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구 ()

강동구청
강동구청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서울특별시의 동단에 위치한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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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서울특별시의 동단에 위치한 구.
개관

동쪽과 남쪽은 경기도 하남시, 서쪽은 송파구 · 광진구, 북쪽은 한강 건너 경기도 구리시와 접해 있다. 위치는 동경 127°06'~127°11', 북위 37°30'~37°34'이다. 면적 24.59㎢, 인구는 45만 8658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8개 행정동(9개 법정동)이있으며, 구청은 서울특별시 강동구 성내1동에 있다.

자연환경

한강의 침식 및 퇴적작용을 받았으며, 한강으로 유입되는 성내천과 고덕천 일대에 충적층이 발달하였고 중부와 남부는 일자산 줄기의 구릉성 산지로 되어 있다. 기반암의 지질은 대부분이 선캄브리아기의 경기편마암복합체와 한강 연안의 범람으로 형성된 고기하성층(古期河成層)인 홍적층(洪積層)과 지금의 하천 유로와 곡간(谷間)에 퇴적된 신기하성층(新期河成層)의 넓은 충적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쪽에서 중앙부로 한남정맥의 끝줄기인 청량산에서 뻗은 일자산 줄기가 흘러 성삼봉 · 응봉을 이루며, 그 기슭으로 성내천과 고덕천이 흘러 한강으로 유입된다. 한강 연안과 성내천 · 고덕천 연안에는 범람원 외에 단구 지형도 형성되어 있다. 단구지역은 주변 충적지보다 고도가 높아 침수 피해가 적어 밭보다 논으로 이용되었으며, 현재는 거의 시가지로 변하였다. 특히 성내천은 송파구와 경계를 이루며, 건천으로 있다가 지하철 5호선 개발로 지하수를 이용하여 친환경 자연하천으로 조성되면서 시민들의 휴게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기후는 대륙성 기후의 특징을 바탕으로 한강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도시기후를 나타내고 있으며, 연평균 기온은 13.3℃, 1월 평균기온은 0.4℃, 8월 평균기온은 26.5℃, 연 강수량은 1,212.3㎜이다.

역사

강동구 지역은 서울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곳이었다. 즉 암사동 유적이 있어, 인근의 미사리 유적과 더불어 우리나라 4대 신석기시대 생활유적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암사동 유적은 빗살무늬토기 문화층을 형성하고 있는 서기전 3000~4000년 경의 문화유적이다. 이곳에서는 식생활을 엿볼 수 있는 탄화(炭火) 도토리가 출토되어 채집경제를 살필 수 있으며, 새뼈 · 어골문 등으로 수렵과 어로생활이 경제생활의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강동구를 포함한 한강 유역을 무대로 최초의 정치세력이 등장한 것은 진국(辰國)과 삼한사회의 마한(馬韓), 그리고 초기 백제였다. 서기전 1세기 말 백제국이 마한을 정복하고 초기 고대국가인 백제(百濟)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들은 한강 유역의 경제성을 이용하여 보다 많은 생산 활동과 인구 증가를 이루었고, 보다 큰 정치집단을 형성하여 4세기 중엽 근초고왕 때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475년 한강 유역은 고구려의 통치 하에 들어갔다. 553년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이래 신라는 삼국통일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신라는 전국에 9주를 설치했고 강남구를 포함한 서울 지방은 한산주(漢山州)에 편입되었다. 한산주는 757년(경덕왕 16) 지금의 서울 지방에 한양군(漢陽郡)을 설치하면서 한주(漢州)로 개칭되었다. 후삼국시대에는 태봉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강동구 일대는 암사동 유적에서 백제문화층이 나타나고 있으며, 백제의 도성인 하남위례성으로 추정되는 풍납동 토성을 길 건너에 두고 있어 이곳이 백제도읍지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암사동 일대에는 백제 때의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구암사 가운데 백중사(고려시대 절로 추정)의 존재가 대두되기도 했다.

918년 왕건이 국왕에 추대되어 고려왕조를 개창함에 따라 한양군(漢陽郡)은 고려에 편입되었으며, 940년(태조 23) 전국의 행정구역을 재편성하고 주군현(州郡縣)를 개칭함에 따라 한양군은 양주(楊州)로, 한주는 광주(廣州)로 편제되었다. 983년(성종 2) 12목에 지방관이 처음 파견될 때 광주도 이에 포함되었으며, 성종 14년에는 절도사를 파견하면서 이 지역의 주둔군대를 봉국군(奉國軍)이라 불렀다. 1310년(충선왕 2) 8월에는 광주목(廣州牧)이 지주사(知州事)로 격하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목으로 승격되었다.

1231년과 1232년의 몽골군 1·2차 침입을 광주부사 이세화(李世華)를 중심으로 군민이 단결해 막아냈다. 한편 고려 초기 광주지역의 가장 강력한 호족은 왕규(王規)가 있었으며, 그는 두 딸을 태조의 제15·16비로 들였다. 또한 혜종의 장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고려 말기 광주이씨의 중시조격인 둔촌 이집(李集)이 머물던 곳은 오늘날 둔촌동이라는 지명으로 전하고 있다. 또한 이집의 구암서원 터가 한강변에 정비되어, 그 후손의 묘역이 전하고 있으며, 광주 안씨와 김씨 등의 토성이 있었다.

강동구 지역을 관할하고 있던 광주는 조선 중기까지는 23개 면, 113개 리를 포함하는 경기도 내의 가장 큰 고을이었다. 이곳은 조선시대 말까지 군사기지로 주목을 받았으며, 남한산성(南漢山城)은 전란 때마다 격전지 방어성이 되었다.

현재의 강동구는 광주부의 구천면 일대에 해당되었다. 구천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데, 1759년(영조 35)의「호구장부」에 보면, 구천면에는 일동 · 고다지동 · 명일원리 · 암사동 · 곡교리 · 기리동 · 둔촌동 · 성내동 등 8개 리가 있었다. 30년 후인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는 구천면에 곡교동 · 성내동 · 기리동 · 둔촌동 · 일동내 · 고다지동 · 암사동 · 명일원리 등 8개 마을로 되어 있어 변화가 거의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암사수원지 취수장 일대는 사액서원 구암서원이 있던 곳으로 ‘둔촌이선생휘집조두구기’라 새겨진 비석이 있으며 복원된 정자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곳에 있는 서원에는 여말선초의 이양중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정성근 · 정엽 · 오윤겸 · 임숙영 등의 인물을 배향하였다. 또 앞 구릉인 응봉 또는 고덕산에는 이극배의 신도비를 비롯한 광주 이씨 후손의 묘역이 있어 이곳이 조선시대부터 많은 인사들이 왕래하던 곳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서거정은 광나루를 왕래하며 그 풍광을 읊은 시를 남기고 있어 당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강동 지역에는 광나루가 있어 충주 지역으로 가는 길목이 되었으며, 강원도에서 내려온 뗏목들이 하룻밤 묵고 마포로 내려가는 목재집산지 구실을 하였다.

1914년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광주군은 16개 면, 183개 리로 개편되었는데, 구천면은 암사리 · 고덕리 · 상일리 · 하일리 · 명일리 · 길리 · 둔촌리 · 풍납리 · 성내리 · 곡교리 등 10개 리로 형성되었다.

3·1운동 당시 강동 지역에는 5일장이 없었기 때문에 만세를 부르기 위해 사발통문으로 날짜를 정해 사람들을 모았다. 그 당시 강동 지역의 유일한 상업지역은 상일리였다. 따라서 일제는 순사주재소를 상일리에 두고 구천면, 동부면, 서부면 3개 면을 관할했다. 상일리는 이 3개 면이 접해 있는 중심지로, 모든 주민들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 구천면 내의 만세시위는 3월 27일 면의 서남단인 길리에서 발단이 되어 면의 동북단인 상일리로 발전되었다. 명일리와 암사리 등지를 거치면서 시위 군중의 수는 500여 명으로 증가되었다. 이후 1,000명 이상의 군중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헌병주재소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헌병은 무차별로 총을 쏘아, 1명이 죽고 2명이 부상당하였으며, 시위군중도 해산하게 되었다.

한편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일부 지역은 전 마을이 유실되는 등의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암사동 유적의 흔적이 노출되기도 하였다.

1963년 서울시의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성동구에 편입되어 천호출장소 관할 하에 있게 되었다. 1975년 성동구에서 강남구가 분구되자 이에 속했으며, 1979년 강동구로 분리, 신설되었고 1988년에는 송파구가 분구했다.

6·25전쟁 때 한강인도교와 철교가 폭파된 지 1시간 반 뒤에 광진교가 폭파되었다. 서울이 수복된 뒤 광진교에 부교가 설치되어 한강을 건널 수 있게 되었다. 한편 광복 후 이곳은 전형적인 서울 외곽의 농촌 지대였다. 한강에 합류되는 성내천(城內川) · 고덕천(高德川) 등의 연안은 넓은 충적지를 이루어, 일찍부터 근교농업이 발달하여 채소류와 과일이 많이 재배되었다.

근래 천호동 일대에는 방적 · 식품 · 금속 · 기계 공업이 발달하였다. 특히 암사동은 점촌(店村)으로 백제시대에 궁궐에서 쓰는 그릇을 구워 내던 곳이었고, 도자기 생산지로 유명했다. 이 지역은 1925년 홍수 때 옹기를 굽는 이 일대가 모두 물속에 잠겼던 일도 있었다. 예로부터 옹기나 벽돌 제조에 좋은 점토가 많은 것이 특징이어서, 광복을 전후해서는 성내동을 중심으로 벽돌 · 옹기 · 기와 · 토관 · 화분 등을 만드는 대규모의 연와공장이 자리 잡았다.

197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해 천호 지구와 고덕 지구 등의 택지개발사업으로 크게 변모했다. 특히 최근 천호신사거리를 중심으로 대형 백화점이 들어서고 교차로와 지하철 환승역이 설치되면서 새로운 상권으로 부상하고 있다.

유물 · 유적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인 서울 암사동 유적(사적, 1979년 지정)이 있다. 이 유적은 지금으로부터 약 5천~6천 년 전의 유적으로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밝혀진 신석기시대 최대의 집단취락지이다. 1925년 을축년 홍수 때 수많은 빗살무늬토기 조각이 노출되면서 유적지가 밝혀지기 시작하였다. 1967년 발굴 이후 계속된 학술발굴에 의해 빗살무늬토기를 비롯한 신석기시대 유물과 각종 도구가 발굴되었다.

또한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유적(無文土器遺蹟)과 인접해 있어 두 시대의 문화가 접촉하는 양상을 알려주고 있고, 나아가 백제문화층과도 이어져 역사적 흐름을 밝혀주는 귀중한 유적이다.

주거지는 대개 원형이나 말각방형의 수혈식 움집 구조로 중앙에 화적자리가 놓이고 뒤편에 식량을 저장하는 저장공, 앞쪽에는 각종 도구가 놓인 형태를 띠었다. 출토 유물 중 가장 특징적인 빗살무늬토기이다. 그릇 모양은 곧은 입술모양에 뾰족밑 또는 둥근밑이고 반 달걀 모양을 하고 있다. 그리고 돌화살촉 · 돌도끼 · 공이 · 긁개 · 갈판과 갈돌 등 여러 가지 석기가 출토되었다.

1988년까지 유적지 발굴조사를 시작으로 총면적 78,133㎡의 문화재 보호구역(현, 국가지정유산 보호구역)을 확대하여 신석기시대 움집이 복원되었고, 원시생활전시관을 건립하면서 현장교육 및 관광명소가 되어 서울올림픽대회 때 개방하였다.

강동구에 있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는 암사동에 있는 광주이씨 광릉부원군파 묘역과 상일동에 있는 문희공 유창 묘역이 있다. 주이씨 광릉부원군파 묘역은 1993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고, 문희공 유창 묘역은 1995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광주이씨 광릉부원군파 묘역은 조선 세종 때부터 연산군에 이르기까지 7명의 왕을 섬기면서 도덕정치를 실천한 광릉부원군 이극배와 그 후손들의 묘역이다. 묘역 가운데 이극배의 묘는 1495년(연산군 1)에 조성된 것으로 부인 경주 최씨와 쌍분을 이루고 있으며,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져 있다.

문희공 유창 묘역은 고려 말 문신이자 조선 개국공신인 유창의 업적을 기려 세운 비석으로 무덤 가까이에 세워져 있다. 이 일대에는 유창의 묘와 그 자손들의 묘가 함께 자리하고 있는데, 신도비 외에 여러 석조물들이 남아 있다.

암사동에 있던 구암서원은 1667년(현종 8)에 건립되었으며, 1697년(숙종 23)에 현판을 사액받았다. 이후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정리 때 철폐되었다. 현재 그 터가 확인되어 중건을 꾀하고 있다. 특히 이곳은 삼국시대 절이 9개나 있어 구암사라 하였으며, 하진참 동쪽바위에 있어 바위절이라 하였던 사실과 관련하여 주목되고 있는 문화유적지이다.

바위절마을호상놀이가 전국민속경연대회에 참여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바위절마을호상놀이는 1996년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현, 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

교육 · 문화

강동구 지역은 자연환경이 좋고, 교육시설도 잘 갖춰져 있다. 대단위 주택단지와 지하철 5·8호선이 지나고 간선도로가 잘 발달되어 있어 교육여건이 훌륭하다. 이러한 조건에 따라 강북의 전통 명문학교가 이전해 오기도 했지만, 대학시설은 없다. 교육기관으로는 2015년 현재 초등학교 26개교, 중학교 18개교, 고등학교 14개교, 특수학교 2개교가 있으며, 특히 한국구화학교와 주몽학교 등 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가 있다. 그 외 강동구에 위치한 서울종합직업전문학교 · 대한직업전문학교는 첨단기술 교육을 통한 직업보도에 앞장서고 있다. 또 맹인을 위한 점자도서관, 강동도서관, 고덕평생학습관, 구립독서실, 청소년회관은 사회교육 사업에 이바지하고 있다.

문화시설로는 공연장, 문화의집, 전시관, 영화관, 도서관 등을 비롯하여 지역문화예술의 증진을 위해 활동하는 강동문화원과 강동문화예술회관이 있다. 구민회관 내 대강당은 종합공연장 구실을 하며 영화 · 연극 · 교향악단 공연과 합창발표가 이루어지고 있다. 바위절 호상놀이 풍물패가 활동하고 있다. 강동문화의 집은 문화관람실을 비롯한 문화사랑방을 운영하고 있다. 또 강동구립예술단이 조직되어 여성합창단, 남성합창단, 교향악단, 청소년교향악단, 극단 등이 해마다 구내 순회공연을 하고 있다. 그리고 강동예술인 연합회가 조직되어 있으며, 상일여고 합창단이 활동하고 있다.

성내동에 구민건강생활체육관이 있으며, 한국사회체육센터는 수영장 · 체력단련장 · 에어로빅장 · 체육도장 등을 갖추고 있다. 명일동 청소년회관수영장에는 대소 수영장이 있으며 상일동에는 강동테니스장이 있다. 그 외 동명근린공원 인조잔디축구장, 온조대왕문화체육관, 해공골프연습장, 한우물 배드민턴장이 있으며, 한강변 둔치에는 자전거도로와 인라인스케이트장이 있다.

민속

세시풍속은 일정한 시기에 주기적 · 관습적으로 행해지는 연중행사인데, 주로 명절에 따라 행해진다. 암사동은 바위절이라고 불렸고, 그 앞 강변에 참이 있어 한강 수운의 거점이 되어 세시풍속이 이어져 왔다. 정월에는 설날을 시작으로 토정비결을 보았다. 그리고 제웅을 만들고, 용왕제를 지내며, 보름날에는 오곡밥을 먹었다. 그리고 4계절 24절기에 따라 각종 놀이가 행해지는 풍속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강일동에서는 안산산신제를 지냈다.

강동구의 민속놀이를 대표하는 것으로 바위절마을 호상놀이가 있다. 암사동은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기 전까지 전형적인 농촌지역으로써 부부상여(夫婦喪輿)인 쌍상여호상(雙喪輿好喪)놀이가 전래되어 왔으나, 바위절 마을의 개발과 우리 사회의 도시화 물결로 상여놀이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후 1990년에 원형을 복원하여, 제3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장려상을 수상하면서 매년 공연되고 있다. 공연 진행은 출상, 상여놀이, 노제, 외나무다리 건너기, 달구질 순서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세시풍속과 관련한 민속놀이로 윷놀이, 돈치기놀이, 송파산대놀이, 백중놀이, 거북놀이, 줄다리기, 쥐불놀이, 씨름 등이 있다.

민간에서 길흉화복이 이어지면서 현생의 부귀와 저승의 편안함을 기원하는 바램은 각종 굿거리로 남아 전하고 있다. 즉 재수굿, 병굿, 내림굿, 지노귀굿, 대수대명굿, 주당맞이굿, 살풀이굿, 노망굿 등이 있다.

설화 · 민요

강동구에는 광주 이씨의 세거지와 둔촌 이집에 관련된 일화가 많이 있다. 그 가운데 이집의 효도와 국청사우물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옛날 경기도 광주(현 둔촌동)에 이집(李集)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집은 효성이 지극하여 가난한 살림에도 아버지가 종기가 나 고생하는데 병간호를 위해 정성을 다했다. 어느 날 국청사에 가서 백일기도를 드리라는 꿈을 꾸고, 이튿날 새벽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를 드렸다. 백일이 되어가던 어느 날, 기도를 하고 물을 마시기 위해 국청사 아래 바위샘에 다가가 보니 금붕어 한 마리가 있었다. 금붕어가 노는 모양을 한참동안 바라 보다 노는 모양이 신기해서 금붕어를 집으로 가지고 와서 기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밤중에 잠이 깬 이집의 아버지는 금붕어가 들어 있는 물을 마셨다. 그러자 등에 난 종기가 터지면서 피고름이 나고 병이 낫게 되었다. 그 후 영험이 있는 샘물로 인해 아버지의 병이 완전히 나았다는 소문이 꼬리를 물고 널리 퍼지자 각처에서 피부병 환자가 몰려들었다. 이 샘물은 국청사라는 절의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국청사우물’이라고 불렀다. 이 효자우물은 지금도 남한산성 안에 전하고 있다.

그 외에 고덕산 백중사의 장자늪설화, 암사동 우미내설화 등이 있다.

강동구에는 호상놀이와 관련하여 ‘상여선소리’가 전하며, 달구질놀이 때 행해지는 방아타령과 각종 덕담들이 전하고 있다.

산업 · 교통

강동구의 전체면적은 24.59㎢로 이 중 40.4%가 녹지지역이다. 상업지역은 2.5%에 불과하고 57.1%가 주거지역으로 이루어진 쾌적한 환경도시이다. 강동구는 서울에 편입되어 도시화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서울 교외의 근교농업이 발달한 곳이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근대화 과정에서 천호동 일대 방적 · 식품제조업과 암사동 · 성내동 일대의 벽돌 제조업이 성행하였다.

광진교로 이어진 도심과의 연결로 강동구의 도시화 물결 속도가 빨라져 천호동 일대에 소규모 제조업과 더불어 상권이 형성되었다. 특히 도시화 건설과정에서 당시 강동구 지역의 값싼 토지와 자연조건은 큰 벽돌공장이 들어서게 하였고, 그 공장들은 6·25사변으로 피난 온 피난민들을 이곳에 정착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준공업 지역이었던 성내동이 업무 및 주택지역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상일동 · 하일동 지역이 서울로 편입됨에 따라 섬유 · 직물 · 화공약품 · 벽돌공장들이 이전하게 되자, 이들 지역은 농촌지역에서 점차 공장지역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그 후 신 · 구천호사거리와 명일동을 중심으로 각종 유통구조가 밀집되었고, 성내동 일대에 관공서가 집중화되면서 소프트웨어산업단지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이어 강동구 외곽에 아파트단지가 형성되고, 점차 고층화로 재개발되면서 유통규모가 더욱 확대되었다. 이에 기존에 있던 천호시장, 동서울시장, 동부시장, 암사시장 등에서 대형 백화점 2개, 대형 할인점 2개와 시장이 14개로 증설되었다. 아울러 재래시장도 패션 거리 · 풍물 거리 · 젊음의 거리 등으로 특화되고 있다. 지금도 원예단지로 남아 있는 농경지가 있으며, 의복 · 모피제품 제조업과 식품제조업, 가죽 · 가방 · 신발 · 가구 등 많은 제조업이 경영되고 있다.

구 전역이 바둑판식으로 잘 정리된 도로망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천호대교 · 광진교 · 강동대교로 강북 지역과 구리시가 연결되고, 올림픽대로와 천호대로를 통하여 인천국제공항과 중부고속도로로 이어지며, 43·45·6·3번 국도로 이어져 춘천 · 충주 방향으로 교통이 원활하게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천호동에는 경기도 동남지역으로 이어지는 버스터미널이 있다. 또 서울외곽순환도로인 구리-판교 간 고속도로가 지나 수도권 어느 지역과도 긴밀하게 이어진다.

주요 도로로는 중부고속도로 진입로와 경기도를 연결하여 주는 외곽순환도로 · 천호대로를 간선도로로 하여 둔촌로, 풍납로, 강동대로, 구천면길, 고덕동길, 선사로, 방아다리길, 상일동길 등이 있다.

1996년 3월 30일 지하철 5호선 강동 구간이 개통되었고, 1999년 6월 준공된 지하철 8호선 암사역에서 강동구청(성내)역 개통이 강동지역의 교통난 해소에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천호대로 · 풍납로 · 선사로의 교차 사거리인 천호(풍납동 토성)역과 연결되는 천호동로터리 일대는 상업중심지역이며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하철 노선을 이용하여 김포국제공항으로 직결되며, 송파구와 성남시로의 교통이 원활하게 되었다.

관광

강동구의 관광자원은 한강이 에둘러 흐르는 풍광과 멀리 보이는 아차산 · 불암산 · 도봉산 · 삼각산 줄기와 검단산 · 예봉산 · 용문산 줄기를 바라보는 시원함이 제일이다. 아울러 선사시대 이래 고대 · 고려 ·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날에 보전되고 있는 각종 문화유적이 있어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그 중 암사동 유적은 강동구의 상징적인 관광자원이다. 이곳에는 발굴 주거지 26기를 복원하여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으며, 특히 제1·2전시관을 통하여 그 실제 생활상을 확인하고 체험할 수 있다. 제1전시관은 지금으로부터 약 6천 년 전 신석기시대 움집터 8기와 저장구덩이 1기의 발굴모습을 그대로 보존처리하여 그 위에 전시관을 세우고 출토유물을 전시하였다. 제2전시관 입구에는 영상실이 있으며 한국의 구석기문화부터 초기 청동기문화까지 모형과 패널을 통해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으며, 그 밖에 동아시아의 선사문화를 비교하는 공간도 마련하였다. 특히 전시실 중앙부분에는 움집을 절개하여 신석기인의 모습과 생활상을 알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관광 상품으로 관련 기념품을 전시하고 있다.

또한 일자산 해맞이 광장은 둔촌 이집이 즐겨 산책하면서 학문에 정진하던 곳으로 둔촌선생과 관련된 옛 지명인 굴바위, 둔굴, 둔촌약수, 삿갓바위, 새우고개, 온수굴, 응봉 등 역사의 뿌리가 산재해 있다. 둔촌 선생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또한 천호동 한강변에는 서거정의 시비인 강동예찬시비가 있어 한강을 통한 강동의 오랜 역사와 풍광을 살필 수 있는 명소가 되고 있다. 천호대로와 방아다리길 교차점 녹지대에 빗살무늬토기형 조명탑이 설치되어 선사시대 이래 문화중심지로서의 강동구를 표시하고 있다.

한편 강동구에는 1999년에 개원한 길동생태공원이 있어 환경생태교육의 현장이 되고 있다. 길동생태공원은 호수와 관련된 생물들의 생태적 안정과 활동을 위한 공간인 저보수지구, 습지와 관련된 생물들의 생태적 안정과 활동을 위한 공간인 습지지구, 나지에서 초기 천이단계의 선구수종이 이루어내는 공간인 초지지구, 자연 삼림으로의 천이과정에 있는 기존 삼림공간인 삼림지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 천호동에 1998년에 개원한 천호동(해공)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는 연못 등 조경시설, 운동시설, 교양시설로서의 야외무대와 전시관, 편익시설, 관리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 많은 구민이 찾고 있다. 또한 제헌국회 부의장을 지낸 해공 신익희선생의 동상이 있으며, 도미부인상, 바위절터, 구암서원터 등의 관광자원이 있다. 아울러 관광시설로 성내동에 LA관광호텔이 있으며, 역사탐방코스와 자연생태탐방코스가 개발되어 있다.

연혁에서 알 수 있듯이 강동구는 도시화가 급속히 전개되면서 전통적인 농촌의 모습이 거의 사라졌기 때문에 민속시장인 전통 먹거리촌은 찾아볼 수 없다. 단지 새로운 상권형성과 관련하여 길동사거리 일대에 유흥음식업소와 음식점이 밀집되면서 많은 주민들의 외식문화를 선도하고 있으며, 대단위 아파트 단지 입구에 형성된 상가 인근에 먹거리촌이 형성되었다. 또 암사동 선사주거지라든가 다른 축제행사장에서 각종 풍물시장이 개설되어 전통알뜰먹거리 · 김치맛자랑 등으로 축제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매년 개최되는 선사문화축제는 암사동 유적을 중심으로 선사시대 우리 조상들의 생활상을 체험할 수 있다. 또한 과거와 미래를 잇는 지역축제로 전통문화예술과 현대문화예술이 어우러진 프로그램을 통해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종합축제가 되었다. 그리고 구립예술단, 지역예술인, 연극, 무용 등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종합예술공연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편 강동구립예술단은 여성합창단, 남성합창단, 교향악단, 청소년교향악단, 극단 등으로 구성되어 구내 순회공연을 하고 있다. 또 목요예술무대를 통하여 오페라, 뮤지컬, 연극 등 다양한 문화행사가 이루어져 구민과 함께 하는 지역문화를 창출하고 있다. 또한 성덕여상풍물패가 구내 각종 행사와 서울특별시 행사에 참여하고 있으며, 상일여고합창단은 강동의 밤, 선사문화축제, 금요예술마당 등을 통하여 강동구민을 위한 정기연주회 활동을 하고 있다. 그 외 강동문인협회의 문학의 밤, 청소년휘호대회, 송년음악회 등이 행해지고 있다.

강동구의 대표적인 전시관 겸 박물관 기능을 하는 곳은 암사동 선사주거지 제1·2전시관이다. 우리나라 신석기문화의 전형을 살필 수 있으며, 체험교육을 통하여 교육효과를 더욱 높이고 있다.

동(洞)
  1. 성내동(城內洞)

구의 서남쪽에 있는 동이다. 동쪽은 둔촌동, 남쪽과 서쪽은 송파구 방이동, 북쪽은 천호동과 접해 있다. 백제의 고성인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이 각각 남쪽과 서쪽에 있다. 풍납동 토성 안쪽에 위치하여 성안말 · 안말 등으로 불린 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1963년 서울특별시 성동구에 편입되어 천호출장소 관할이 되었으며, 1975년 강남구를 거쳐 1979년 강동구가 신설되면서 이에 속하였다.

광복 이전까지는 주로 농업과 옹기 · 벽돌 등을 만드는 농촌지역이었으나, 광진교를 이용한 편리한 교통, 송파변전소의 전력, 6·25전쟁 피난민을 중심으로 한 값싼 노동력 등으로 1970년대까지 준공업지대로 발전하였다. 그 후 인구 증가에 따른 아파트 건설과 구청 · 경찰서 등 공공시설이 들어서면서 공장들은 외곽으로 밀려나고 주택지역으로 바뀌었다.

  1. 하일동(下一洞)

구의 동쪽 끝에 있는 동이다. 북쪽은 한강을 경계로 경기도 구리시, 동쪽은 경기도 하남시, 서쪽은 고덕동, 남쪽은 상일동과 접해 있다. 하일동과 상일동 사이에 흐르는 계 내의 아래쪽에 위치한 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1963년 서울특별시 성동구에 편입되어 천호출장소 관할이 되었으며, 1975년 강남구를 거쳐 1979년 강동구가 신설되면서 이에 속하였다. 2000년 행정동명을 강일동으로 변경하였다. 전형적인 농촌지역이었는데, 1967년 흥인동과 서부 이촌동 철거민이 집단 이주하고, 1968년 숭인동 · 창신동 화재민도 이주함으로써 주민 밀집지역이 되었다. 최근에 주택지로 개발되었으며, 아직도 도시 근교농업 형태가 남아 있다. 올림픽대로가 강일인터체인지에서, 천호대로가 상일인터체인지에서 각각 중부고속도로와 연결된다. 청송심씨(靑松沈氏)의 집성촌이 있다.

  1. 상일동(上一洞)

구의 동쪽 끝에 있는 동이다. 동쪽은 경기도 하남시 풍산동, 서쪽은 명일동, 남쪽은 하남시 초이동, 북쪽은 고덕동 · 하일동과 접해 있다. 계 내의 위쪽에 있어 동명이 유래되었다. 1963년 서울특별시 성동구에 편입되어 천호출장소 관할이 되었으며, 1975년 강남구를 거쳐 1979년 강동구가 신설되면서 이에 속하였다. 고덕지구 택지개발사업에 포함되면서 본격적으로 개발되어, 주공아파트단지를 형성하고 있다. 임씨(任氏)와 조씨(趙氏)의 집성촌이 남아 있으며, 이곳에서는 매년 치성제를 올린다. 국가유산으로 조선 개국공신인 유창의 문희공 유창 묘역이 있고, 청동기시대(초기철기시대) 유물도 몇 점 출토되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사회체육센터와 지체부자유아를 위한 특수교육기관인 주몽학교가 있다.

  1. 명일동(明逸洞)

구의 동남쪽 끝에 있는 동이다. 북쪽은 고덕동, 동쪽은 상일동, 남쪽은 길동, 서쪽은 천호동 · 암사동과 접해 있다. 고려시대 명일원(明逸院)이라는 숙박소가 있었던 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1963년 서울특별시 성동구에 편입되어 천호출장소 관할이 되었으며, 1975년 강남구를 거쳐 1979년 강동구가 신설되면서 이에 속하였다. 고덕지구 택지개발사업에 포함되면서 주요 주거지역으로 발전하였으며 고층아파트가 들어섰다. 1961년 해발고도 42m의 야산에서 청동기시대의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1. 고덕동(高德洞)

구의 동북쪽에 있는 동이다. 동쪽은 하일동, 북쪽은 한강 건너 경기도 구리시, 남쪽은 상일동 · 명일동, 서쪽은 암사동과 접해 있다. 고려 말기 형조참의를 지낸 이양중이 조선 건국을 반대하여 이곳에 숨어 살아 덕이 높은 인물로 추앙받은 데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1963년 서울특별시 성동구에 편입되어 천호출장소 관할이 되었으며, 1975년 강남구를 거쳐 1979년 강동구가 신설되면서 이에 속하였다. 1982년 고덕지구 택지개발사업에 의하여 대단위 주거지역으로 발전하였으며, 고덕주공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지하철 5호선이 통과하며 서울특별시 동부 기술교육원, 서울수중재활센터, 우성원, 서울특별시교육청 고덕평생학습관, 배재중고등학교, 온조대왕문화체육관 등이 있다. 한강에 유입되는 고덕천이 있으며, 고덕산 지역에서 청동기시대의 유물로 보이는 무문토기 조각들과 석기가 발굴되었다.

  1. 암사동(巖寺洞)

구의 북쪽에 위치한 동이다. 동쪽은 고덕동 · 명일동, 남쪽은 천호동 · 북쪽은 한강을 경계로 경기도 구리시, 서쪽은 한강을 경계로 광진구 광장동과 접해 있다. 신라시대 절이 9개 있어 구암사(九岩寺), 속칭 ‘바위절’이라고 하였던 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1963년 서울특별시 성동구에 편입되어 천호출장소 관할이 되었으며, 1975년 강남구를 거쳐 1979년 강동구가 신설되면서 이에 속하였다.

주로 농업에 종사하던 마을이었는데 1970년대 중반부터 개발되었다.

  1. 천호동(千戶洞)

구의 중앙 서쪽에 있는 동이다. 동쪽은 명일동과 길동, 남쪽은 성내동, 북쪽은 암사동, 서쪽은 풍납동과 한강을 사이에 두고 광진구 광장동과 접해 있다. 옛날부터 수천 호가 살만한 지역이 될 것이라는 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원래 광주군 구천면 곡교리였으나 1963년 서울특별시 성동구에 편입되어 천호출장소 관할이 되면서 천호동이 되었으며, 1975년 강남구를 거쳐 1979년 강동구가 신설되면서 이에 속하였다. 광나루로 인해 형성되기 시작한 도진촌락(渡津村落)으로 1936년 광진교가 놓이면서 마을이 커지기 시작하였다. 길이 육로로 바뀌면서 상업과 교통의 요충지로 성장하기 시작하였고, 천호시장과 주택단지가 들어섰다. 천호토지구획사업으로 천호대로와 선사로가 교차되는 지점에 1980년 신사거리가 형성되어 종래의 구사거리와 달리 교통 · 상업의 중심지로 새롭게 발전하고 있다. 지하철 8호선이 지나 교통이 더욱 편리해졌다.

  1. 길동(吉洞)

구의 중앙 동남쪽에 있는 동이다. 북쪽은 명일동, 서쪽은 천호동, 남쪽은 둔촌동, 동쪽의 경기도 하남시와 접해 있다. 천재지변이 없는 살기 좋고 길(吉)한 곳이라는 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1963년 서울특별시 성동구에 편입되어 천호출장소 관할이 되었으며, 1975년 강남구를 거쳐 1979년 강동구가 신설되면서 이에 속하였다. 1972년 천호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에 둔촌로 일대가 개발되면서 인구가 급증하였다.

천호대로가 거여동길과 교차하며, 길동사거리는 새로운 번화가가 되었으며, 둔촌로 연변에 동서울종합시장이 있다. 지하철 5호선이 지나며, 1998년에 조성된 길동생태공원이 있다.

  1. 둔촌동(遁村洞)

구의 남쪽 끝에 있는 동이다. 북쪽은 길동, 서쪽은 성내동, 남쪽은 송파구 방이동, 동쪽은 일자산을 경계로 경기도 하남시와 접해 있다. 광주이씨(廣州李氏)의 시조인 둔촌 이집(李集)이 한때 거주한 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1963년 서울특별시 성동구에 편입되어 천호출장소 관할이 되었으며, 1975년 강남구를 거쳐 1979년 강동구가 신설되면서 이에 속하였다.

주택지구로 개발되기 시작하여 1980년 이후 대단위 주거 전용지구가 되었으며, 주공아파트단지가 형성되어 있다. 둔촌로와 지하철 5호선이 지나 교통이 편리하다. 1983년에 구로구 오류동에 있던 보훈병원이 이전하여 왔다. 예전에 둔촌약수터가 후추우물 또는 한자명으로 초천(椒泉)이라 하여 유명하였는데, 1978년에 폐쇄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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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월지유칠, 1917)
강동구청(www.gangdong.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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