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공산당 북만성위원회 위원,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군장 겸 참모장을 역임. 본명은 허극(許克). 일명 이희산(李熙山)·이삼룡(李三龍). 경북 선산군 구미면(龜尾面) 임은리에서 의병 허필(許苾)의 아들로 태어나 1915년 부모를 따라 만주 요녕성(遼寧省) 통화현(通化縣)으로 이주했다.
1929년 흑룡강성(黑龍江省) 빈현(賓縣) 가판참(枷板站)으로 이주해 사회주의운동에 참가하기 시작했으며, 이때에 김정숙(金正淑)과 결혼하였다. 1930년 초 중국공산당에 입당했고 1930년 5월 '간도 5·30봉기'에 참가했는데, 하얼빈(哈爾濱) 일본영사관 습격을 주도했다가 중국경찰에 체포되어 심양(瀋陽) 감옥에서 1년 남짓 복역했다.
만주사변이 일어난 직후 출옥해 중공 빈현(賓縣) 특별지부 위원이 되었으며, 1932년 1월 중국공산당 만주성위 빈현 특별지부 선전원이 되었다. 1933년 봄 탕원헌(湯原縣)에서 반일유격대 건립을 도왔으며, 10월 주하(珠河) 반일유격대 결성에 참가했다.
1934년 6월 28일 주하유격대를 동북반일유격대 합동지대로 재편성하게 되자 제3단 정치위원에 임명되었으며, 그 해 가을에 제1대대 대대장이 되었다. 1935년 1월 합동유격대가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 제1사로 편성되자 제2단(연대)장이 되었으며, 3월 일본군의 춘기토벌에 대항해 유수하자(柳樹河子) 전투, 소량수하자(小亮水河子) 전투에 참가했다.
1936년 초 인민혁명군 제3군 제3사 징치위원이 되었고, 9월 중국공산당 북만임시성위원회(北滿臨時省委員會) 위원 겸 동북항일연군 제3군 1사 정치부 주임이 되었다. 1937년 2월 동북항일연군 사령부에서 의동지구 여러 군단의 단결과 합동작전을 강화하기 위해 의동판사처(依東辦事處)를 결성하자, 사무처 주임이 되었다.
6월 항일연군 제9군 정치위원이 되었고, 겨울에 항일연군 제9군 제3사 사장으로서 해륜현(海倫縣)·영안현(寧安縣) 등지에서 투쟁을 전개하였다. 1939년 1월 중국공산당 북만성위원회 집행위원 겸 눈해지구대표단(嫩海地區代表團) 부지휘, 용남지휘부(龍南指揮部) 책임을 맡았으며, 동북항일연군 제 3·4지대와 독립 제1·2사를 지휘하였다.
4월 동북항일연군 3로군 총참모장 겸 제3군장에 임명되었다. 1940년 봄 제3로군 제12지대 정치위원이 되었고 9월 풍락진(豊樂進)전투에 참전했다. 1941년 일본의 토벌에 맞서 항일연군 제9·12지대에서 유격활동을 계속했다. 1942년 8월 3일 북만주 경성현(慶城縣)에서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