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구(대구광역시) (())

대구광역시 북구청
대구광역시 북구청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대구광역시 북부에 위치한 구(區).
정의
대구광역시 북부에 위치한 구(區).
개관

동쪽으로는 팔공산, 서쪽으로는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달성군 다사읍, 남쪽으로는 중구, 동구, 서구, 북쪽으로는 대구광역시 및 경상북도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8°30′∼128°37′, 북위 35°52′∼35°59′에 위치하고 있으며, 면적은 94.08㎢, 인구는 44만 3119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23개 행정동(31개 법정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청은 대구광역시 북구 침산동에 있다.

자연환경

태백산맥 줄기의 팔공산(八公山)과 문암산 등으로 구성된 환상산지가 뻗어 있고, 팔조령에서 발원하여 대구시가지를 남북으로 가로질러 북류하고 있는 신천과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죽장면에서 발원하여 대구광역시의 동북지역을 동서방향으로 금호강이 관류하고 있다.

그밖에 연경동에서 동변동으로 흐르는 동화천, 읍내동에서 팔달동으로 흐르는 팔거천이 남류하여 금호강에 합류하고 있다. 소하천으로는 도남동에서 태전동을 흐르는 반포천, 연경천, 도곡천, 문주천, 사방하천, 웃빠골천, 사수압앞내천, 아꾸럼천, 서리골천이 있다.

지형적으로 북부는 팔공산을 주축으로 하는 환상산맥의 일부로 도덕산(道德山)을 정점으로 남쪽에 있는 학봉에 이르기까지 저산성 구릉지이고, 명봉산에서 사수재로 이어지는 서부는 구릉성 산지가 많은 지역이다.

금호강의 북쪽지역인 북부지역은 칠곡 지역이 중심이며, 이는 다시 함지산을 경계로 하여 칠곡 지역과 조야, 서변, 동변, 노곡동 지역으로 나누어진다. 남부지역은 금호강과 신천의 범람원으로 표고 50m 이하의 낮고 평탄한 지형이다. 금호강과 신천의 양안에는 자연제방이 발달되어 있고 대부분 사질토양으로 구성되어 오래전부터 취락지가 형성되어 왔다. 즉 북구는 지형적으로 금호강을 경계로 하여 남북으로, 신천과 팔거천을 경계로 다시 동서로 나누어진다. 이들 북구의 네 지역은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통합되어 있으나 생활권역으로서는 큰 의미가 없다.

대구는 북동부와 남부는 산지로 둘러싸여 있고, 서부가 상대적으로 개방되어 있는 분지형 지형으로, 겨울에는 춥고 여름은 무더운 내륙분지형 기후의 특성을 가진다. 연평균 기온은 14.8℃로, 월평균기온은 7월이 27.3℃로 가장 높고, 1월이 0.8℃로서 가장 낮다.

1973년부터 2002년까지 30년 간 대구지역의 강수량은 1035.8㎜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과우지역이다. 1년 중에는 6∼9월에 비가 가장 많이 내린다. 2014년 기준 총 강수량은 1023.0㎜이다.

역사

북구 지역은 금호강과 신천을 끼고 일찍부터 취락이 형성되어 왔다. 금호강과 신천을 중심으로 선사문화유적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1998년 북구의 동서변지구 택지개발공사로 발굴 조사된 대구 서변동 유적은 신석기시대의 유적과 빗살무늬토기가 다수 확인되어 신석기시대부터 이 지역에 사람이 살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현재까지 발견된 청동기시대의 유적으로는 동천동(東川洞) 유적, 연암산(燕岩山) 선사유적, 침산(砧山) 선사유적, 검단(檢丹) 유물산포지, 서변동(西邊洞) 청동기유물 출토지 등을 들 수 있다. 이를 통해 보면 북구 금호강 유역에는 선사시대부터 크고 작은 취락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금호강 유역의 산격동 연암산(燕岩山) 선사유적은 지금까지 지표상에서 집터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토기, 석기편(石器片)의 산포상태로 보아 가까운 곳에 취락이 있었으며, 이곳이 토기, 석기를 대량으로 제작했던 작업장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구릉의 남쪽 기슭에는 삼국시대의 돌널무덤(石棺墓群)이 분포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이 일대에 삼국시대의 초기단계까지 큰 취락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북구의 초기철기시대 내지 원삼국시대의 유적으로는 팔달동유적이 있다. 이를 통하여 이 일대에는 대규모의 취락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북구 지역은 서기전 2∼3세기경에 이르러 대구 지역에 강한 권력을 가진 여러 지배층이 형성되었을 무렵에, 그 중 하나로 존재하다가, 서기전 1세기경에는 정치적 통합과정이 이루어지면서 사회집단들 간에 세력의 격차가 발생하고 주도적인 지배세력이 대두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후 북구 지역은 3세기를 전후하여 검단토성을 중심으로 하는 지배집단의 중심지가 되었다가 이후 현재의 서구 비산동과 평리동 지역을 근거로 하는 지배세력의 영역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시대에는 대구현(大丘縣)과 팔거리현(八居里縣)에 속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팔거리현은 지금의 칠곡 지역(관문동, 태전동, 구암동, 읍내동)으로, 신라 경덕왕 때 팔리현(八里縣)으로 개칭되었는데, 북구 지역은 대구현과 팔리현에 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팔리현은 고려시대 초기 다시 팔거현(八居縣)으로 개칭되었으며, 후에 팔거현(八居縣)의 거(居)자가 거(莒)자로 바뀌어 팔거현(八莒縣)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접어들어서도 대구 본부의 일부와 성주부 팔거현에 속해 있었다. 특히 금호강과 신천이 만나는 합류지점의 저습지대가 현재 북구 지역의 중앙부에 해당한다. 그 후 숙종 연간의 행정조직 정비를 계기로 대구본부 달서면(達西面), 서중면(西中面)과 칠곡도호부 팔거면 지역에 속하게 되었다.

1596년(선조 26)에는 경상도감영이 일시적으로 팔거현으로 이전되면서 이 지역이 중요시되었다. 그리고 1640년(인조 18) 팔거현 내에 가산산성(架山山城)이 축조되었다. 또한 주치(州治)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산성이 축조됨으로써 방어 상으로 그 중요성이 강조되어 팔거현은 칠곡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가 개혁되면서 칠곡도호부는 칠곡군이 되어 대구부에 속하게 되었고 이듬해인 1896년 13도제가 실시됨에 따라 경상북도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의 북구는 1938년 11월 2일의 대구부 조례 제22호에 의하여, 경상북도 달성군 성북면에 속하였던 4개 동을 관할한 북부출장소가 그 모태가 되었다.

1963년 1월 1일 기존의 북부출장소와 공산출장소의 동변동과 서변동을 편입하여 대구시 북구로 승격되었다. 1970년 7월 1일 침산1동을 침산1구동과 3구동으로 분동이 이루어졌으며, 1975년 10월 1일 중구 동인3가 일부가 칠성1가동으로, 동구 신암동 일부가 대현동, 복현동으로, 서구 원대동 4·5·6가 및 노곡동, 조야동 전역이 편입되었다. 그리고 칠성동 2가 일부가 중구 태평로2가로, 복현동 일부가 동구 신암동으로 태평로 4·5·6가가 고성동 1·2·3가로 분할·조정되었으며, 동변동과 서변동이 통합되어 동서변동으로 개칭되었다. 또한 동구에서 편입된 신암2동 일부와 3·6동이 대현1·2동으로, 서구에서 편입된 원대동 4·5·6가가 노원동 1·2가동, 3가동으로 개칭되고 구간의 경계 및 동 명칭이 전면 재조정 되었다.

1978년 8월 19일에는 구청 소재지가 칠성2가 470번지에서 북구 고성동 3가 1번지로 이전되었다. 1979년 5월 1일 노원3가동이 노원3가1동과 2동으로, 대현2동이 대현2동과 3동으로 분동되었고, 1980년 4월 1일에는 고성1가동과 고성2·3가동을 통합되어 고성동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81년 7월 1일 대구시가 직할시로 승격된 것을 계기로 경상북도 칠곡군 칠곡읍 전역이 편입되어 칠곡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82년 9월 1일 칠곡출장소에 2개의 행정동이 설치되었으며, 1983년 3월 15일 칠곡출장소의 기구조정이 이루어졌으며, 칠곡출장소 관할구역 내에 칠곡3동이 설치되었다.

1984년 8월 1일에는 북구청이 고성3가 1번지에서 침산동 447의 16번지로 이전되었다. 이후 1987년 1월 1일 동구 연경동과 신암동 일부가 북구에 편입되었고, 동·서변동과 연경동이 합쳐져 무태동으로 행정동 명칭이 변경되었다.

1990년 6월 1일 복현동이 복현1동과 복현2동으로 분동되었고, 1991년 4월 15일에는 북구 의회가 개원되었다. 1992년 9월 1일 산격4동이 신설되었으며, 1994년 7월 1일 칠곡1동이 칠곡1동과 관음동으로 분리되었다.

1995년 1월 1일 대구광역시 북구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1995년 3월 1일 칠곡1동이 칠곡1동과 태전동으로 분동되었다. 1997년 1월 1일 칠곡출장소가 강북출장소로 그 명칭이 변경되었고, 1997년 10월 10일 칠성동2가 일부가 칠성동1가로, 복현동, 검단동 일부가 산격동으로, 동천동 일부가 읍내동으로, 관음동 일부가 태전동으로 조정되었다.

1998년 10월 12일에는 강북출장소 폐지되었고, 칠성1가동과 칠성2가1동이 칠성1동으로, 노원3가1동과 조원3가2동이 노원3동으로, 대현2동과 대현3동이 대현2동으로, 무태동과 조야동이 무태조야동으로, 노곡동과 칠곡2동이 칠곡2동으로 통폐합이 이루어졌으며, 칠성2가2동이 칠성2동으로, 노원1·2가동이 노원1·2동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99년 5월 24일에는 칠성1동과 칠성2동이 칠성동으로 행정동 통폐합이 이루어졌으며, 2003년 3월 10일 칠곡1동이 태전2동과 구암동, 칠곡3동이 읍내동과 동천동으로 분동되었으며, 태전동이 태전1동으로, 칠곡2동이 관문동으로 그 명칭이 변경되었다. 2009년 7월 1일 노원1·2동과 노원3동이 노원동으로 통합되었으며, 동천동이 동천동과 국우동으로 분동되었다. 2011년 7월 4일 대현1·2동이 대현동으로 통합되었다.

행정구역으로는 읍내동, 관음동, 동호동, 학정동, 동천동, 도남동, 국우동, 구암동, 연경동, 동변동, 서변동, 조야동, 노곡동, 태전동, 매천동, 금호동, 팔달동, 사수동, 침산동, 검단동, 산격동, 복현동, 대현동, 노원1~3가, 고성1~3가, 칠성1~2가 등 31개 법정동이 있다.

유물·유적

문화재로는 국가지정무화재인 보물 7점, 시지정문화재인 기념물 2점과 무형문화재 1점, 문화재 자료가 2점 등 총 12개의 지정문화재와 이외 다수의 비지정 문화재가 있다.

산격동 경북대학교에 대구 산격동 연화 운룡장식 승탑(보물, 1963년 지정), 대구 산격동 사자 주악장식 승탑(보물, 1963년 지정), 분청사기 상감연화문 편병(보물, 1963년 지정), 마지 은니 수능엄경 권 제10(麻紙銀泥首楞嚴經卷第十),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1963년 지정), 대구 무술명 오작비(보물, 1969년 지정), 봉화 북지리 석반가상(보물, 1989년 지정) 등의 국가지정 문화재가 소재되어 있다.

또한 구암동 사지(鳩岩洞 寺址)·미륵불 좌상(彌勒佛座像), 읍내동 마애불(邑內洞磨崖佛), 명봉산 봉수(明奉山烽燧), 검단동 토성(檢丹洞土城) 등이 있으며, 이외에도 석불상광배(石佛像光背), 석불좌상1·2·3, 석조비로자나불좌상(石造毘盧舍那佛坐像), 비로자나불좌상(毘盧舍那佛坐像), 나한상(羅漢像), 금강역사상(今剛力士像), 삼층석탑1·2·3·4, 석조모전탑(石造模塼塔), 십이지상각가형석관(十二支像刻家形石棺), 석조부도중대석(石造浮屠中臺石), 연화대석(蓮花臺石)1·2·3, 석등1 ·2·3, 사자족대석(獅子足臺石), 석조귀면이수(石造鬼面離首), 문인석상(文人石像) 등이 있으며, 이것들은 경북대학교 야외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한편 관방유적으로는 노곡동의 팔거산성(대구광역시 기념물, 1988년 지정)이 있다.

한편 시 지정 문화재자료로는 산격동의 구암서원숭현사(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1982년 지정), 읍내동의 칠곡향교대성전(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1982년 지정) 등이 있으며, 서원으로는 매천동의 매양서원(梅陽書院), 서변동의 서계서원(西溪西院)이 있으며, 비각으로는 노곡동 동원각(同原閣), 도남동 창렬각(彰烈閣)과 정효각(旌孝閣), 서변동 효열각(孝列閣), 노원동 1가 효사각(孝思閣), 산격1동 서명보(徐明普) 효자각(孝子閣)이 있다. 이외에도 검단동의 압로정(押鷺亭), 읍내동의 구천서당(龜川書堂), 구암동의 운곡서당(雲谷書堂) 등이 있다.

대구시 지정 무형문화재로는 구암동의 대고장(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1996년 지정)이 있으며, 현재 큰북 제작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선사유적으로는 산격동 연암공원 일대의 연암산 선사유적(燕岩山先史遺蹟), 침산동의 침산 선사유적(砧山先史遺蹟)이 있다.

고대 유적으로는 팔달동 유적(八達洞遺蹟), 동천동 유적(東川洞遺蹟), 구암동 고분군, 복현동 고분군(伏賢洞古墳群), 서변동 고분군, 금호동 고분군(琴湖洞古墳郡), 복현동 우각형파수 산포지(伏賢洞牛角形把手散布地) 등이 있다.

또한 비지정문화재인 재실, 비각, 서당 등 75점이 분포하고 있다. 재실로는 산격동 체화당(逮華堂), 검단동 의현사(義峴祠), 서변동 환성정(喚惺亭)과 송계당(松溪堂), 동변동 영사재(永思齎)와 화수정(花樹亭), 노곡동 경의재(景毅齎)와 영모재(永慕齋), 도남동의 도남재(道南齎), 연경동 오사재(五思齋)와 이우당(二憂堂), 국우동의 도남정사(道南精舍)와 원모재, 동호동의 도산재(道山齋), 산격1동 용담재(龍潭齋)가 있다. 그밖에 서변동의 능성세가(陵城世家), 구암동의 이인술씨 민가(民家)등이 보존되고 있다.

비석으로는 칠곡2동 판관서유교영세불망비(判官徐有喬永世不忘碑), 산격동 달성서공 송덕비(達成徐公 訟德碑), 산격동 경북대 석빙고비(石氷庫碑)와 이방 정건학 유공불망비(吏房鄭建鶴有功不忘碑), 검단동 송담(松潭) 채응인 선생 유허비와 의사 소몽 채기중 순국기념비(義士素夢蔡其中殉國記念碑)가 있다.

한편 시 기념물로 국우동의 국우동탱자나무(대구광역시 기념물, 1992년 지정)이 있으며, 노거수·보호수로는 매천동 은행나무, 도남동 느티나무, 국우동 느티나무, 동변동 느티나무, 연경동 느티나무, 서변동 성북초등학교 왕버들, 동변동의 왕버들 집단, 모감주 나무 등이 있다.

교육·문화

조선시대의 사학(私學)기관은 서원과 서당이다. 서원은 교육의 기능을 가지면서도 선현을 봉사(奉祀)하는 사묘(祠廟)를 건립하여 사림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역할도 담당하였다. 북구 연경동의 연경서원(硏經書院)은 대구 지역 최초의 서원일 뿐 아니라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1563년(명종 18)에 건립되었다. 이 서원은 퇴계의 문인인 이숙걸(李淑榤)이 연경동에 세웠던 서당이 부사 박응천(朴應川)의 후원으로 서원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그 외 서원으로는 1781년(정조 5) 서변동에 세워진 서계서원(西溪書院), 1824년(순조 24) 검단동에 세워진 서산서원, 1831년 매천동에 세워진 매양서원(梅陽書院)이 있다. 그 후 1932년 구암동의 운곡서당(雲谷書堂), 1936년 읍내동의 구천서당(龜川書堂)이 건립되었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9개교, 중학교 23개교, 고등학교 16개교, 특수학교 1개교, 영진전문대학교, 대구과학대학교, 대구보건대학교 등 전문대학 3개교와 4년제 종합대학인 경북대학교가 있다.

산격동에 입지하고 있는 국립종합대학인 경북대학교는 대구사범대학(1923년 대구사범학교 설립)·대구의과대학(1923년 대구의학전문학교 설립)·대구농과대학(1944년 대구농업전문학교 설립)을 모태로 1946년 국립대학으로 승격된 이래, 1951년 문리과대학과 법정대학을 신설하여 국립 경북대학교로 개편되었다. 그리고 복현2동에 위치한 대구성보학교는 지체부자유 공립 특수학교로 1973년 3월 12일 개교하여 유, 초, 중, 고, 전공 과정으로 편성하고 있다.

문화공간으로는 공공 공연장 3개, 민간 공연장 2개, 영화상영관 21개의 공연시설과 화랑 1개의 전시실, 구민회관 1개, 청소년회관 2개의 지역문화 복지시설이 있으며, 기타시설로 문화원과 공공 도서관인 대구광역시립 북부도서관, 경북대학교 박물관이 있다.

특히 칠성2가에 위치하고 있는 대구오페라하우스는 단일 공연장으로 국내 최초 오페라전용극장이며, 전국에서 처음으로 시정 산하기관으로 2003년 개관하였다. 현재 ‘대구국제오페라축제’를 비롯하여 음악회, 뮤지컬, 발레 공연 등 다양한 장르의 공연이 이어지고 있다. 이 대구오페라하우스는 제일모직이 1996년 6월 대구사업장을 구미로 이전할 당시, 삼성그룹의 발원지이기도 한 이곳 제일모직 터에 시민을 위한 문화공간을 건립하여 대구광역시에 기증하였다.

1999년 10월 9일에 개관한 북구문화예술회관은 지역주민들을 위한 기획공연, 전시회, 영화상영, 문화강좌운영, 스포츠센터운영 등 지역 주민들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지역향토 문화의 계승, 발전 홍보를 위해 2000년 1월 지방문화원을 개원하여 문화행사, 전시회, 공연 등 다양한 문화 사업을 개최하고 있다.

그리고 북구청소년회관은 2000년 12월 산격2동에서 개관하였으며, 각종 공연, 전시, 취미활동, 스포츠 등 종합적인 문화 공간으로 청소년의 정서함양과 건전한 놀이문화 정착을 위한 공공시설로 활용되고 있다.

경북대학교 박물관은 모두 6개의 전시실로 나누어져 있으며, 금속류, 옥석류, 도자기 등 총 7000여 점의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특히 박물관 건물 주위에 조성된 야외박물관인 청파원에는 석탑, 석불, 부도 등이 입지하고 있다. 특히 여기에 소장된 고려시대의 부도 2기는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북구에서는 다양한 문화축제가 개최되고 있다. ‘국제오페라축제’는 대구의 대표적인 축제 중 하나로 대구오페라하우스의 개관을 계기로 하여 매년 9∼10월경에 열리며, 대구광역시가 개최하고 있다. 그리고 매년 10월 중에 열리는 ‘북구문화예술제’는 북구문화예술회관 주관으로 다양한 장르의 공연 및 전시를 통하여 북구 구민이 다함께 참여하는 주민참여마당이 되고 있다. 그리고 ‘북구민 한마음 축제’는 2001년부터 지역주민이 주체가 되어 각 동별로 그 실정에 맞는 프로그램으로 구성함으로써 동민이 다함께 참여하는 ‘동민 한마음 축제’로 전환되었다.

동 단위 축제로는 1995년부터 칠곡 주민의 단합과 문화 창달을 위하여 칠곡청년봉사회 주관으로 매년 개최되고 있는 ‘옻골문화축제’가 있다. 그리고 1993년 이후 5월 중 개최되는 오봉산의 아카시아 꽃과 관련한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한 문화행사 및 체육행사인 ‘오봉산 아카시아꽃 축제’가 있으며, 이 밖에 ‘벚꽃축제’, ‘달집태우기 축제’가 있다.

생활 속 문화행사로는 1999년부터 매년 7월∼8월 중(4회) ‘한여름 밤의 작은 음악회’가 개최되고 있으며, 북구 관내 대단지 아파트단지를 순회하면서 개최되고 있는 ‘찾아가는 음악회’도 운영되고 있다.

복지시설로는 북구노인복지회관과 강북노인복지관, 대불노인회관 등의 노인복지시설과 선린종합사회복지관이 있으며, 그 외 북구보건복지센타, 북구자원봉사센터 등이 있다.

민속

칠곡 지역과 무태 및 검단동의 자연마을에서는 아직까지도 비교적 많은 민속문화가 전승되고 있다. 북구 관음동과 도남동 일대에서는 칠곡 농악과 지신밟기가 존속되고 있다. 특히 관음동에서는 30여 년 전부터 풍물계가 조직되어 명절에 풍물을 쳤으며, 칠곡 지역 농악대회에 출전하기도 하였다.

검단동에서는 1980년대까지 동제를 지냈으며, 이 때 당내림굿을 하였고 동제가 끝나고 나면 지신밟기를 하였다고 한다. 이 행사 때 검단동 풍물계가 풍물을 쳤다고 한다.

침산1동에서는 침산동 줄당기기가 1930년대까지 음력 정월 보름에 시작하여 2월까지 수시로 행해졌다. 현재의 동사무소 앞길을 경계로 위 깎단과 아래 깎단으로 나누어 줄당기기를 하였다. 웃깎단은 동쪽에서 숫줄을, 아래깎단은 서쪽에서 암줄을 당겼다.

팔달동에서는 정월보름과 2월에 연날리기가 성행하였다. 특히 2월 영등에 소지를 올리고 난 뒤, 소지종이로 연을 만들어 날렸는데, 이 연을 액막이연이라고 하였다. 액막이연 날리기는 무태 연경마을, 칠곡 도남동, 검단동, 침산동 등의 금호강변의 여러 마을에서도 행하여졌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설화·민요

북구 지역에는 많은 전설들이 전해지고 있다. 칠성동이라는 동네 이름은 1785년(정조 19)부터 1797년까지 경상감사를 지냈던 이태영이 북두칠성 꿈을 꾸고는 일곱 개의 커다란 바위에 자신의 일곱 아들의 이름을 새겼다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 바위들은 태평로의 대구시민회관 앞에 있었으나 1998년에 칠성동민들의 요청에 의해서 지하철 대구역사 입구로 옮겨졌다.

경북대학교 동북쪽의 산격동 복현오거리 부근에 있었던 배자못은 원래 배채못이라 불리었다. 그 이유는 이 부근에 배씨와 채씨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은 못이 매립되어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또한 이 부근에는 작살고개가 있었다. 이 작살고개라는 이름은 이 지역에서 태어난 사람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들 반란군은 이 고개 마루에서 관군에 의하여 대패하였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연경동의 태봉 마을은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붙여졌다는 ‘연경(硏經)’이라는 이름을 함께 사용되고 있다. 태봉은 한자로 태봉(胎封)·태봉(胎峰)이라 표기되는데, 이는 광해군(光海君)의 태(胎)를 묻은 봉우리라는 뜻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탯덩이’라고 불리는 봉우리에는 최근까지도 왕자(王子)의 태실임을 밝히는 ‘왕자경룡아기씨태실(王子慶龍阿只氏胎室)’이라 쓰인 비석 조각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일제의 국권강탈 직후에 태실이 파괴되어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다. 또한 연경동에는 도덕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연경동 뒷산인 태봉에 태실이 생기고 난 뒤부터 마을의 처녀나 갓 결혼한 새색시들이 봄만 되면 태봉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는 결국은 미쳐서 마을을 도망치는 일이 자꾸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무당을 불러 굿을 하니 태봉에 세워둔 석상 때문이라고 하자, 마을 사람들이 왕실에서 세운 석물을 마음대로 없앨 수는 없어서 결국 마을 앞에 소나무를 심어 도덕마을 바로 정면에 있는 태봉을 가렸다. 그 후로는 여자가 미쳐 마을을 떠나는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 후 마을 전체가 소나무를 가꾸기 시작했고, 그 숲의 이름을 ‘수구막’ 또는 ‘수구맥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매년 정원 보름날 동네 사람들이 그 숲에 모여 풍악을 울리고, 한 해 동안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기원하면서 또 고마움을 표시하는, 즉 ‘도덕을 숭상하는 마을’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풍습이 1960년대 후반까지 전해 왔다. 그런데 이러한 마을행사가 중단된 이후 , 그때까지 울창했던 소나무 숲이 병이 들거나 태풍이 불어 한꺼번에 죽어버렸다고 한다.

매천동에는 조선 중기 무렵부터 탈안(脫鞍) 바위라고 불려지고 있는 큰 바위가 있다. 이 바위 이름의 의미는 말안장을 벗어놓은 바위라는 뜻으로, 임진왜란 때 왜군이 침략해오자, 경상감사가 소수의 병력으로 방어하기 위해 대규모의 병력이 숨겨두고 있는 것처럼 탈안바위 위에 병사들에게 말안장을 벗겨 놓아두고 휴식을 취하는 척하였다. 이에 왜장은 겁을 먹고 군대를 철수시켰다고 하는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매천동 솔야松野에는 광야제(廣野堤)라는 큰 못에 대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고려시대에 이곳에 노씨 성을 가진 집안이 살고 있었는데, 여덟 형제가 함께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가 집안을 빛냈다고 한다. 그러나 간신들의 모함으로 여덟 형제는 모두 관직을 빼앗기고, 더구나 그 집안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집을 헐어서 못을 만들고 집안 살림도 모두 물에 잠기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물에 잠긴 이 집안의 물건에 손을 대면 천벌을 받는다고 하여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서변동의 아랫마을 뒷산 중턱에는 있는 능성구씨 집안의 재실의 맞은편에 있는 조그만 ‘말샘’에 얽힌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수십 년 전에 한 장군이 조야동 뒷산인 함지산에서 걸어 내려와 이 샘에 도착하니 말 한 마리가 나타나서 그 장군을 태우고 무태마을 앞들을 뛰어 달렸다고 한다. 그 이후로 이 샘은 ‘말샘’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금은 ‘말샘’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고 있지는 않지만 물은 계속 고여 있다. 그리고 그 때 장군이 가지고 있던 말채찍을 부러뜨려 한 가지는 무태마을 앞들에, 그리고 나머지 한 가지는 무태마을에서 제일 높은 가남봉 정상에다 꽂았는데, 이 가남봉 전상에 꽂은 나무를 말채찍이라는 뜻에서 ‘마치나무’라 하여 마을 사람들이 모두 영험이 있는 나무로 여기고 신성시하였다. 그러나 산불로 이 나무는 대부분 소실되고 밑둥치만 남았는데, 그마저도 약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파가는 바람에 지금은 구덩이만 남아 있다. 이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광주지역 등에서 크게 활약한 김덕령(金德齡) 장군이라는 설도 있다. 또 지금의 연경동 뒷산에는 그 말발굽 자리가 남아 있다고 하는 ‘말발굽바위’가 남아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한 서변동 무태(無怠)마을에는 조산에 얽힌 전설이 있다. 고려 초기 이 마을에 은(隱)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 집안의 아주 큰 부잣집 맏며느리가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 귀찮고 힘이 들어, 집 뒤의 산을 파헤치면 손님들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어느 스님의 말을 듣고 그 산을 파내버렸다고 한다. 그러자 학 3마리가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이후 남편을 비롯한 집안의 남자들이 하나, 둘 죽으면서 집안이 기울기 시작하였다. 이에 은씨 집 맏며느리는 크게 뉘우치고 하인을 시켜 산을 다시 쌓게 했지만 날아간 학은 돌아오지 않고 집안의 살림도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 마을 사람들은 학이 날아버렸다는 뜻으로 그 산을 가리켜 ‘조산(鳥山)’, 혹은 며느리가 다시 산을 돌로 쌓아 올렸다는 의미의 ‘조산(造山)’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은씨들은 지금 무태마을에 겨우 2-3가구만 살고 있고, 조산 아래로 고속도로가 지나가고 그 주위는 과수원으로 이용되고 있어 그 흔적은 거의 찾아 볼 수 없고 자리만 확인될 뿐이다.

관음동에는 관음동 농요인 「모찌는 소리」,「모심는 소리」,「논 매기 소리」, 「타작소리」, 「어사용」 그리고 「방애타령」 등 다수가 전승되고 있다.

무태동 서변마을에도 서변동 모내기소리와 방애타령이 내려오고 있다. 「모내기소리」는 4음절 형식이다. 1음절이 6자와 4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방애타령」은 매김 소리가 2음절이다. 1음절이 3∼4자로 구성되어 있다. 「모내기 소리」의 가사는 “상주야 삼각산 흐른물에 상추심는 저 큰아야 / 이풀랑 훌터서 광지리담고 줄기 한상 나를 주게 / 이물기 저물기 다 흐러놓고 주인내양반 어데갔노 / 무네야 대장부 손에 들고 첩의방에 놀러갔네”이며, 「방애타령」의 가사는 “오∼ 방헤야 오∼ 방헤야 / 이 방아가 누 방아고 오∼ 방헤야 / 경신년 조작방아 오∼ 방헤야 / 빙빙돌아 돌방아 오∼ 방헤야 / 둘이 찧는 가래방아 오∼ 방헤야 / 하나둘이 찧는방아 오∼ 방헤야 / 열두무리 잡수시오 오∼ 방헤야”이다.

검단동 모내기 소리는 아침과 오후, 저녁때 부르는 소리로 구분된다. 4음절 형식으로 1음절이 5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선소리와 뒷소리가 있다. 「오전에 부르는 소리」의 가사는 “이물기 저물기 다흩지나 놓고 진내양반 어드로 갔노 / 무네야 대장부 손을들고 첩의 방에 놀러갔네 / 이논뺌이야 모를 숨어 이리봐도 정할레라 / 우리부모님 산소등에 소를 숨아도 정자렐라”이고, 「오후에 부르는 소리」의 가사는 “상주야 산간에 흐른물에 상추심는 저큰아가야 / 잎을 훌터서 그릇에 담고 줄기한상 나를 주소 / 가래지고 강넘어 밭에 목화따는 저 큰아가 / 목화 속아는 내따주마 백년해로 나카사다 / 새박부터는 점심먹고 반달같이 떠오나오네 / 지가무슨 반달이고 초승에 월색이 반달이지”이고, 마지막으로 「저녁에 부르는 소리」의 가사는 “양산통도사 큰절터에 알배기 처자 눕었네 / 오너라 해가야 골골마다 연기나네 / 우리야 임은 어디가고 연기낼 줄 모르는고 / 오늘 해는 다 저문날에 무슨행상 떠나가노 / 이태백이야 본처죽어 임의행상 떠나가네”이다.

도남동의 「어사용」은 나무꾼이 나무할 때 부르는 소리로, 흔히 부르는 ‘구야구야 갈가마구-’하는 노래이며, 4음절형식이고 1음절이 4자로 구성되어 있다. 가사는 “구야구야 까마구야 식경영천 까마귀야 / 산풀비고 까마구야 이풀 저풀 비어서 / 퇴비증산 하도록-”이다.

산업·교통

토지는 총면적 94.08㎢ 중 임야가 46.1㎢, 대지가 13.5㎢, 경지가 8.5㎢, 도로 8.6㎢, 하천 6.0㎢, 공장지 2.8㎢, 학교 2.0㎢, 기타 5.2㎢로 이용되고 있다. 경지 중 논은 3.8㎢이며, 밭은 4.7㎢ 이다.

금호강 북편의 북구의 농촌 지역은 점차 도시화에 밀려 일부 지역이 택지화되면서 경지면적이 크게 줄어 약 574㏊이고, 대부분의 잔여농지는 개발제한구역 내에 분포하고 있다.

원예작물은 시설채소가 중심이며, 이러한 시설 채소류는 대도시 근교라는 지리적 조건을 이용함으로써 타 원예 작물보다 비교우위성을 가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높은 소득원이 되고 있다. 그 외 과수·화훼·특작 등은 극히 미미한 실정이다. 그러나 북부 농수산물도매시장이 관내에 입지하고 있어 생산된 채소의 판로개척에는 큰 어려움이 없을 뿐 아니라 대구 지역 농산물 유통의 거점이 되고 있다.

북구는 1936년 일부 지역이 공업지조성지구로 지정된 이래, 6·25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공업지구로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60년대와 70년대에는 3공단과 검단공단이 조성됨으로써 인근의 서대구공단과 함께 대구 지역 섬유·기계·금속산업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여 왔다. 그러나 최근 공장들이 달서구의 성서공단으로 이전해가면서 공업기능이 줄어들었다.

특히 2000년 이후 3공단 및 검단공단의 섬유업체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제조업체가 타 지역으로 이전한 결과, 북구에는 중소기업의 비중이 크게 늘어났다. 즉 제조업체 수는 대구에서 가장 많은 8072개 업체인데 비하여 종사자는 3만 4931명에 지나지 않아 전체 업체의 60% 이상이 종사자수 5인 이하의 소규모 업체이다.

이들 업체의 약 55%는 기계업종으로 자동차 부품, 절삭가공, 안경 산업, 기계제작, 금형산업이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점차 전기·전자·반도체·무선통신 관련업체가 증가하는 추세를 나타내고 있다. 지역별 분포를 보면, 3공단을 중심으로 노원동, 침산동 일대에 4,700여 개, 검단지방산업단지를 중심으로 인근 지역에 1000여 개의 업체가 입지하고 있다.

3공단은 1965년 2월 지방공업단지로 지정되어 1967∼68년 노원3동 일대에 조성된 공업지역으로, 당시에는 대구광역시에 산재하고 있던 경공업 제조업체를 집단화하여 공해방지를 통한 도시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성되었으나, 시가지가 점차 확대됨에 따라 내부도시(inner city)에 속하게 되었다. 2015년 현재 총 면적은 1679㎢로, 2072개의 업체가 가동 중이며, 그 중에서 금속가공제품제조업체가 1039개 업체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 외에 섬유, 전자의료업체 등 다양한 업체가 입지하고 있다.

검단지방산업단지는 1988년 지방공단(면적 59만 472㎡)으로 지정되어 조성되었다. 조성 당시에는 한일합섬, 유성모직, 갑을, 아주섬유 등5개의 대규모 업체가 입주하여 섬유산업 중심의 공업단지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섬유경기의 침체와 IMF 영향으로 대부분의 업체가 부도 또는 타 지역으로 이전된 결과, 슬럼화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2004년 대구광역시에서 관리기본계획을 변경함으로써 2015년 현재 544개 업체가 입주하여 531개 업체가 가동되고 있다.

1999년에는 이와 같은 북구 관내의 중소기업을 효율적으로 지원하기 위하여 기초자치단체 중 전국 최초로 북구중소기업지원사무소가 설립되어, 각 분야별 전문직 공무원들이 자금지원, 무역지원, 정보지원, 기술지원 그리고 창업보육사업 등을 수행하고 있다.

한편 공장들이 이전해 교통이 편리해진 지리적 이점을 살려 유통단지와 물류단지가 조성되는 동시에 대규모 주택단지가 개발되고 있다. 특히 강북 지역은 1994년부터 칠곡택지개발지구에 이어 동·서변동택지개발지구에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조성되었다. 최근에는 과거 제일모직 자리를 중심으로 한 칠성동과 침산동 일대에도 대규모 재개발 아파트단지가 건설되고 있다.

북구의 공설시장으로는 읍내동의 칠곡 정기시장, 백화점은 칠성2가의 롯데백화점 대구점, 대형할인점으로는 산격2동의 코스트코 홀세일, 동천동의 홈플러스 칠곡점, 칠성2가의 신세계이마트 칠성점과 홈플러스 대구점 등이 있다.

전체 19개의 상설시장이 있으며, 그 중에서 재래시장은 칠성1가의 칠성시장·삼성시장·경명시장, 칠성2가의 대성시장, 노원2가의 팔달시장, 노원3가의 팔달신시장, 복현1동의 복현종합시장, 산격3동의 산격종합시장, 대현2동의 동대구시장 등이다.

특히 칠성시장과 팔달시장이 지역 상업활동의 거점으로 발전하여 왔으며, 매천동의 북부농수산물도매시장도 과일, 채소류 및 수산물을 중심으로 하루 1492톤의 물량이 거래되어 대구 지역 뿐만 아니라 경상북도 지역의 농수산물을 전국 각지로 유통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산격동 일원에 조성된 대구종합유통단지는 83만 7721㎡의 면적에 전시컨벤션센터(EXCO), 패션·디자인개발지원센터, 도매단지, 기업관, 물류단지, 각종지원시설 등이 입지하고 있는 명실상부한 대구 지역 상업유통의 거점이다.

교통은 신천대로, 신천동로, 4차순환선이 연결되는 편리한 시내교통망을 갖추고 있다. 광역교통망으로는 경부고속도로, 중앙고속도로, 중부내륙고속도로지선과 연결되며, 금호J.C와 칠곡I.C 및 북대구I.C가 위치하고 있다. 그 외에 북구 지역은 경부선 철도와 대구 안동 간 국도가 통과하고 있어 대구 지역뿐만 아니라 영남 지역 최대의 교통요충지이다.

관광

대표적인 문화시설로는 경북대학교 박물관과 칠성 2가에 입지하고 있는 오페라하우스를 들 수 있다. 그 외 위락 관광시설로는 근린공원, 어린이공원이 있다. 그 중에서 복현동의 들샘공원에는 폭포와 정자, 놀이터, 오솔길, 거북바위 등의 각종 시설물이 갖추어져 복합휴식공간으로 다양하게 이용되고 있다.

구암동 운암지 수변공원은 저수지의 아름다움을 잘 살린 환경친화적인 조경으로, 노원2동의 해바라기공원은 현대적 감각의 조형미로 인접 주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리고 침산동 오봉산에 조성된 침산공원은 자연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살린 휴식공간과 산책로, 운동시설 등이 갖추어져 있으며, 그 중에서 오봉폭포는 주민의 쾌적한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그 밖에 관음동의 관음공원, 구암동의 칠곡3지구 1호 근린공원, 동천동의 동천공원, 지하철 대구역 광장, 금호강 둔치의 자전거길 등도 역시 중요한 주민쉼터로 활용되고 있다.

북구는 대구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공공체육시설이 집중적으로 입지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시설로는 대구시민운동장을 들 수 있다. 대구체육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는 대구시민운동장은 고성3동에 입지하고 있다. 야구장, 시민체육관, 테니스장, 씨름장, 보조경기장이 함께 갖추어져 있다.

1948년 4월 20일 종합경기장으로 개장한 야구장은 1981년 2월 완공되었으며, 2015년까지 프로야구팀 삼성 라이온즈의 홈구장이었다. 특히 시민운동장에 입지하고 있는 대구실내빙상장은 대구에서 유일한 실내빙상경기장이다. 산격동에 입지하고 있는 대구실내체육관은 5,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다. 그 외 복현2동, 산격동, 관음동 등 11개 동에 체육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지역축제로는 지하철 1호선의 개통을 축하하고 재래시장 활성화를 위하여 1998년부터 개최되어 대구 지역의 대표적 시장축제로 뿌리내리고 있는 ‘칠성종합시장축제’를 들 수 있다. 그리고 ‘섬유패션축제’는 세계 최대의 섬유산지이며, 섬유패션의 특화된 대구를 알리기 위해 개최되는 행사로 산격동의 EXCO, 한국패션센터, 문화예술회관을 중심으로 매년 봄(3월), 가을(11월) 두 차례에 걸쳐 열리고 있다. 봄에는 국제섬유박람회(PID)와 연계하여 대구컬렉션, 한복패션쇼가 개최되며, 가을에는 국제패션페어, 전국대학생패션쇼, 전통문양텍스타일공모전 등이 개최된다.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는 9∼10월경 ‘국제오페라축제’가 열리며, 매년 10월 중에는 ‘북구문화예술제’가 개최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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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분포지도』(대구광역시·재단법인 영남문화재연구원, 2006)
『통계연보』(대구광역시, 2005)
『구정현황』(대구광역시 북구, 2005)
『구정백서』(대구광역시 북구, 2005)
『지방행정구역요람』(행정자치부, 2003)
『새로 쓴 대구역사기행』(향토사교육연구회, 2002)
『대구시사』(대구광역시, 1995)
『대구행정구역변천사』(대구광역시, 1995)
『한국관광자원총람』(한국관광공사, 1985)
『한국지명요람』(건설부국립지리원, 1982)
『한국지명총람』(한글학회, 1979)
대구광역시북구(www.buk.daegu.kr)
대구시(www.daegu.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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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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