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 ()

인쇄 / 활자 주조
인쇄 / 활자 주조
출판
개념
활판인쇄를 하기 위하여 찰흙 · 나무 · 쇠붙이 등의 재료를 사용하여 만든, 각종 크기의 모나고 판판한 일면에 특정의 문자와 기호를 볼록새김 하거나 또는 주조한 글자. 주자.
정의
활판인쇄를 하기 위하여 찰흙 · 나무 · 쇠붙이 등의 재료를 사용하여 만든, 각종 크기의 모나고 판판한 일면에 특정의 문자와 기호를 볼록새김 하거나 또는 주조한 글자. 주자.
개설

오늘날의 활자는 모두 네모난 모양으로 만들지만, 옛 활자는 글자면이 모나고 판판하나 그 등을 둥근 모양으로 옴폭 들어가게 한 것이 있는가 하면, 뾰족 나오게 한 것도 있었다. 활자 크기에 있어서도 요즈음의 것은 호수(號數)와 포인트(point)가 있어 그 규격이 일정하지만, 옛 것은 큰자·중간자·작은자의 구분이 있을 뿐 일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요즈음의 활자는 모두 단주활자(單鑄活字)로 되어 있으나, 옛 활자 가운데는 이를테면, 인력자(印曆字)에서 자주 사용하는 합성어나 왜언자(倭諺字)에서 발음자(撥音字)가 붙은 합성어는 연주활자(連鑄活字)로 된 것도 있었다.

활자의 기원

목판인쇄(木版印刷)는 나무를 베어 판목으로 켜 물에 오래 담그거나 쪄서 지방기를 빼 부식하지 않게 하고, 판각하기 쉽도록 결을 삭게 하였다.

그리고 나서 대패질하여 바탕책을 뒤집어 붙이고 하나하나 새겨 찍어내기 때문에 비용과 시간이 너무 많이 소요되었다. 그러면서도 고정된 판의 새김이기 때문에 그 인쇄가 한 문헌으로 국한되는 것이 큰 폐단이었다.

그리하여 한 벌의 활자를 만들어 오래 잘 간직하면서 필요한 책을 수시로 손쉽게 찍어내는 방법, 즉 인쇄공정의 비용과 시간이 경제적이며 간편한 방법이 모색되기 시작하였다. 그 최초의 시도가 북송(北宋)의 필승(畢昇)이 1041∼1048년에 고안해낸 교니활자(膠泥活字)이며, 활자의 초기 지식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하였다.

그 활자는 찰흙으로 부피를 얇게 돈닢처럼 만들어 글자를 새긴 다음 하나씩 떼어 불에 구워냈다. 조판(組版)은 하나의 철판을 마련하여 송진에 종이 태운 재를 섞은 점착성 물질을 붓고 그 위에 철로 만든 인판(印板)을 놓은 뒤 그 안에 활자를 가득차게 배열하고 불에 쬐었다. 그리고 그 점착성 물질이 녹으면 다른 평판으로 활자면을 눌러 판판하게 한 다음 식혀 굳게 하여 책을 찍어냈다.

또 인쇄작업을 신속하게 진행시키기 위하여 두 개의 철 인판을 마련하고, 한 판의 인쇄중 다른 판에는 활자를 배열하여 앞 판의 인쇄가 끝나면 곧 다음 판이 들어갈 수 있도록 번갈아 준비하였다. 한번 활자를 만들어 놓으면 기자(奇字)·벽자(僻字) 등만 새겨 초화(草火)로 구워 보충하면서 필요로 하는 책을 언제라도 간편하게 찍어내려는 착상을 실천으로 옮긴 첫 시도였다.

그러나 점착성 물질의 응고력이 약하여 인쇄 도중에 활자가 자주 떨어지거나 동요가 생겼고, 또한 그 재료가 흙이어서 자주 부서지고 일그러졌기 때문에 실용화되지 못한 발명작으로 그치고 말았다. 그 단점과 실패를 연구하여 고안된 것이 바로 고려의 주자(鑄字)이며, 여기에서 비로소 활자인쇄의 실용화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활자의 종류

필승의 교니활자 이후에 나온 활자로는 금속활자·목활자·도활자(陶活字) 등이 있다.

금속활자

주자를 말하며, 재료에 따라 동활자(銅活字)·철활자(鐵活字)·연활자(鉛活字) 등으로 나뉜다. 그 중 동활자는 놋쇠활자를 말하며, 가장 많이 만들어져 사용되었다. 그 합금의 성분은 구리·아연·주석·납·철 등으로 되어 있으나, 구성비율은 활자마다 달라 각각 차이가 있다.

철활자는 무쇠활자라고도 하며, 관서와 민간에서 각각 몇 종씩 만들어냈다. 그 주된 성분이 철이기 때문에 주조가 사뭇 거친 편이다. 연활자는 주석활자라고도 일컬으며, 우리 나라의 옛 활자로서는 한 번밖에 사용되지 않았다.

우리 나라에서는 주자가 고려 때에 이미 만들어져 책이 인쇄되었다는 사실이 여러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주자가 어느 때 누구의 고안으로 어떻게 주조되었는지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지 않아 해결되지 않은 문제였다.

그러던중 1972년 ‘세계 도서의 해’를 기념하기 위한 책 전시회에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 처음으로 공개됨으로써 그것이 1377년(우왕 3)에 주자인시(鑄字印施)된 것으로 공인을 받았다. 그에 따라 고려 때의 문헌에 나타난 주자인쇄의 기록이 모두 사실적인 것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 뒤 고려의 주자인쇄에 관한 연구가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는데, 그 중 기원설을 다룬 글이 몇 편 발표되었으나, 막연한 추측에 의한 것이거나 용어를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 소장인의 오독(誤讀)으로 인하여 문제의 초점이 빗나간 것 등 그 근거가 불충분한 것들이다.

문헌에 나타난 고려의 주자인쇄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주자판 ≪남명천화상송증도가 南明泉和尙頌證道歌≫의 중조본(重彫本)에 의하면 천도 이전, 즉 개성에서 13세기 전기에 이미 주자인쇄가 실시되었다고 한다.

또 이규보(李奎報)가 최이(崔怡)를 대신하여 지은 <신인상정예문발미 新印詳定禮文跋尾>에 주자인쇄의 사례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상정예문≫의 인출시기는 1234년(고종 21)에서 1241년 사이로 추정 되고 있다.

여말선초의 학자인 정도전(鄭道傳)이 지은 <치서적포시병서 置書籍鋪詩並序>에는 “종전처럼 서적포를 마련하여 주자를 두고 경사자집(經史子集)의 책은 물론 의방(醫方)·병서(兵書)·율서(律書) 등에 이르기까지 고루 찍어내어 학문에 뜻을 둔 이들의 독서와 연구를 널리 권장하여야 한다.”라는 건의가 담겨 있다.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개성의 개인 무덤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㠅’자 한 개가 보존되고 있는데, 고려의 주자인쇄를 실증해 주는 한 자료가 되는 점에서 주목하게 한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금속활자는 크게 발달되어 숱한 종류의 주자가 주조되었다. 1403년(태종 3) 주자소가 새로 설치되어 조선시대 최초의 동활자인 계미자(癸未字)가 주성(鑄成)되었고, 1420년(세종 2) 계미자의 인쇄기술을 개량한 경자자(庚子字)가 주조되었다.

그 뒤 세종은 세번째로 개주(改鑄)하여 갑인자(甲寅字)를 주성하였는데, 이 갑인자에 이르러 활자의 네모를 평평하고 바르게, 그리고 인판도 정교하고 튼튼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밀랍을 전혀 쓰지 않고 대나무로 빈틈을 메워 조립식으로 판을 짜서 인쇄하는 단계로까지 발전되었다. 이에 우리 나라 금속활자 인쇄술이 절정에 이르렀으며, 조선 말기까지 여러 활자의 주조에 원동력이 되었다.

이 갑인자는 글자가 바르고 해정하여 자주 가주(加鑄)와 보주(補鑄), 그리고 개주(改鑄)가 이루어지면서 조선 말기까지 사용되었다. 1499년(연산군 5)에는 ≪성종실록≫을 찍기 위하여 보다 큰 가주 또는 보주를 하였고, 1515년(중종 10)에는 닳고 이지러진 것을 갈기 위한 보주가 이루어졌으며, 완전한 개주는 여섯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선조 13년(1580)에 두번째로 이루어진 것을 경진자(庚辰字), 1618년(광해군 10)에 세번째로 이루어진 것을 무오자(戊午字), 1668년(현종 9)에 네번째로 이루어진 것을 무신자(戊申字), 1772년(영조 48)에 다섯번째로 이루어진 것을 임진자(壬辰字), 1777년(정조 1)에 여섯번째로 이루어진 것을 정유자(丁酉字)로 일컫고 있다.

초주갑인자 이후 1436년(세종 18)에 병진자(丙辰字), 1450년(문종 즉위년)에 경오자(庚午字), 1455년(세조 1)에 을해자(乙亥字), 1457년에 정축자(丁丑字), 1458년에 무인자(戊寅字), 1465년에 을유자(乙酉字), 1484년(성종 15)에 갑진자(甲辰字), 1493년에 계축자(癸丑字), 1516년(중종 11) 병자자(丙子字), 1587년(선조 20)경에 경서자(經書字), 16세기에 인력자(印曆字) 등이 주조되었다.

이와 같이 고도로 발달된 활자주조 시설은 임진왜란으로 말미암아 파괴 또는 소실되고 약탈되어 난(亂) 후 광해군 때의 소규모 주조인 무오자(戊午字)를 제외하고 오랫동안 금속활자는 주조되지 못하고 목활자로 충당되었다.

그러다가 1668년 사주(四鑄) 갑인자인 무신자에 이르러 주자가 다시 부활되었으며, 1677년(숙종 3)에 현종실록자, 숙종 초기에 전기 교서관인서체자(前期校書館印書體字), 그리고 경종 초기에 후기 교서관인서체자가 주성되었다.

한편 숙종 초기 무렵에는 개인까지도 동활자를 주조하였는데, 김석주(金錫胄)가 한구(韓構)로 하여금 자본을 쓰게 하여 만든 한구자가 그 예이다. 그 밖에도 1676년 무렵에 교서관왜언자를 주성하여 일본 어문을 우리말로 음훈(音訓)한 ≪첩해신어 捷解新語≫를 찍어냈다. 1693년에는 원종자(元宗字), 1749년(영조 25) 율곡전서자(栗谷全書字), 1795년(정조 19)에는 정리자(整理字), 1816년(순조 16)에는 전사자(全史字) 등이 주조되어 사용되었다.

그리고 1800년 이전에 민간이 만든 활자로서 정리자체철활자(整理字體鐵活字)가 있는데, 이 활자는 고종 때에 이르기까지 호남지방을 비롯한 서울지방에서 각계각층의 수요서를 찍어내는 데 이용되어 그 인본이 비교적 많이 전해지고 있다. 또 1800년 초기에 민간이 필서체철활자(筆書體鐵活字)를 만들어 이곳 저곳으로 가지고 다니며 족보류를 찍어 주고, 나중에는 선원속보류를 찍어 내는 데 사용하였다.

신연활자(新鉛活字)는 19세기 말기에 등장하였다. 1880년(고종 17) 일본에서 최지혁(崔智爀)의 글씨를 바탕으로 신연활자가 주조되었고, 이 활자가 1883년 일본으로부터 도입되자 동시에 박문국(博文局)이 설치되고 신문·서책 등이 인출되었다. 이와 같이 금속활자는 꾸준히 개량, 발전되어오면서 지배계층뿐만 아니라 서민계층까지 다양한 종류의 활자로 책을 찍어 그들의 계몽과 교육에 이바지한 바 크다.

목활자

우리 나라에서 처음 목활자를 사용하여 책을 찍은 것이 언제인지는 전하는 기록이 없다. 1377년 흥덕사에서 주자로 찍어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을 보면 목활자가 다소 혼용되고 있다.

조선 왕조가 건국되어 1395년(태조 4)에 박아낸 ≪원종공신녹권 原從功臣錄券≫은 목활자로 찍혀졌다. 북한에서 나온 한노개(韓奴介)의 ≪원종공신녹권≫과 남한에서 나온 이원길(李原吉) 및 권수의 파손으로 사급자명(賜給者名)을 잃은 2종의 ≪원종공신녹권≫을 그 실례로 들 수 있다.

또한 1397년에 심지백(沈之伯)에게 내려진 녹권도 목활자로 찍혀졌다. 그리고 1395년에는 백주지사(白州知事) 서찬(徐贊)이 목활자를 만들어 서적원(書籍院)에 바쳤는데, 그 활자를 사용하여 ≪대명률직해 大明律直解≫ 100부를 찍어 반행(頒行)하였다는 기록도 전하고 있다.

목활자의 인쇄술이 정교하게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세종 때였다. 1448년(세종 30)에 인행, 반포한 ≪동국정운 東國正韻≫의 큰자와, 1455년(단종 3) ≪홍무정운역훈 洪武正韻譯訓≫을 인출(印出:인쇄하여 펴냄)할 때 사용한 한자와 한글 큰자는 목활자였다. 이것들은 모두 관서에서 만든 활자이기 때문에 정교하여 인쇄가 아주 깨끗하다.

1495년(연산군 1) 대비들이 성종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원각사(圓覺寺)에서 불경을 대대적으로 간행하고 똑같은 내용의 발문을 목활자로 찍어 개개의 책 끝에 붙였는데, 그 목활자는 참으로 우아 정교하였다.

이듬해에는 한자와 한글의 활자가 더 만들어졌는데, 이를 인경자(印經字)라 부르고 있다. 금속활자로 여길 만큼 정교하며, 그 인본으로는 ≪육조법보단경 六祖法寶壇經≫·≪진언권공 眞言勸供≫ 국역본과 ≪천지명양수륙잡문 天地冥陽水陸雜文≫ 등이 있다. 목활자 인쇄기술의 발달은 여기서 절정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을 겪은 뒤에는 주자인쇄의 기능이 마비되어 전적으로 목활자로 책을 찍어 전국적인 수요를 충당하여야 하였다. 그 기간은 1668년 무신자가 주조되어 주자인쇄가 복구되기까지 70년간이나 계속되었다.

이때 목활자인쇄는 훈련도감이 자급자족의 하나로서 목활자를 만들어 책을 찍어 판 데서 비롯하여 지속되었다. 이들 활자를 훈련도감자라 일컬으며, 글자체는 갑인자체·경오자체·을해자체·갑진자체·병자자체 등으로 구분된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끝나고 세태가 점차로 회복되었던 인조 말기부터는 나라의 인쇄사업이 다시 교서관으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이것 역시 목활자로 인쇄하였다. 임진난 후 교서관이 목활자를 만들어 책을 찍은 것은 숙종 때도 있었으므로 그것과 구별하기 위하여 전기교서관필서체라 일컫고 있다.

임진왜란 뒤에는 그 밖에도 실록자가 나무로 만들어져 역대 실록을 찍어냈고, 공신도감에서도 목활자로 녹권과 회맹록(會盟錄) 등을 찍어냈다.

이와 같이 목활자인쇄가 전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일국의 인서기능이 수행되었지만, 그 기술에 있어서는 제작이 거칠고 인쇄가 깨끗하지 못한 편이었다. 교서관이 숙종 때 만든 후기교서관필서체자, 사역원에서 역학서를 찍기 위하여 1734년에 만든 경서정음자, 1772년에 만든 방홍무정운대자, 1791년에 만든 기영필서체자, 1792년에 만든 생생자, 1797년에 만든 춘추강자, 그리고 1895년에 만든 학부인서체자가 모두 목활자들이다.

이들 활자는 모두 관서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그 솜씨가 정교한 편이다. 그 밖에도 제작처와 연대가 확실하지 않은 것이 적지 않다.

한편 사찰·서원과 같은 사사로운 단체와 개인, 그리고 민간인들도 다양하게 목활자를 만들어 책을 찍어냈다. 서원의 목활자는 16세기에 이루어진 것이 초기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성주의 임고서원(臨皐書院), 서천의 명곡서원(鳴谷書院), 인동의 오산서원(吳山書院)에서 찍어낸 목활자본을 들 수 있다.

그 중 명곡서원에서 1581년(선조 14)에 인행한 ≪표제구해공자가어 標題句解孔子家語≫와 ≪신간소왕사기 新刊素王事記≫에는 권말에 목활자를 새긴 각수(刻手)를 비롯한 인출자·교정자 및 간행사항이 표시되어 있어 크게 참고가 된다.

그리고 옥산서원(玉山書院) 소장의 ≪맹자대문 孟子大文≫ 목활자본에 표시된 인기(印記)에 의하면, 1600년에 경주부에서 여강서원(廬江書院)의 활자를 사용하여 찍어냈음이 밝혀져 있다. 그 밖에 노봉서원(露峯書院)·옥계서원(玉溪書院) 등에서도 목활자로 책을 찍어냈음을 볼 수 있다.

개인이 사사로이 만든 목활자도 여러 종 있는데, 그 중에 정사룡(鄭士龍)의 ≪호음잡고 湖陰雜稿≫가 있다. 새김이 정교하여 인쇄가 깨끗하며, 글자체가 해정한 필서체인 점에서 필서체목활자라 한다. 또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이 활자로 찍은 인본이 이것 뿐인 점에서 호음자라 하기도 한다. 당시 사가 활자인쇄술을 입증해주는 귀중한 인쇄자료이다.

임란 이후 개인이 만든 것으로는 1621년의 문계박자(文繼朴字), 1798년의 성천자(成川字), 19세기 초의 지겟다리획인서체자, 1810년의 장혼자(張混字), 1815년의 금릉취진자(金陵聚珍字) 등이 손꼽혀진다. 그 밖에도 활자명이 붙여지지 않은 많은 목활자들이 민간의 문집·족보류 등의 인쇄에 이용, 18세기를 거쳐 19세기에 더욱 증대되었으며, 20세기 전기인 일제침략시대까지 도처에서 인쇄가 행하여졌다.

가장 성행하였던 곳이 영남과 호남지방이었으며, 그 인쇄 도구가 지금까지 여러 기관과 개인에 의하여 수집, 보관되고 있다. 이들 목활자는 관서의 것에 비하여 새김이 거칠고 인쇄가 조잡한 편이다. 그러나 민간의 인쇄기업으로 성장하여 서민의 독서와 면학의 저변을 확대하는 데 기여한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이와 같이 우리 나라에 있어서 목활자는 주자인쇄와 병행하여 손쉽게 적용하였던 인쇄수단이었고, 임진왜란 후 한동안은 일국의 인서기능을 도맡아 수행하였으며, 18세기 후기 무렵부터 민간의 주요인쇄수단으로 크게 구실하였던 것이다.

도활자

질그릇 만드는 차진 흙을 사용하여 만든 활자를 말한다. 차진 흙으로 활자를 만든 것은 북송 때 필승의 교니활자에서 비롯되었지만 당시 실용화하는 데 실패하고 원나라 초기에 요추(姚樞)가 제자인 양고(楊古)로 하여금 종래의 조판용 점착성 물질을 개량하게 하여 인쇄를 시도하였으나 역시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 뒤 인판을 진흙으로 만들고 차진 흙을 얇게 깐 위에 이미 구운 활자를 배열하여, 다시 가마 속에 넣고 구워 한 조각으로 고착시킨 다음 인쇄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의 인쇄는 활자를 한 번밖에 사용할 수 없으므로 결국 활자인쇄로서는 기능을 상실한 셈이 된 것이었다. 따라서 중국에서 도활자의 인쇄가 실제로 보급된 것은 18세기 이후로 알려져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도활자가 언제 처음으로 만들어져 인쇄되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현재까지 알려진 기록으로는 18세기 초에 도활자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여 중국에서 도활자가 실용화된 시기와 비슷하다. ≪동국후생신록 東國厚生新錄≫ 토주자(土鑄字)의 항목에는 통제사 이재항(李載恒)이 황해도 해주병영에 있을 때 직접 만든 도활자의 제작법이 소개되어 있다.

도활자본의 실례로는 1722년 청해(靑海)의 문회헌(文會軒) 도자계(陶字契)에서 찍은 ≪삼략직해 三略直解≫, 1737년에 찍은 김세렴(金世濂)의 ≪동명집 東溟集≫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도활자의 실물로는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한 성암고서박물관(誠庵古書博物館)과 개인소장에 몇 종이 간직되어 있다. 또 근래에 상주지방에서 발견된 것은 활자 모퉁이에 구멍이 뚫려 있다. 판을 짤 때 철사나 끈으로 꿰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글활자

한글로 쓰여진 책을 찍어 내기 위하여 만든 활자를 말한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1443년(세종 25) 12월에 만들어 1446년 10월에 반포하였는데, 그 반포에 앞서 3월에 왕비 소헌왕후(昭憲王后)가 죽었다. 세종이 그의 명복을 빌고자 왕자 수양대군(首陽大君) 등에게 명하여 석가세존의 일대기를 엮어 정음으로 번역하게 한 것이 ≪석보상절 釋譜詳節≫이고, 그것을 보고 지은 국한문 찬불가(讚佛歌)가 <월인천강지곡>이다.

이 두 책을 찍기 위하여 한문은 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의 큰자와 작은자를 사용하고, 국문은 한글활자의 큰자와 작은자를 만들었다. 그 시기는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수양대군이 ≪석보상절≫에 서문을 쓴 해가 1447년 7월이므로 그 무렵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이를 종래 초주갑인자병용한글자로 일컬어 왔다. 또 만든 목적에 따라 월인석보한글자로 부르기도 한다.

이 두 활자본을 보면, 갑인자가 부드럽게 운필된 필서체(筆書體)라면, 한글활자는 강직한 직선으로 그은 인서체(印書體)이며, 그 중 큰자는 오늘날의 고딕체를 방불케 한다. 그리고 한글활자는 어느 것이든 글자 모양이 균정하고, 특히 둥근 획의 모양이 가지런하며 서로 똑같게 나타나고 있어 동활자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한글활자는 세종이 우리의 글을 제정, 반포하고 바로 주조하여, 우리도 고유의 문자를 소유한 슬기로운 문화민족임을 상징하게 한 최초의 활자가 되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이 두 책의 찬수 국역이 완성된 두 달 뒤인 1447년 9월에는 우리 나라의 한자음을 바로잡기 위하여 ≪동국정운≫을 펴냈다. 이 책을 찍어낸 한자의 큰자는 목활자, 작은자는 갑인자이고, 한글활자의 큰자는 목활자이며 크기가 월인석보한글활자보다 훨씬 크다. 이것 역시 동국정운한글자라 일컫는다. 이 책의 인본이 1448년 11월에 팔도 및 성균관 사부학당에 반사되었으므로 그 이전에 이미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세종은 ≪동국정운≫을 완성하고 다시 한자의 중국음을 정확히 나타내기 위하여 ≪홍무정운역훈≫의 편찬을 명하였다. 그 완성은 문종 때 이루어지고, 인출은 1455년(단종 3)에 이루어졌다. 이 책에서도 한자의 큰자는 목활자, 작은자는 갑인자이고, 한글활자의 큰자는 목활자이다. 이것을 홍무정운한글자라 부른다.

이 활자는 동국정운한글자에 비하여 제조가 거칠어 인쇄가 곱지 않은 편이나, 글자체는 고딕의 인서체에서 필서체로 넘어가는 특징을 보여준다.

한글활자를 동으로 주성하여 국역본을 다량으로 찍어낸 것은 세조 때였다. 세조는 1457년(세조 3) 9월 의경세자(懿敬世子)가 요절하자 명복을 빌기 위하여 불경을 많이 찍어내고 사경(寫經)도 하였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후 불서간행이 계속되었다.

대장경의 다량인출과 ≪월인석보≫의 증보 개판과 같은 거질의 목판인쇄도 있었지만, 특히 활자인쇄가 성행하였다. 그 활자인쇄는 갑인자·을해자·정축자·무인자·을유자에 의하여 고루 이루어졌지만, 주로 1455년에 강희안(姜希顔)의 글씨를 바탕으로 만든 을해자에 의한 것이 많았다.

세조는 불전을 국역하기 위한 예비과정으로 을해자의 큰자·중간자·작은자를 조화있는 체제로 짜서 기본한역불전을 거의 찍어낸 다음, 역시 그런 체제로 국역 초쇄하여 그 번역을 교정하게 하였다. 그리고 역문의 교정이 끝나자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고 그와 같은 체제로 판서본을 정서, 판각 인쇄하여 널리 보급시켰다.

을해자 국역본에서 쓰인 한글활자는 을해년에 주성된 것이 아니고 세조의 불서인쇄가 계속 촉진되었을 때 이루어졌음을 그 인본 외 조사를 통하여 알 수 있으며, 그 시기는 을해자 국역본 ≪능엄경언해 楞嚴經諺解≫를 처음 인쇄할 무렵인 것으로 보인다. 이를 을해자병용한글자 또는 능엄한글자라 한다. 을해자 국역본에 나타나는 한글활자는 작은자들이며, 인서체에서 필서체로 넘어가는 과정의 특징을 보여준다.

세조는 1465년에 원각사를 준공하고 정난종(鄭蘭宗)의 글씨를 자본으로 을유자를 주성하여 ≪원각경 圓覺經≫을 찍어 탑에 봉안하게 하였는데, 이 책의 토씨 인쇄에 쓰인 것이 또한 한글활자이다. 이것을 을유한글자라 한다. 이 자체를 을해자병용한글자와 비교해 볼 때 인서체로 환원한 특징이 역력하게 나타난다.

1495년(연산군 1)에는 성종의 저승천도를 위하여 그의 계비인 정현왕후(貞顯王后)가 원각사에서 대대적으로 인경하고, 각 책에 같은 발문을 붙이기 위하여 목활자를 만들어 다량으로 찍어냈다. 그리고 그 인경에 이어 다음해인 1496년에는 내탕(內帑)으로 목활자를 더 만들어 ≪천지명양수륙잡문≫ 200부를 찍어 냈다.

또 인수대비(仁粹大妃)와 더불어 국어로 번역한 ≪육조법보단경≫의 인출을 위하여 부족한 한자활자는 물론 한글활자를 나무로 만들어 300부 찍어냈으며, 이어 ≪진언권공 眞言勸供≫도 400부 박아냈다. 이때 사용된 한글활자를 인경한글자로 일컫고 있다. 비록 목활자이지만 정성이 깃들여져 그 정교도는 금속활자를 능가할 정도이다.

16세기 후반기인 선조 때에도 새로운 한글활자가 주성되었다. 언제 누구의 글씨체를 바탕으로 주조하였는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이전인 1588년(선조 21)부터 1590년까지 사이에 사서(四書)를 비롯한 ≪효경≫·≪소학≫의 경서 국역본을 찍어 내기 위하여 만든 한자 및 한글 활자이다. 이 한글활자는 중간자와 작은자가 모두 정교한 필서체이며, 그 사용은 오직 선조 초기의 경서 국역본에서만 볼 수 있으므로 경서한글자라 한다.

조선 전기에서 고도로 발전해 온 활자인쇄시설은 임진왜란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파괴 또는 소실되고 약탈되었고, 이후 오랫동안 복구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활자를 새로 주조하여 책을 찍어 내지 못하고 흩어진 구활자를 모아 목활자로 보충하여 사용하였다.

이때 훈련도감에서 자급자족의 한 방법으로 목활자를 만들어 책을 찍어 판매, 경비의 일부를 충당하려는 대책이 강구되었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훈련도감자였으며, 이때 한글활자도 만들어져 이를 훈련도감한글자라 부른다.

그 뒤 인조 말기에 인쇄사업이 다시 교서관으로 옮겨졌으나, 아직도 목활자인쇄가 행하여지고, 그 뒤 현종 때인 1668년(현종 9)에 사주갑인자인 무신자가 주조되자 주자인쇄가 다시 활기를 띠었다. 그리고 1772년(영조 48)에 오주갑인자인 임진자가 주조되기까지의 사이에 한글활자의 중간자와 작은자가 만들어져 병용되었는데, 이를 무신자병용한글자라 한다.

1777년(정조 1)에는 오주갑인자인 임진자로 ≪명의록 明義錄≫을 찍고, 그 다음해에 한글활자로 국역본을 내놓았다. 그리고 정유자로 찍은 ≪유중외대소신서윤음 諭中外大小臣庶綸音≫의 번역문도 한글활자로 인쇄되고 있다. 이들 국역본은 모두 글자모양이 가지런하지 않고 글자획도 고르지 않으며 칼새김의 흔적이 나타나고 있어 목활자임을 시사해준다.

1693년(숙종 19)에는 원종(元宗)이 쓴 글씨를 바탕으로 활자를 주조하여 ≪맹자대문≫과 ≪맹자언해≫를 찍어냈다. 이때 사용된 한글활자를 원종한글자라 일컬으며, 중간자와 작은자가 있다. 또 1723년(경종 3) 무렵에는 앞서 무쇠로 주조한 전기교서관인서체자를 개주하여 활자를 만들어냈는데, 그 인본에 한글활자가 아울러 사용되었다.

그것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으나, ≪증수무원언해 增修無寃諺解≫의 인본을 보면 나무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를 교서관인서체자병용한글자라 한다. 1734년 사역원에서 인출한 역서(譯書)에도 한글활자가 쓰여졌다. 이를 경서정음한글자라 일컫는다.

정조 때에 이르러서는 문예진흥정책의 촉진을 위하여 선왕들의 인쇄사업을 계승하여 적극 발전시키는 한편, 청나라와의 인쇄문화 교류를 통하여 새로운 활자의 자양(字樣)을 받아들여 우리의 활자인쇄문화를 더욱 찬란하게 꽃피게 하였다. 청나라의 흠정무영전취진판정식(欽定武英殿聚珍板程式) 도입에 이어 각종의 목활자, ≪취진자보 聚珍字譜≫ 등을 도입하였다.

또 사고전서에 들어 있는 취진판식 ≪강희자전 康熙字典≫을 입수하여 그 글자를 바탕으로 목활자인 생생자를 만들었다.

1795년(정조 19)에는 생생자를 바탕으로 동활자의 큰자와 작은자를 주조하였는데, 이를 정리자 또는 그해의 간지를 따서 을묘자라 한다. 이 활자에 한글활자를 병용하여 찍은 책으로 ≪오륜행실도 五倫行實圖≫가 있다. 그 한글활자는 마치 붓으로 쓴 것과 같이 부드러운 필서체인데, 이를 흔히 초주정리자병용한글자라 일컫는다.

그러나 이것은 국역본 ≪오륜행실도≫의 국문을 찍기 위하여 만든 것이기 때문에 오륜행실한글자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초주정리자는 1857년(철종 8) 주자소 화재로 소실되어 이듬해에 다시 주조되었는데, 이를 재주정리자라 한다. 이 활자는 한말에 이르기까지 학부교과서·법령·조약서(條約書)·관보(官報) 등의 인쇄에 사용되었는데, 그 인쇄물 중에 한글활자가 병용된 국한문본이 적지 않게 전해지고 있다. 그 활자는 종래 사용해 온 학부한글자가 정교하지 못하여 1896년에 새로 동으로 주성한 필서체활자로 재주정리자병용한글자라 일컫는다.

한말에는 학부에서 후기교서관인서체자를 본떠 나무로 한자활자와 한글활자를 만들어 새로운 교과서를 박아냈다. 이때 쓴 한글활자를 학부인서체한글자로 부르고 있다.

그리고 1816년(순조 16)에 박종경(朴宗慶)이 사사로이 주조한 전사자의 인본에도 한글활자가 쓰이고 있다. 전사자는 대원군이 집정한 뒤 운현궁(雲峴宮)으로 몰수되었는데 대원군이 집정한 무렵과 그 뒤에 나온 인쇄물이 적지 않게 전해지고 있다. 그 중 국역본에는 전사자병용한글자로 불리는 인서체 한글활자가 쓰이고 있는데, 이 활자는 크기가 아주 작은 인서체인 것이 특징이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것이 연으로 만든 신식한글자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앞선 것은 1880년 일본에서 최지혁의 글씨를 바탕으로 주조하여 ≪한불자전 韓佛字典≫을 찍은 한글활자이며, 그 뒤 1881년부터 수 년 사이에 일본과 만주에서 천주교성경이 간행되어 잇따라 도입되기도 하였다. 국내에서는 1883년 박문국이 설치된 이후 신식한글자가 만들어져 사용되었다.

근대 이후의 활자

1930년대 활자는 거의 납활자를 사용하였는데, 활자의 종수가 대단히 부족한 상태여서 나무에 새긴 목각활자로 많은 양을 보충하면서 사용하였기 때문에 불편함이 많았다. 일본으로부터 건너온 호수활자(號數活字)를 사용하였는데, 5호·4호·2호·초호(初號) 등이 주로 쓰였으며, 일본에서 쓰던 경척(鯨尺) 1분에 해당하는 것을 5호활자로 정하였다.

그 뒤 1940년대 후반부터 6호·7호·3호·특호 등을 추가하여 사용하다가 활자의 규격이 다양하지 못하였던 관계로 1950년대부터 포인트활자와 혼용되기 시작하였다.

호수활자만을 사용하던 1930∼1940년대에 구리로 된 집합자모판(集合字母板)과 경편자모(更片字母)에 의하여 활자가 주자되어 왔으며 반자동주자기(半自動鑄字機)로 주자할 수 있는 놋쇠 자모를 일본으로부터 수입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부터 미국에서 창시된 포인트활자(0.353㎜, 약 72분의 1)를 혼용하였다. 처음에는 8·9포인트가 도입되었고, 이어 10·12포인트를 만들었으며, 195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 3.5포인트부터 다양한 포인트시대로 접어들었다.

그 뒤 1960년대부터 독일과 일본으로부터 자모 조각기를 도입하여 우리 나라에서 벤턴자모를 조각하기 시작하였고, 활자서체를 개량하는 등 고급인쇄가 출발할 수 있었다. 따라서 1970년대에는 거의가 포인트시대로 바뀌었고, 벤톤자모시대를 이루었으며, 재료는 모두 놋쇠 자모로 바뀌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사진 식자기에 의한 조판이 시작되면서 다시 문자의 규격은 급수(級數, 1급=0.25㎜)를 도입하게 되었고, 1980년대 초부터 활자의 사양화가 시작되었다.

완전한 수동작업에 의한 조판이 채산성관계로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사진식자와 청타(淸打)에 의한 조판이 상당한 양으로 보급되기 시작하였으나, 청타활자의 조판은 효과면에서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경인쇄용(輕印刷用)으로 머물렀다.

그리고 사진식자의 경우 서체의 다양화에는 어느 정도 기여하였으나 조판에 있어 정밀성의 문제가 있어 역시 고급인쇄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 초부터 활자의 문제점과 사진식자의 문제점을 보완하고 채산성이 유리한 컴퓨터(computer)조판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로써 활자는 점차 없어졌고, 수동사진식자·청타도 줄어들고 컴퓨터가 고속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컴퓨터 기종의 차이, 문자의 복사 사용, 비전문인들의 서체취급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한 서체의 불량, 인쇄의 농담차(濃淡差) 등으로 인쇄효과에는 일부 한정의 경향으로 나타났다.

1986년부터 점차 서체가 고급화되고, 수식 등 어려운 조판 프로그램이 개발되면서 컴퓨터 조판은 날로 확산되었으며, 1995년부터 활자에 의한 조판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때부터 다양한 제목용 서체가 개발되었으나 인쇄 효과나 가독성에서 가장 중요한 본문용 서체는 종래의 서체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훈민정음 창제원칙과 고딕체와의 일치를 이루고, 가독성이나 인쇄 효과 증진을 가져올 수 있는 서체(홍우3-2본문체, 문화부바탕체)가 개발되었으나 아직 보급은 많이 되지 못한 형편이다.

현재 쓰이고 있는 명조 계열 대부분의 서체는 초성(初聲)음과 종성(終聲)음이 다른 원칙으로 쓰여져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시정이 되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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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천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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