는데, 이때 대한 기독교회는 1916년 대화회의 결의를 통해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따라 감목(총회장)이 투옥되고, 교회도 폐쇄되었다. 3·1운동 이후 포교 허가제가 포교 신고제로 바뀜에 따라 교회의 문이 다시 열렸다.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 이후, 일제는 기독교계에 신사 참배(神社參拜)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이에 김영관 감목은 1935년 10월 5일 자로 발간된 교단지인 「달편지」를 통해 전국 교회에 신사 참배의 부당성을 알리고 이에 불복할 것을 종용하였다. 일제는 탄압의 빌미를 잡고자 1940년, 동아기독교회에 교구서 제출을 통보했다. 이런 와중에 소위 우태호 사건의 발발은 일제 탄압의 빌미가 되어 원산 헌병대에 의해 원산(元山) 총부(總府)가 강제로 수색당하고 이종근 감목이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이후 교단 지도자 32명이 체포 · 구금되었고, 그중에 9명은 예심(豫審)에 회부(回附)되어 재판을 받았다. 1944년 5월 10일에 일제에 비협조적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설을 강조한다는 이유로 함흥 재판소로부터 교단 해체령이 내려졌다.

1945년 8·15광복이 되었으나 침례교가 원산을 중심으로 만주와 시베리아 일대에서 주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회복이 어려웠고, 더욱이 남북 분단으로 많은 타격을 받았다. 게다가 1946년, 감목 체제를 회중 체제로 바꾸고 임원 명칭도 다른 교파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명칭으로 변경하면서 분열이 일어나 10여 개의 교회가 대한 기독교회라는 명칭으로 분립해 나갔다.

1949년, 강경 총회에서 교단명을 대한 기독교 침례회로 변경한 후 미국 남침례회와 전략적 제휴를 맺었다. 1950년대 초반부터 미국 남침례회 선교부의 자금이 유입되면서 총회와 선교부의 정책적 갈등, 타교단 교역자의 무분별한 영입으로 인한 부작용, 총회 내 여러 파벌, 그리고 한국인과 선교사들 간의 갈등이 심화하였다. 결국 1959년에 포항파(대한기독교침례회)와 대전파(기독교대한침례회)로 분열하였다. 1968년, 소장파 목사들의 교단 주권 회복운동의 결실로 극복되어 한국 침례회 연맹이라는 통합 교단이 출범하였다. 그 후 한국 침례회 연맹은 1976년에 교명을 다시 기독교한국침례회(基督敎韓國浸禮會)로 변경하여 오늘에 이른다.

1989년 서울올림픽대회 주 경기장에서 한국 침례교회 선교 100주년 기념대회를 개최했으며, 1990년에 같은 장소에서 제16차 침례교 세계연맹(BWA) 대회를 개최하였다. 2000년에 김장환 목사가 세계 침례교 연맹 총재(總裁)로 취임하였다. 2009년, 울릉도 선교 100주년 기념 대회 및 한국 침례교 선교 120주년 기념 대회를 개최하였다.

특징

1. 성례와 교회론

침례교는 물속에 담그는 침례(浸禮, Baptist)를 행한다. 『신약성서』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다. 또한 모태 신앙(母胎信仰) 또는 모태 교인을 인정하지 않고 유아세례(幼兒洗禮)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자발적인 신앙 고백(信仰告白)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침례교도 다른 개신교 교파들과 마찬가지로 침례식과 주의 만찬(성만찬(聖晩餐))만을 성사(聖事)로 인정한다. 다만 침례교는 상징설(象徵說) 또는 기념설을 채택하여 그리스도가 떡과 포도주에 실제로 임재하는 것이 아니며 떡과 포도주는 단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 또는 기념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침례교는 자발적인 신앙 고백에 의한 침례를 주장할 뿐만 아니라 교회는 반드시 자발적인 신앙을 고백한 신자들로 구성(Believer's Church)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교회는 자발적인 영적 공동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고 굳게 믿는다. 또한 교회가 중생(重生)한 신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기에 침례교는 회중 정체를 취한다.

2. 성서론

침례교는 성경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성경무오설(聖書無誤說)을 지지하며, 특별한 신조나 교리보다 신앙 고백을 더 선호한다. 또한 신자 개개인이 누구나 자신의 양심에 따라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침례교가 개인적인 양심의 자유, 그리고 영혼의 자유와 개인의 책임을 다르게 강조하여 모든 신자가 똑같이 제사장의 지위를 지닌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3. 조직

침례교는 기본적으로 성직자(聖職者)와 평신도(平信徒)가 동등한 권한을 갖는 회중 제도적 형태를 띠는데, 이는 교회에서의 직분을 계급이 아닌 기능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또한 침례교는 지역 교회를 중시하며, 철저하게 개교회주의를 지향한다. 개교회가 모인 지방 연합회, 이들이 모인 총회가 있기는 하지만 이들 3자(지역 교회-지방 연합회-총회)는 수직적인 것이 아닌 상호 협동의 관계이다. 따라서 침례교의 교단 조직은 개교회주의에 입각한 협동적 연합체라고 할 수 있다.

4. 대사회적 관계

침례교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정교 분리(政敎分離))를 강력하게 주장한다. 즉 국가는 특정 교파를 선호해서는 안 되며, 그 어떤 종류의 종교적인 견해에 대해서도 처벌할 권리가 없고, 특정 종교에 대한 지원을 위해 세금을 부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입장을 지니고 있기에 침례교는 역사적으로 다른 교파에 비해 종교의 자유 획득에 일정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 교회 연합운동에 있어서 대체로 복음주의(福音主義) 계열에 속한 교단과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다.

현황

2022년 기준, 기독교 한국 침례회 소속 교회는 3,154개이며, 목사와 전도사를 합한 목회자(牧會者) 수는 5,717명, 재적 교인은 34만 6,518명이다.

기타

또 다른 한국의 침례교 교파로 한국 성서침례교회(聖書浸禮敎會)가 있다. 현재 200여 개의 교회가 이 교파에 소속되어 있고, 이외에 독립적인 침례교회가 한국 내에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의 및 평가

침례교는 타락한 중세 로마 가톨릭에 대항했던 16세기 종교 개혁(宗敎改革, Reformation)의 전통을 충실히 따르면서 동시에 당시 주류적 종교개혁자들의 관료후원적 종교 개혁(Magisterial Reformation)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더욱 철저하게 『신약성서』에 입각한 신앙을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그들의 개혁을 근원적 종교 개혁(Radical Reformation)이라고도 부른다. 이를 통해 볼 때, 침례교는 성서를 소중히 생각하고 있으며, 이러한 전통은 지금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김승진, 『영미한 침례교회사』 (침례신학대학교출판부, 2016)
김용해, 『대한기독교침례회사』 (대한기독교침례회총회, 1964)
역사편찬위원회, 『한국성서침례교회 50년사: 1954-2004』 (한국성서침례교회 전국목회자친교회, 2004)
오지원, 『초기 한국침례교 역사』 (요단출판사, 2019)
오지원, 『한국침례교의 아버지 말콤 펜윅』 (한국기독교총연합, 2023)
이정수, 『한국침례교회사』 (침례회출판사, 1990)
허긴, 『한국침례교회사』 (침례신학대학교출판부, 2000)

인터넷 자료

기독교한국침례회총회(www.koreabaptist.or.kr)
한국침례신학대학교(www.kbtus.ac.kr)
한국성서침례친교회(www.bbfk.org)
성서침례대학원대학교(www.bbts.ac.kr)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오지원(한국성서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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