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성구 ()

수성구청
수성구청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대구광역시 동남부에 위치한 구.
정의
대구광역시 동남부에 위치한 구.
개관

동쪽으로는 경상북도 경산시, 북쪽으로는 동구, 서쪽으로는 중구와 남구, 남쪽으로는 달성군과 접해 있다. 동경 128°35´~128°43´, 북위 35°48´~35°87´에 위치한다. 면적은 76.46㎢이고, 인구는 41만 5,306명(2022년 5월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23개 행정동(26개 법정동)이 있으며, 구청은 대구광역시 수성구 범어동에 있다.

자연환경

남쪽 지역을 둘러싸고 있는 남부산지는 신천을 경계로 서쪽으로 비슬산괴(琵瑟山塊)와 연결되어 있다. 용제봉(634m)을 주봉으로 산성산(山城山, 653m), 용지봉(龍池峰, 629m), 대덕산(大德山, 598m), 병풍산(屛風山, 576m), 성암산(聖岩山, 469m) 등으로 이어지는 용제산괴(龍祭山塊)가 남쪽 지역을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북쪽 지역은 완만한 지형면과 형제봉(190m), 모봉(150m), 두리봉(217m), 고산(92m) 등의 구릉지들로 이루어져 남고 북저의 지형이다. 신천(新川)에서 남부정류장까지는 신천(新川)의 범람으로 인해 형성된 충적평야가 도심지를 이루고 있고, 남부정류장을 지나 시지동까지는 해발고도 100~200m 전후의 구릉지들이 분포하고 있다. 시지동에서는 대덕산의 곡구에서 부채꼴 모양으로 넓고 평탄한 선상지 지형면이 펼쳐져 있다.

지질은 크게 남쪽의 높은 산지와 북쪽의 낮은 구릉지로 구분할 수 있다. 호수에서 퇴적되어 고결된 셰일·사암(砂岩)·역암(礫岩) 등의 수성암인 중생대 백악기 경상계 신라통 반야월층, 자인층, 대구층, 건천층을 기반암으로 하여 중생대 백악기 경상계 주산안산암질암류 안산암질암과 중생대 백악기 경상계 불국사관입암류인 규장암류가 관입하여 남쪽의 높은 산지를 구성하고 있고, 상부대동계(백악-상부주라) 불국사통 산성암맥류가 관입접촉하여 북쪽의 낮은 구릉지를 형성하고 있다. 신천(新川)을 연하여 제4기 현세통 고기하성층과 신기하성층이 부정합으로 피복되어 있다.

하천은 대부분 남쪽의 높은 산지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흐르는 소규모 지류 하천으로, 동구와 경계를 지으며 동에서 서로 흐르는 금호강(琴湖江)에 합류한다. 금호강(琴湖江)은 포항시 북구 죽장면 석계리 매봉산 기슭 문암지에서 발원하여 남서쪽으로 흘러 영천의 동화천, 하양의 청도천, 경산 남천 등의 십 여개 지류와 합류하고 서류하여 대구시로 들어와 북구 검단동에서 급하게 곡류하여 흐르다가 달성군 강창 나루터에서 낙동강과 합류하여 총길이는 118.4㎞, 유역면적은 2,088㎢이다. 그리고 욱수천은 병풍산 북쪽 사면에서 발원하여 북동방향으로 흘러 욱수동을 거쳐 신매동을 지나 북동으로 흘러서 남천에 합류한다.

수성구에는 대표적인 수성못을 비롯해서 마산지, 대덕지, 당고개지, 구름지, 지산못, 내지, 담티못, 서당지, 연지못, 봉천지, 연호지, 연호내지, 원당지, 골안못, 외지, 대진지, 자매지, 구천지, 서성지, 계전지, 녹안지, 독인지, 망월지 건천지, 망월지 등 크고 작은 저수지가 분포하고 있다.

대구의 북동부와 남부는 산지로 둘러싸여 있고, 서부가 상대적으로 개방되어 있는 분지형 지형으로, 겨울에는 춥고 여름은 무더운 내륙분지형 기후의 특성을 가진다. 2007년 연평균 기온은 15.0℃, 월평균 기온은 7월이 27.6℃로 가장 높고, 1월이 3.3℃로서 가장 낮다. 강수량은 973.9㎜이다. 대구지역의 지난 30년 간((1973년~2002년)의 강수량은 1,035.8㎜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과우지역이다. 1년 중 6~9월에 비가 가장 많이 내린다.

역사

2000년 파동의 야산 기슭에서 ‘바위그늘’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은 높이 6m, 너비 10m, 폭 5m 정도의 큰 바위를 바람막이 등으로 이용한 고대인들의 생활유적으로 대구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된 것이다. 시굴조사 결과 표토층에서는 조선시대 유물을, 그 아래층에서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토기조각을, 그 다음의 아래층에서는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민무늬토기 조각, 갈돌, 홈자귀(유구석부), 돌날 등을 확인하였다. 특히 1만 년 이전에 조성된 최하층에서는 인공이 가해진 강자갈들을 다량 수습함으로써 대구지역 최초의 구석기유적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상동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되어 신석기시대에 사람이 거주했음이 입증되었다. 또한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 상동, 두산동 그리고 욱수천 유역에서 발견되었고, 시지동에서도 청동기시대의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이러한 선사유적들은 대구의 남쪽 경계인 팔조령에서 발원하여 대구분지를 남에서 북으로 가로질러 금호강과 합류하는 신천(新川) 주변에서 많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유적지는 청동기시대의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신라시대에는 위화군(渭火郡) 또는 상촌창군(上村昌郡)이었는데, 통일신라시대인 경덕왕 때 수창군(壽昌郡)으로 바뀌었으며, 가창(嘉昌)으로 기록된 곳도 있다.

고려 초에 수성군(壽城郡)으로 바뀌었고, 1018년(현종 9)에 수성군사(壽城郡司)로서 경주에 속했다가 1390년(공양왕 2)에 해안현(解顔縣)을 겸하여 감무(監務)를 두었다.

1394년(태조 3)에 대구겸관으로 삼았다가 1414년(태종 14)에 다시 대구에 합속(合屬)되었으며, 1419년에 수성현사(水城縣司)로 대구임내(大邱任內)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후기 대구대도호부의 옛 수성현 중에서 수현내면·수동면 전체, 현재 동구에 소속동·효목동을 제외한 수북면 전체가 상수서면 중에서 파동 지역에 해당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수현내면, 수동면 그리고 수북면이 통합되어 달성군 수성면으로 편제되었다. 1938년 수성면 전체 14개 동이 대구부에 편입되면서 이곳을 관할하는 동부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57년에는 달성군 가창면에 속해 있던 파동이 동부출장소에 편입되었으며, 1963년에는 동부출장소가 동구로 승격하였다. 그 후 1980년 4월 1일에 효목동을 제외한 과거 수성면 지역과 파동이 동구에서 분리되어 수성구(壽城區)가 신설되었다.

1981년 7월 1일 대구시가 대구직할시로 승격되면서 경산군 고산면이 편입되어 구역이 확장되었다. 1982년 9월 1일에는 고산1동을 신설하였고, 1983년에는 고산2동을 신설하여 구 면적이 증가하게 되었고, 또한 1988년 5월 1일 자치구로 승격되었다.

많은 인구유입으로 인해 1992년 9월 1일로 만촌2동이 만촌2·3동, 황금동이 황금1·2동, 지산동이 지산1·2동으로 분동하였다. 1995년 1월에는 대구직할시가 광역시로 되면서 기초자치단체가 되었다. 1996년 1월 범물동이 범물1·2동, 고산1동이 고산1·3동으로 분동하였다. 그리고 2001년 12월 31일 고산2동의 법정동 중 내환동을 대흥동으로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히 이 지역은 녹지와 생활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진 대구 제일의 쾌적한 주거지역이다. 따라서 지산·범물지구와 시지지구를 중심으로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조성되어 인구유입이 급속하게 늘어났다. 2015년 현재 수성구의 주택 현황을 보면, 아파트 8만 4206호(70.9%), 단독주택 2만 3891호(20.1%), 다세대주택 6163호(5.2%), 연립주택 2233호(1.89%), 비 거주용 건물이 2207호(1.9%)로 아파트의 비중이 가장 높은 대표적인 신흥주택지역이다.

유물·유적

구미 선산읍 금동여래입상(국보, 1976년 지정),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국보, 1976-1 지정),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국보, 1976-2 지정)은 모두 경상북도 구미시(옛 선산군) 고아면에서 출토된 것으로 국립대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또한 칠곡 송림사 오층전탑 사리장엄구(보물, 1963년 지정) 역시 국립대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외에 의성 관덕동 석사자(보물, 1963년 지정)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칠곡 정도사지 오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대구광역시 시도유형문화재로는 영영축성비(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1982년 지정), 대구부수성비(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1982년 지정), 이공제비및군수이후범선영세불망비(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1988년 지정)가 있다.

영영축성비는 수성구 만촌1동 산 83-5번지(영남제일관 앞)에 위치하고 있다. 이 비는 경상도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였던 민응수(閔應洙)가 임진왜란으로 허물어진 대구읍성을 복원한 후, 그 규모와 공사과정을 기록하여 1737년(영조 13)에 세운 것이다. 본래 대구읍성의 남문밖에 세웠는데 1906년(광무 10) 당시 대구군수인 박중양(朴重陽)이 읍성을 헐어버려 그 후 여러 곳으로 이전되었다가 1980년 현재의 자리인 영남제일관 앞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대구부수성비는 영영축성비와 같은 곳에 위치해 있는데, 이 비는 경상도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였던 김세호(金世鎬)가 경상감영의 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한 뒤, 그 사실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본래 대구읍성의 남문 밖에 세워졌으나 1906년(광무 10) 대구부성이 헐리면서 영영축성비와 마찬가지로 여러 곳으로 이전되었다가 1932년 대구향교로 옮겼다. 그 후 영영축성비와 같이 현재의 영남제일관 앞으로 옮겨졌다. 비문은 관찰사 김세호가 지었고, 글씨는 절충장군(折衝將軍) 최석로(崔錫魯)가 썼다. 또한 이공제비및군수이후범선영세불망비는 1988년 5월 30일 시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수성구 상동 182번지 이서공원 내 위치하고 있다. 공원 내에 건물(비각1칸 9.72㎡)을 건설하여 비석3기(이공제비 2기, 이후범선영세불망비 1기)를 보존하고 있다. 좌측의 이공제비는 이서선생의 치적을 기리기 위해 대구 주민들이 세운 송덕비(頌德碑)로 1797년(정조 21)에 이공제비를 세우고 매년 1월 14일에 향사를 올렸다. 중앙의 비석은 1986년 신천대로 공사 때 수성교 서편 지하에서 발견된 것으로 1808년(순조 8)에 세운 것이다. 1797년 세운 비가 초라해 이서 선생의 업적을 영구히 기리고자 다시 비를 세운 것이다. 군수이후범선영세불망비는 1899년에 세운 것으로, 1898년(광무 2)에 큰 홍수가 있어 이공제 하류 부분이 훼손되어 대구 읍성이 위험하게 되자, 군수 이범선(李範善)이 주민 부담 없이 국고로 수천금의 비용을 들여 단시일에 공사를 완공하자 주민들은 그의 공적을 보답하기 위하여 세운 비석이다. 이 비석들은 중구 대봉동 655번지 신천대로변에 있었으나 2000년 9월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로는 고산농악(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1984년 지정), 욱수농악(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1988년 지정), 그리고 상감입사장(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1997년 지정)이 있다.

그리고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로는 야수정(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하효자정려각(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1989년 지정)이 있다. 야수정은 1900년경 수성구 상동의 진씨(秦氏) 문중(門中)의 재실(齋室)로 한일(韓日) 절충식 건물이다. 하효자정려각은 만촌동에 위치하고 있다. 정려각 안의 비석은 대구 경북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효자비의 하나로, 고려시대 이부시랑(吏部侍郞)을 지낸 하광신(夏光臣)의 지극한 효성을 기리기 위해 조정에서 정문(旌門)을 내려 세운 것이다.

기념물로는 사월동지석묘군(대구광역시 기념물, 1992년 지정)이 사월동 469번지 시지2차 사월보성타운 내에 위치하고 있다.

파동지석묘, 고산유적, 상동지석묘, 시지동고분군, 두산동 청동기유적, 두산동 고분군, 전 지산동 출토 청동유물, 파동고분군, 만촌동 청동기유적, 시지동 석관묘, 시지동 생활유적, 시지동 지석묘·주거지, 매호동 지석묘, 욱수동 고분군, 매호동 주거지 등이 있다.

그 외에도 정효각·정충각(旌孝閣·旌忠閣), 명정각(命旌閣), 모명재(慕明齋), 효열밀양박후성처성주배씨지려비(孝烈密陽朴厚成妻星州裵氏之閭碑), 솔일재(率一齋), 법이산 봉수대(法伊山 烽燧臺)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수성구 만촌동 산90번지에 위치한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이다. 대구 읍성(邑城)은 1590년(선조 23)에 처음 축성할 당시에는 토성(土城)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허물어진 뒤 1736년(영조 12)에 석성(石城)으로 개축하였다. 읍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정문이 있었는데, 동문은 진동문(鎭東門), 서문은 달서문(達西門), 남문은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 북문은 공북문(拱北門)이다. 이 성문들은 1906년 읍성이 철거될 때 함께 철거되었다. 현재의 영남제일관은 1980년에 지금의 위치로 새로 세웠졌으나 성루(城樓)의 위치·규모·품격 면에서 원형과 동떨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대구제일의 향토 상징 관문으로써 금호강과 함께 대구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신세계아파트 내 4그루의 느티나무는 수령이 250~400년에 이르는 노거수로서 예부터 동네의 수호신인 당산목으로 동민의 추앙을 받아왔고, 매년 음력 정월 14일 동민들이 동신제를 지냈다고 한다. 또한 지산동 비룡골 일대 5그루의 느티나무는 인근 2그루의 회화나무와 1그루의 참나무와 더불어 시문화재로 지정 보호되고 있으며, 수령 400년이 넘는 지산초등학교 앞 느티나무와 상동의 팽나무도 지역의 노거수로 유명하다.

교육·문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교육기관인 서원은 선비들의 문화와 영욕(榮辱)을 함께 하면서 우리 교육사에서 빛과 어둠의 두 자취를 남겨 놓았다. 초창기 서원은 선비정신이 충만한 학문의 도장(道場)으로 성인(聖人)을 향한 구도(求道)의 장으로 양반 관료제 사회를 지탱하는 지식인 관료집단의 양성기관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서원의 난립으로 권력화 된 정치집단으로 변질되어 정쟁(政爭)의 장이 되면서 서원 본래의 교육기능은 약화되고 선현에 대한 제향(祭享)기능이 강화되었다.

성동의 고산서당(孤山書堂)은 1984년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으며 앞으로 남천(南川)과 고산 들녘을 바라보면서 성동 서원골 야산자락에 입지하고 있다. 건립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퇴계 이황과 우복 정경세선생이 이곳에서 강(講)을 했다는 기록을 볼 때 1500년대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청호서원(靑湖書院)은 수성구 황금동 271번지에 소재하고 있으며, 조선조 대학자였던 모당(募堂) 손처눌(孫處訥, 1553~1634), 사월당 류시번(柳時藩), 양계(暘溪) 정호인(鄭好仁), 모당의 6대조인 격재(格齋) 손조서(孫肇瑞) 4분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파동 432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오천서원(梧川書院)은 조선 성종 때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대봉(大峰) 양희지(楊熙止)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1744년(영조 20)에 건립된 것으로 대구지역의 23개 서원 가운데 4번째로 건립되었다. 그리고 독무재(獨茂齋)는 1989년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으며, 만촌동 188-1번지에 있다. 이 독무재는 벼슬을 버리고 향리(鄕里)에 은거하며 후진 양성에 전념한 하시찬(1750~1828)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문인(門人)과 유림(儒林)들이 건립한 것이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은 초등학교 34개교, 중학교 23개교, 고등학교 17개교가 있고, 기타특수학교로 대구남양학교가 있으며, 전문대학으로 수성대학교가 있다. 또한 과학교육 및 활동에 필요한 연구와 지원을 강화하여 창의적이고 자율적인 과학교육 창조에 기여함을 목표로 운영되고 있는 대구창의융합교육원이 대구과학고등학교와 함께 입지하고 있다.

지역의 대표적인 문화공간으로 황금동 범어공원지구에 입지하고 있는 국립대구박물관은 대구·경북지역 문화유산의 보존, 연구 및 전시와 각종 사회교육프로그램 운영 등을 통하여 대구 지역 주민들의 문화향유권 신장을 위해서 1994년 12월 7일 개관하였다. 지상 2층, 지하 1층의 국립대구박물관은 부지 3만여 평에 연건평이 4532평이다. 건물 내에는 고고실·미술실·민속실 등 3개의 상설전시실과 2개의 기획전시실이 있다. 그리고 각종 문화강좌 및 문화예술 공연 행사가 열리는 강당, 시청각실 및 2개의 강좌실과 전통문화실습실이 있다. 또한 토기만들기, 탁본뜨기 등 직접 체험하면서 배울 수 있는 체험학습실과 고고학·미술사학 등 박물관 관련 도서류와 역사·문화예술과 관련된 자료가 비치된 도서실이 있다.

황금동의 어린이회관은 부지 147천㎡, 건물 8천㎡(지상 4층)의 규모로, 어린이들에게 체험과 탐구의 학습장을 제공하고 있다. 그 밖의 문화시설로 빼놓을 없는 것은 방송시설을 들 수 있다. 즉 KBS 대구방송총국, 대구MBC, TBC 등 3대 지상파 방송국이 모두 수성구에 입지하여 대구지역 언론의 한 거점을 형성하고 있다. 그 외에 수성케이블방송을 비롯한 6개의 지역 케이블방송국이 있다. 특히 대구MBC의 갤러리M과 KBS 대구방송총국의 전시공간은 미술작품 전시와 공연 및 그 외 각종 예술활동 공간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문화축제로는 구민화합을 위해 1988년부터 매년 5월 또는 10월에 노래 및 장기자랑 그리고 각종 전시회·이벤트행사를 개최하는 수성축제가 있다.

민속

이 지역의 민속놀이 및 세시풍속으로서 고산농악과 욱수농악이 있다. 고산농악은 수성구 대흥동에서 자생하여 전승되고 있는 것으로 1984년 7월 25일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예능 보유자는 정창화(鄭昌和)이며, 이 농악은 마을 개척당시부터 전승되어 오면서 농악 원래의 소박성을 그 원형대로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대흥동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보름에 동제(上堂, 中堂, 下堂)를 지내는데 이 동제의 왕복길에 농악을 즐겼으며 동제가 끝난 뒤에도 풍물을 쳤다고 전해진다. 연행과정에서의 ‘닭쫓기’놀이는 이 마을에만 있는 독특한 놀이마당이다. 대흥동에는 농악의 전승유지를 위해서 19세기부터 계(契)가 조직되어 있으며, 그때 사용한 계첩(契牒)도 남아 있다.

1983년 제23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여 문화관광부 장관상(우수상)을 수상하였다. 그때 받은 상금을 기금으로 고산농악대를 조직하여 현재까지 전승하고 있다. 욱수농악은 1988년 5월 30일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전승지는 수성구 욱수동이고, 예능 보유자는 김호성(金浩星)이다. 원래 욱수농악은 동제 때 동제당에서 신내림을 축원하는 천왕받이 굿과 이 내림굿에서 뒤따르는 판굿과 보름달의 구걸(지신풀이) 그리고 달불놀이 때의 마당놀이가 어우러진 종합적인 민속놀이로 전승되어 왔다.

동제는 1970년대의 도시화 과정에서 중단되었고, 달불놀이는 입산금지 이후 없어졌으나 농악과 지신풀이는 1963년부터 친목계를 조직하여 전승되고 있다. 욱수농악은 동제와 연관된 축원농악과 판굿 즉 두레농악이 복합된, 경상도 내륙의 농악에서 보기 드문 군사 모의굿이 어울려진 복합농악이다.

설화·민요

수성구에는 효자 하광신, 황금동의 못안과 봉천, 두사충과 모명재, 영험서린 느티나무, 형제봉(兄第峰)의 전설, 고모령(顧母嶺)의 전설 등 다양한 전설과 민담이 내려오고 있다.

현재 제2작전사령부 동쪽에 2개의 산봉우리가 나란히 있는데 하나는 좀 높고 하나는 좀 낮다. 이 두 봉우리를 형제봉으로 부르고 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전설 때문이다. 아득한 옛날 이곳에 힘센 장군 남녀가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둘이 서로 산 쌓기 내기를 했다. 오빠는 옷섶으로 흙을 날라다 산을 쌓기 시작했고 여동생은 치마폭으로 흙을 날라 산을 쌓기 시작했다. 내기의 방법은 해가 뜰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하루 동안 누가 더 높은 산을 쌓는가 하는 것이다. 흙을 담아 나르는 것의 크기가 오빠의 옷섶보다는 여동생의 치마폭이 훨씬 넓어 그런지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려는데 누이동생의 산이 오빠산 보다 더 높았다. 심술이 난 오빠가 동생 산을 짓밟아 버려 높던 누이동생의 산이 뭉퉁해 졌다. 그래서 끝이 뾰족한 산을 형봉(兄峰), 다른 밋밋한 산을 제봉(弟峰) 또는 매봉(妹峰)이라 부르고 이 산 아래 마을을 형제봉골 또는 양지마을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 골짜기에서 남부주차장으로 나가는 계곡에 옛날 지장보살을 모신 지장사가 있었다 하여 이 계곡은 지장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 옛날 지장골과 형제봉골 일대에는 뱀이 많았기 때문에 이 지역을 통틀어 뱀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현재 제2작전사령부 영내에 있는 못 이름이 사동지(巳洞池)인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고모령의 전설은 다음과 같다. 형제봉 사이에 있는 고개인 고모령에는 옛날 남편 없이 어린남매를 키우는 홀어머니가 있었는데 하루는 스님 한분이 와서 이 집은 전생에 덕을 쌓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가난하므로 덕을 쌓으면 부자가 될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이에 어머니와 어린 남매는 덕을 쌓기 위해 흙으로 산을 쌓았다. 그리고 이것이 현재의 모봉, 형봉, 재봉이라는 3개의 산봉우리가 되었는데 동생과 형이 서로 높이 쌓고자 시샘을 하여 싸우는 것을 보고 어머니는 크게 실망하여 자식들을 잘못 키웠다는 죄스러움으로 집을 나와 하염없이 걷다가 고개 정상부에서 집을 향해 뒤돌아 봤다는 전설이다. 즉 뒤돌아 볼 고(顧), 어미모(母)를 합쳐 그 고개를 고모령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고개 아래 마을이름도 고모마을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날뫼’는 대구지역의 전통적인 농촌 민요로써, 수성구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민요로 가사는 다음과 같다. “위야호호 위야호호/위야호호 위야호호/해야소리 잘도 한다 위야호호/여보시오 농부님네 위야호호/나에 말씀 들어 보소 위야호호/건강한 이 팔대로 위야호호/앞을 땡겨 디로 밀아 위야호호/제초제로 맬 솜씨가 위야호호/무럭무럭 크는 베를 위야호호/하리비삐 잘 길러서 위야호호/칠팔월에 알을 생기 위야호호”

산업·교통

2008년 현재 지목별 토지이용 현황은 임야 38.59㎢(50.5%), 대지 13.17㎢(17.2%), 경지 8.5㎢(11.1%), 도로가 6.54㎢(8.6%)이다. 경지 면적 중에는 논이 4.35㎢로 51.2%이고 밭은 4.15㎢로 48.8%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전체면적(76.46㎢)중에서 시가지 면적이 17.86㎢로, 23.4%를 차지하고, 나머지 76.6%는 아직 비시가지 지역으로 그 면적은 58.59㎢이다. 이들 지역의 용도별 토지이용 현황을 살펴보면, 시가지 지역은 주거지역이 16.08㎢로 21%를, 상업지역은 1.80㎢로 2.4%를 차지하고 있다. 비시가지 지역은 생산녹지가 0.3㎢로 0.4%, 자연녹지가 9.54㎢로 12.4%를 차지하는 반면, 개발제한 구역은 48.78㎢로 63.8%를 차지하여 그 비중이 가장 크다.

산업대분류별로 살펴보면, 2008년 현재 농업 및 임업이 4개 업체가 있으며 종사자는 18명이고, 제조업은 884개 업체에 종사자 수는 2,941명이다. 전기, 가스 및 수도사업은 7개 업체에 종사자는 391명이고, 건설업은 1,016개 업체에 1만 1508명이다. 도·소매업은 5,381개 업체에 1만 5546명이고, 숙박 및 음식점업은 4,570개 업체에 1만 4997명으로 수성구에서는 도·소매업과 숙박 및 음식점업이 업체수와 종사자수 측면에서 모두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운수업은 2,444개 업체에 4,652명이고, 통신업은 110개 업체에 1,907명이다. 금융 및 보험업은 343개 업체에 6,822명이고, 부동산업 및 임대업은 1,191개 업체에 5,264명이다. 사업서비스업은 1,025개 업체에 9,180명이고, 공공행정, 국방 및 사회보장행정은 74개 업체에 4,620명이다. 교육서비스업은 2,540개 업체에 1만 3191명이고, 보건 및 사회복지사업은 794개 업체에 5,603명이다. 오락, 문화 및 운동관련 서비스업은 826개 업체에 2,465명이고, 기타 공공 수리 및 개인 서비스업은 2,961개 업체에 6,107명이다. 그리고 도소매업 시설로는 2008년 현재 대형 할인점 2개, 백화점 1개, 시장 18개가 있다

교통시설에 있어서는 신대구부산고속도로가 개설되어 기존 경부고속도로와의 연계가 이루어짐으로써 동으로 포항, 남으로는 부산과의 접근성이 크게 향상되었다. 그 결과 항만의 접근성이 제고되어 교통요충지로서의 역할도 담당하게 되었다. 이 밖에도 대구국제공항과 동대구역, 고속버스터미널 등과의 접근성도 매우 양호하다. 이러한 외부지역과의 양호한 접근성과 주거환경으로 대구의 새로운 중추관리기능 집적지역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도시철도 2호선(문양~영남대) 개통으로 인해 편리한 대중교통이용이 가능하게 되었다. 현재 법원, 교육청, 경찰청, 검찰청, 방송국 등 공공기관과 특히 범어네거리를 중심으로 금융기관이 집적하고 있으며, 교육도시 대구의 명성에 걸맞는 유수의 명문 고등학교가 소재하고 있다.

관광

국립대구박물관을 비롯한 다수의 문화시설과 대구스타디움을 비롯한 체육시설, 수성유원지, 들안길 먹거리 타운 등의 문화관광지가 많다.

수성유원지는 수성못을 중심으로 조성된 총 면적 108만 5000㎡에 달하는 대구광역시를 대표하는 위락시설이다. 수성못은 일본인 미쓰사키린따로[水崎林太郞]가 황폐한 수성을 옥토화하기 위하여 자기재산과 총독부의 지원을 받아 1924년 9월 27일 착공하여 이듬해 10월 30일에 완공되었는데, 그 둘레는 2020m, 저수량은 70만 톤이다. 수성유원지는 범물동 용지봉에서 북서부로 뻗어 내린 산줄기의 하부에 위치하여 주변의 완만한 산지와 수성못을 끼고 조성되어 빼어난 자연경관미를 자랑한다. 이 지역이 도시근린 유원지로 개발된 계기는 1983년 동대구로와 연결되는 유원지 진입로의 확장과 상가와 주변 불량건물의 정비에서 찾을 수 있다. 그 후 1986년 6월 우수와 오수 분리시설을 설치하였으며, 그 해 12월 수성못 바닥 준설공사를 하였고, 주변 터를 돋움으로서 가로등과 벤치, 체력단련장 등이 설치되어 보트와 각종 유기시설이 갖추어짐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의 가족단위 나들이 중심의 유원지로 정착하게 되었다.

만촌동에는 영남제일문을 비롯하여, 고모령 전설과 대중가요인 ‘비내리는 고모령’의 고모령 노래비가 있다. 또한 1997년 조성된 수성못과 두산오거리 사이의 두산폭포는 겨울철 고드름이 장관을 이루는 관광명소가 되었고, 동대구역에서부터 황금네거리까지 이어지는 6㎞의 동대구로는 2000년도 제1회 아름다운 숲가꾸기 전국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도로이다. 특히 2002년 월드컵 거리응원이 동대구로의 범어네거리에서 이루어지면서 전국적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체육시설로는 대흥동에 입지한 대구스타디움을 빼놓을 수 없다. 이 경기장은 51만 2479㎡의 면적에 관중석은 총 6만 5857석이 갖추어져 있으며, 2002년 한·일 월드컵과 유니버시아드대회,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주경기장으로 이용되었다. 연호동에 위치한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는 2016년에 완공되어 삼성라이온즈의 홈구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경기장 주변의 각종 편의시설과 공연장 등은 수성구민뿐만 아니라 대구시민 및 인접한 경산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 밖에 구민 체육시설인 수성구민 운동장은 수성구 범어동 355번지에 위치하며, 규모는 2만 2260㎡로 부대시설은 축구장, 배구장, 농구대 등이 있다.

대구를 대표하는 관광위락지역으로 유명한 들안길 먹거리 타운이 입지하고 있다. 이 먹거리 타운은 1980년대 초반부터 상동전화국에서 수성못 방향 도로 2.3㎞(T자형)에 걸쳐 음식점과 그 관련 업소들이 집적하여 자연스럽게 형성된 지역으로, 2000년 현재 한식, 일식 등의 전문음식점 123개소가 입지하고 있다. 2004년부터 매년 5월마다 들안길 전역에서 ‘수성구들안길맛축제’가 개최되고 있다.

참고문헌

『수성구통계연보』(대구광역시 수성구, 2008)
『문화유적분포지도』(대구광역시·재단법인 영남문화재연구원, 2006)
『통계연보』(대구광역시, 2005)
『지방행정구역요람』(행정자치부, 2003)
『새로 쓴 대구역사기행』(향토사교육연구회, 2002)
『통계로 본 수성구 20년사』(대구광역시 수성구, 2001)
『대구시사』(대구광역시, 1995)
『대구행정구역변천사』(대구광역시, 1995)
『한국관광자원총람』(한국관광공사, 1985)
『한국지명요람』(건설부국립지리원, 1982)
『한국지명총람』(한글학회, 1979)
대구광역시수성구(www.suseong.kr)
대구시(www.daegu.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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