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득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도승지, 한성부판윤, 판돈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계능(季能)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89년(숙종 15)
사망 연도
1766년(영조 42)
본관
청주(淸州)
주요 관직
형조참판|도승지|한성부판윤|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정의
조선 후기에, 도승지, 한성부판윤, 판돈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계능(季能). 한수원(韓壽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성익(韓聖翼)이고, 아버지는 한배상(韓配商)이며, 어머니는 윤세형(尹世衡)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사마시에 합격한 뒤 1722년(경종 2)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설서를 거쳐, 1726년(영조 2) 정언으로 재임중 붕당의 폐단을 논하는 소를 올려 내심 탕평책(蕩平策)을 실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던 영조로부터 신임을 얻었다.

1728년 지평이 되어 역시 활발한 언론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이듬해 언로의 보장을 요구하는 과격한 소를 올려 삭직되었다가, 다시 정언으로 재서용되었으며, 이후 집의·사간 등 언관직을 두루 역임하였고, 1731년 장릉(長陵)을 옮기는 데 개폐봉관(開閉封官)으로 공이 있어 가자(加資)되었다.

1734년 승지로 전임되었으며, 2년 후인 1736년 영조가 석곶현(石串縣)에 행차하여 친히 금군(禁軍)을 지휘하여 어영군(御營軍)을 공격하는 군사훈련을 실시하던 중 병방승지로서 어명을 잘못 전달하여 파직당하였다.

뒤에 다시 기용되어 대사간과 승지를 번갈아 지내고, 외보(外補)되어 영암군수·영해부사를 역임하였다. 1743년 경직(京職)으로 복귀하여 다시 승지·대사간을 거쳐, 병조·호조의 참판이 되었으며, 1753년 진하 겸 사은부사로 연경(燕京)에 다녀왔고, 다시 형조참판으로 전직되었다가 도승지를 제수받았다.

1760년 한성부판윤으로 옮겼다가 1764년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로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70세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는데 아들인 참판 한광조(韓光肇) 역시 뒷날 기로소에 입사하여 부자기사(父子耆社)로 세인들의 부러움을 샀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청선고(淸選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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