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으로는 수성구, 서쪽으로는 달서구 송현동, 남쪽으로는 달성군, 북쪽으로는 중구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8°33′∼128°36′,북위 35°48′∼35°51′에 위치한다. 면적은 17.44㎢이고, 인구는 16만 852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3개 행정동(3개 법정동)이 있다. 구청은 대구광역시 남구 봉덕동에 있다.
지형 · 지세는 전형적인 남고북저형이다. 남부 산지는 비슬산(琵瑟山, 1,084m)을 주봉으로 하여 북동 방향으로 최정산(最頂山, 915m), 청룡산(靑龍山, 793m), 산성산(山城山, 653m), 앞산(660.3m), 대덕산(546m)으로 연결되는 비슬산괴(琵瑟山塊)이다. 북쪽 지역은 남부 산지와는 달리 낮고 완만한 신천 주변에 충적평야로 이루어져 있다.
남구를 둘러싸고 있는 비슬산괴에는 앞산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달서구와 경계를 이루는 대덕산이, 동쪽에는 산성산이 있다. 특히 앞산의 북쪽 사면에는 정상에서 안일사 · 안지랑으로 이어지는 안지랑골, 은적사 봉덕동으로 이어지는 큰골 등이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산성산 북동쪽 사면의 고산골, 동쪽 사면의 용두골 등 크고 작은 골짜기가 발달하였다.
대부분의 중소하천은 대부분 남부 산지에서 발원하여 북류하여 신천(新川)에 합류한다. 신천은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우미산 남서쪽에 위치한 밤티재 부근에서 발원하여 달성군 용계동 가창교 부근에서 비슬산 북동쪽에서 발원하여 서류하는 용계천를 합류하여, 다시 북구 침산교 부근에서 금호강(琴湖江)에 합류한다. 신천의 길이는 약 27㎞이고, 유역면적은 159.8㎢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고산천과 대덕천이 있다. 고산천은 산성산 서쪽 159m 고지에서 발원하여 북동 방향으로 흘러서 고산골에서 신천에 합류하는 유로연장 약 4㎞정도의 하천이다. 대덕천은 앞산과 산성산 사이의 분수계(해발고도 650m) 북사면에서 발원하여 북류하여 대덕사, 앞산공원을 지나 남구 봉덕동 일대에서 선상지를 형성하면서, 이천동에서 동류하여 신천으로 유입한다.
그 외에 대명천은 앞산(해발고도 660.3m)의 북사면에서 발원하여 북류하고 안지랭이를 지나 대명동 경상공업고등학교 남쪽에서 방향을 직각으로 바꾸어 성당동, 본리동을 거쳐 진천천에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유입한다.
지질도 지형과 마찬가지로 남부 산지와 북부 저지로 구분된다. 남부는 경상계 관입석영안산암질각력암이 기저 기반암을 형성하며 그 위에 경상계불국사 관입암류인 화강반암류와 규장암류가 관입하였다. 북부 신천 유역의 저지는 하성퇴적층과 산지의 선상지성 퇴적층인 제4기 충적층으로 관입암류를 부정합으로 피복하고 있다.
대구 지역은 북동부와 남부는 산지로 둘러싸여 있고, 서부가 상대적으로 개방되어 있는 분지형 지형으로, 겨울에는 춥고 여름은 무더운 내륙분지형 기후의 특성을 가진다. 연평균 기온은 14.8℃로, 월평균기온은 7월이 27.3℃로 가장 높고, 1월이 0.8℃로서 가장 낮다. 2013년 남구의 연평균 기온은 15℃였다.
대구 지역의 지난 30년 간(1973년∼2002년) 강수량은 1,035.8㎜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과우지역이다. 1년 중 6~9월에 비가 가장 많이 내리며, 월강수량은 가장 많은 달은 8월로 370.3㎜이다. 반면에 1월 강수량은 1.2㎜에 지나지 않는다. 2013년 남구의 강수량은 996.4㎜를 기록하였다.
이 지역의 선사시대 유적으로는, 1994년 발견된 청동기시대의 이천동 지석묘군 5지역이 있다. 이를 통하여 최소한 청동기시대부터 이 지역에서 사람들이 거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고인돌은 큰 천정돌 아래 수기의 석곽이 축조된 형식으로 묘표 · 개석식 고인돌에 속하며, 마제석검, 홍도 등은 출토되었으나 청동제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8세기 신라시대 대구 지역은 수창군과 그에 영속된 대구현, 팔리현, 하빈현, 화원현 등의 다섯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수창군은 당시 대구 지역의 군치(郡治)가 위치하여 있던 지역으로서 현재 신천 상류지역에 해당한다. 대구현은 신천의 중하류지역이며 오늘날의 대구의 중심부 지역으로 당시 남구지역은 수창군과 대구현 일부에 속하였다. 757년(경덕왕 16)에 대구현으로 개칭하였다.
1419년(세종 1)에 대구군으로, 1466년(세조 12)에 대구도호부로 승격하였다. 남구지역은 대구도호부(大邱都護府) 관내 수성현(壽城縣)의 하수서면(下守西面)에 속했으나, 그 뒤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대구군(大邱郡)의 하수서면이 되었다가 1910년에는 대구부(大邱府) 상수서면(上守西面)으로 개편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대구부의 관할구역이 오늘날 중구에 해당하는 대구면으로 크게 축소됨에 따라 이 지역은 신설된 달성군(達城郡)의 수성면(壽城面)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1938년에 대구부의 관할구역이 확장됨에 따라 남구지역이 속했던 수성면이 다시 대구부로 편입되면서 새로 설치된 동부출장소의 관할 하에 놓였다.
1949년 8월에 지방자치법 시행에 따라 대구부가 대구시(大邱市)로 개칭되었고, 1951년에는 이 지역의 21개 동을 관할하는 남부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63년에는 구제(區制) 실시로 남부출장소 일원에 남구가 설치되었다.
1970년 이후 늘어나는 행정수요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행정동이 신설되고 일련의 분동(分洞)과 조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0년에는 남산동 전부, 대봉1동과 대봉3동 일부, 대명4·6동 등이 중구로 편입되고, 대봉3동 일부가 이천1동으로, 대봉2동이 이천2동으로 개칭되었다.
1981년에는 대구직할시 남구로 승격됨과 동시에 달성군의 월배읍을 편입하고 월배출장소를 설치하였다. 1988년에는 월배출장소 관할의 월배1·2·3동과 송현1·2동을 신설된 달서구로 편입시키고 출장소를 폐지하였다. 1995년 1월 1일부터 대구직할시 남구에서 대구광역시 남구로 변경되었다.
1998년 7월에 이천1동과 2동을 이천동으로, 대명2동과 8동을 대명2·8동으로, 대명3동과 7동을 대명3·7동으로 각각 통폐합 하였다. 또한 2002년에 대명3·7동을 대명3동으로, 2003년 4월에 대명2·8동을 대명2동으로 동명을 변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89년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된 탁영종택문적(濯纓宗宅文籍)은 현재 남구 봉덕3동의 김상인이 보관 · 관리하고 있다. 이는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희생된 탁영 김일손(金馹孫, 1464∼1498)과 부인에게 내린 교지 5종과 자계서원(紫溪書院)에서 의식이 있을 때 그 순서를 적은 글인 홀기 및 둔전답 등본이다.
1992년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판소리 명창 이명희는 1990년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판소리 명창부 경연대회에서 영남인으로는 처음으로 영예 대통령상을 수상하였으며, 이후 국창 김소희로부터 판소리 다섯마당을 전수받았다. 명창 이명희의 창법은 송흥록을 시조로 하는 동편제 계통으로 동편제 판소리의 맥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1999년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단청장 조정우는 1959년에 단청에 입문한 이후 단청에 전력하면서 송광사 대웅전, 지장전의 외벽 벽화 등의 작품을 통해 특유의 기능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1988년 대구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된 대덕산성(大德山城)은 남구 대명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구 지역에서 가장 험준한 산세에 축성한 산성으로써, 대구의 진산인 대덕산 안지랭이 계곡을 둘러싸고 축조되었으며 대구시가지 전역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현재 산성은 남아 있지 않고 흔적만이 있을 뿐이다.
그 외에 유적지로는 봉덕토성, 이천동 지석묘군 그리고 왕굴 등이 있다. 봉덕토성은 4∼5세기 삼한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 120∼180m로 작은 규모이다. 일명 용두산토성이라고도 불리는 이 성은 규모가 작고 야산에 축성되어 있지만, 도벽은 흙과 돌을 섞어서 쌓았으며, 둘레는 400m 남짓이다.
1982년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법장사 삼층석탑(法藏寺三層石塔)은 남구 봉덕2동에 위치하고 있다. 높이 340㎝ 폭 95㎝로 본래 이중기단의 삼층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법장사 축대석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이천동 지석묘군은 총 5개군으로 분류된 고인돌밀집지역으로 신천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고인돌은 개석식(묘표식)으로 현재 훼손 정도가 심하여 알아보기 힘들지만, 일본인 학자인 후지다 로우사꾸에 의해 1927년부터 시작된 발굴작업에 의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이천동 지석묘군 Ⅱ는 모두 5기의 고인돌이 밀집하고 있는데 1980년에 경북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재조사 되었다. 또한 신천변에 자리하고 있는 Ⅲ과, 이와 50m 떨어진 거리에서 발견된 Ⅳ 그리고 Ⅴ지역의 고인돌은 모두 돌널형과 돌덧널형의 형태를 띠고 개석식(묘표식)이다. 이천동 지석묘군 발굴작업 중 다수의 토기와 석검들은 그 시대 생활상을 반영하고 있다.
1914년에 건립된 대구 최초의 ‘서양식 수도공사’인 대봉배수지(국가등록문화재, 2006년 지정)는 남구 이천동 수도산 꼭대기에 만들어진 수도시설로 뛰어난 근대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남구 지역에는 근대 및 그 이전의 교육기관은 존재하지 않았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은 초등학교 11개교, 중학교 8개교, 고등학교 8개교, 특수학교 5개교가 있다. 또한 고등교육기관으로는 대구 · 경북지역 유일의 초등교원 양성기관인 대구교육대학교와 전문대학인 영남이공대학교를 비롯하여, 4년제 대학으로 대구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과 영남대학교 의과대학 그리고 대구대학교 대명동캠퍼스와 계명대학교 대명캠퍼스가 있다.
또한 대구교육대학교 내에 입지하고 있는 교육박물관은 교원양성대학 박물관의 특징을 살려, 민족의 역사와 문화유산에 관계되는 역사학 · 고고학 · 민속학에 관계되는 자료 및 교과서와 교육자료 등을 보관하고 있다. 그 외에 대구고등학교부설 방송통신고등학교와 대구광명학교, 대구영화학교, 대구보명학교, 대구보건학교, 대구덕희학교 등 5개 특수학교가 있다.
특히 이 지역에는 특수학교가 다른 지역에 비하여 훨씬 많은 점과 대구 · 경북지역에 소재하는 대학들의 일부 캠퍼스와 부속병원이 많은 점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이 지역이 대구시가 1981년 직할시 승격 이후 본격적인 시가지 확장 이전까지는 교육도시 대구의 교육중심지이었다는 점에 기인하고 있다.
즉 대구시의 급격한 시가지 팽창으로 영남대학교, 대구대학교, 대구가톨릭대학교의 전신인 효성여자대학교 그리고 계명대학교가 대구시 외곽지역과 경산시 지역으로 이전하고 과거 캠퍼스를 의과대학 및 부속병원이나 일부 단과대학으로 사용하고 있다.
대표적인 문화공간인 대덕문화전당은 남구 대명9동에 위치하며, 1998년 3월7일 개관되어 대구시민 및 남구 주민의 문화공연 및 전시 등 문화욕구 충족의 거점이 되고 있다. 그리고 1998년 5월 9일에 설립된 남구문화원도 남구 지역의 고유문화 개발 보급, 보존, 전승 및 선양을 위한 지역문화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또한 1995년 개관한 공공도서관인 남부도서관이 있다. 남구 대명9동 앞산 순환도로변에 위치하며, 대구 시내 도서관 중 가장 최근에 개관한 도서관 중의 하나이다. 일반 열람실, 종합자료실, 디지털 자료실, 정기간행물실, 어린이열람실, 강의실, 도예실, 회의실, 시청각실, 건강 스포츠 실 등을 갖추고 있어서 남구주민들의 독서문화를 진작시킬 뿐만 아니라 다양한 여가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그 외 대명2동에는 여러 가지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종합 복지센터인 남구종합사회복지관이 있다.
21세기 국가 핵심전락산업인 디지털 산업관련의 통합지원체제 구축하기 위하여 설립된 디지털산업진흥원(DIP)은 대명2동 계명대학교 캠퍼스에 입지하고 있다. 대구 지역을 첨단디지털산업중심도시로 육성하기 위하여 디지털산업 관련 인프라를 구축하고, 이를 이용하여 게임 산업을 비롯한 문화콘텐츠 관련 벤처기업의 창업과 육성을 통하여 지역 관련 산업의 경쟁력 강화와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지역의 문화축제로는 1987년부터 매년 5월에 전통문화 예술행사와 체육행사를 통한 주민화합축제인 대덕제는 전시회, 공연, 음악회, 가요제 등 다양한 예술행사로 구성되는 종합문화예술축제이다. 이 외에도 신천 돗자리음악회, 안지랑곱창 젊음의 거리축제가 있다.
남구 지역의 민속놀이로는 줄당기기가 있다. 줄당기기는 주로 삼남지방에서 성행하던 집단놀이의 하나로 줄싸움놀이, 줄땡기기 등으로 불리고 있다. 매년 음력 정월보름과 2월 사이에 마을 단위로 줄당기기가 행하여졌는데, 특히 용두방천 줄당기기가 대표적이다.
용두방천 ‘큰 줄땡기기’는 정월 대보름에 아이들이 패를 갈라 골목에서 ‘골목줄’ 당기기로, 이 골목줄은 처음에는 가느다란 줄을 어린 아이들이 당기다가 나중에는 볏짚으로 된 가느다란 줄을 나무에다 매어두고 세 가닥의 줄을 세 명이 돌아가면서 꼬아서 점차 굵은 줄을 만들어, 이 줄을 이용하여 어린 아이들 뿐만 아니라 어른들까지 함께 참가하여 전체 마을 구성원이 즐기게 되었다고 한다.
남구에서 전해내려 오고 있는 설화로는 고려 태조와 관련된 왕굴(王窟)과 안지랑이골, 그리고 법장사 삼층석탑(法藏寺三層石塔)에 얽힌 것이 있다.
왕굴은 왕건이 후백제 견훤과 싸우다가 팔공산 근처의 파계재 전투에서 패하여 피신한 굴이라는 것으로부터 유래하였다. 왕건이 이곳에 피신해 있는데 견훤의 부대가 왕굴 근처까지 와서 왕건을 찾으려 하자 갑자기 안개가 끼고 왕거미가 거미줄을 쳐져 왕건이 피신하고 있지 않는 것처럼 위장을 하였기 때문에 견훤의 부하가 왕건을 찾지 못하고 그냥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로 인하여 왕건은 그 난을 무사히 피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고려 건국을 염원하는 기도에 정진할 수 있었고, 후에 고려를 건국하였다고 하여 피신했던 이곳을 왕굴, 그리고 안개가 끼었던 왕굴 주변 골짜기를 안지랑이골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법장사 삼층석탑에 얽힌 전설은 아주 오랜 옛날 어느 한 임금이 왕자가 없어 매일같이 걱정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임금은 꿈에서 백발노인이 나타나 “이곳에서 서쪽 수백 리를 가면 산수가 빼어난 곳이 있으니 그 곳에 절을 짓고 불공을 드리면 그대의 소원을 풀 수 있으리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 임금은 노인을 말을 듣고 산 좋고 물 맑은 곳을 찾다가 앞산의 고산골에 고산사라는 절을 짓고 백일기도를 드렸다. 백일기도 후 바로 곧바로 왕자가 태어났고 그 다음해 또 다시 왕자를 낳았다. 임금은 너무 기쁜 나머지 고산사에 삼층석탑을 세웠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고산사는 불타 버리고 석탑만이 남아 있었는데 왜군이 석탑을 헐어 보물을 훔쳐 가려는 순간 갑자기 벼락이 떨어져 그 왜군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고, 그 때 탑의 일부분도 파손되었다고 한다.
그 후 고산사는 폐사되었고 절터에 방치되어 오던 파손된 석탑을 법장사 스님 7분이 부서진 석탑을 맞추어서 법장사에 재건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석탑은 법장사 삼층석탑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 외에 현재 대명동의 영선시장은 30여 년 전만 해도 영선못이었던 자리인데 이와 관련된 설화도 대구 지역의 유명한 설화이다. 조선 말 영선못을 파기 전 이 근처에 한 관리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한 점쟁이가 이곳을 지나가다가 유심히 지형을 살펴보더니, 그 관리의 집에 들어가 “저기 보이는 넓은 터에는 절대로 집을 짓지 마시오. 그 곳에 집을 지으면 나라에 근심될 일이 생깁니다. 하지만 그 곳에 몇 년이 걸리더라도 큰 못을 만들면 나라에 경사스런 일이 생길 것입니다.”라고 일러 주었다.
관리는 처음에는 믿지 않았으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곧 저수지 축조공사를 시작하였다. 수백 명의 일꾼을 동원하여, 12년에 걸쳐 완공하였다. 이렇게 못이 만들어지자 산에서 흐르는 물을 모아 농사에 이용할 수 있게 되어 백성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며, 여름 장마철에는 물난리도 막을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영선못은 대구의 시가지가 확장되면서 메워져 오늘날의 영선시장이 되었다.
남구에 전해지는 민요는 춘요(春謠), 춘유요(春遊謠)로 주로 봄날에 관련된 노래들이다. 춘유요(春遊謠)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꽃은 피어 나비를 부르고/ 잎은 피어 우거진데/ 이 산에도 꾀꼴꾀꼴/ 저 산에도 꾀꼴꾀꼴/ 황금갑옷을 떨뜨리고/ 벗을 불러 춤을 추자/ 새가 새가 날아든다/ 저 뻐꾹새가 날아든다/ 양류청천 늘어진 가지에/ 제일음을 제가 불러/ 이 산에도 뻐꾹뻐꾹/ 저 산에도 뻐꾹뻐꾹/ 청개벽을 오락가락/ 씨를 뿌리라 재촉한다/ 피리리 아니 노지는 못 하리라.”
토지 지목별 현황을 보면 대지가 6.14㎢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며, 임야 4.01㎢, 공원 2.68㎢, 도로 2.24㎢ 순이다. 토지 용도별 현황은 자연녹지지역이 9.28㎢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일반주거지역이 7.08㎢, 상업지역이 1.05㎢, 그리고 준주거지역이 0.03㎢ 순이다.
2015년 기준으로 남구의 총 사업체 수는 1만 4174개이고, 종사자수는 4만 6275명이다. 1차 산업인 농업, 임업 및 어업은 1개 업체, 광업도 1개 업체가 등록되어 있다. 제조업은 사업체수가 771개에, 종사자수가 1,658명이다. 서비스업은 숙박 및 음식점업과 도매 및 소매업이 가장 높은 비중을 보인다. 남구에 입지하고 있는 전통시장은 16개소이며, 대형마트는 1곳이 있다.
교통은 남북을 연결하는 신천대로와 1997년 8월 개통되어 동서를 연결하는 앞산순환도로, 그리고 1997년 11월 개통된 대구지하철 1호선이 통과하여 남과 북을 연결하고 있다.
관광지로는 도시자연공원인 앞산공원을 들 수 있다. 앞산은 대구광역시 남구, 수성구 그리고 달서구 등 3개 구에 걸쳐 있다. 공원으로 지정된 면적은 16.77㎢이다. 공원 내에는 크고 작은 경관이 수려한 8개의 골짜기와 20여 개의 약수터 그리고 수많은 등산로가 개설되어 있으며 각 등산코스는 대체로 2시간 정도이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낙동강 승전 기념관과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한 충혼탑이 있으며, 이곳에서는 대구 지역의 현충일 추념식이 거행되고 있다. 이외에도 수영장, 승마장, 궁도장, 심신수련장, 케이블카, 전망대, 어린이놀이시설, 도서관, 대덕문화전당, 청소년수련원 그리고 실내골프장 등이 있어 지역을 대표하는 휴양관광지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미군사 고문단전적기념비(美軍司顧問團戰積記念碑), 경상북도 청도 출신의 시인인 이호우(李鎬雨)의 시비(詩碑), 1929년에 신간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던 송두환(宋斗煥)의 흉상과 1919년 3·1운동을 주도하였던 우제(友濟) 이시영(李始榮)을 기리기 위한 순국기념비(殉國記念碑) 등이 입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 지역의 유서 깊은 사찰인 법장사, 고려 태조 왕건이 공산전투에서 패한 후 신숭겸 장군의 지략으로 탈출하여 이 사찰에서 숨어 무사하였다고 전해지는 은적사, 일제시대 대구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국권 회복을 위한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를 결성하는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독립운동가들의 은신처로 널리 알려진 안일사도 앞산공원 내에 입지하고 있다.
또한 앞산네거리에는 1997년 준공한 앞산네거리 분수가 있다. 분수 주변에는 회양목으로 화단을 조성하고, 백철쭉 외 다수의 수목을 식재하여 시민들에게 쾌적한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앞산공원 외의 관광휴식공간으로는 삼각네거리 테마공원과 이천동 고미술거리가 있다. 삼각네거리 테마공원은 도심 속 휴식 공간을 확보하고 자투리 토지의 활용도를 높이기 위하여 분수대를 설치하였다. 또 토끼 · 오리 등을 방생 · 사육하여 어린이들의 체험학습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천동 고미술거리에는 40여 개의 고미술 상점이 성업 중이다. 이 지역에서 전시 · 판매되고 있는 주요 상품은 고문서, 도자기 및 토기류 등이다. 먹거리 명소로는 대명10동에 있는 대명복개천 회타운이 있다. 복개천 번개어시장 회골목으로도 부르는데 대명천이 복개되기 전 하천변에 차량 노점상이 하나둘씩 모여 영업을 시작하면서 자연발생적인 어시장이 형성되었다.
그 후 1987년 대명천이 복개되자 회식당이 집적하기 시작하였고, 이 지역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어시장 번영회를 결성하였다. 대덕제가 개최되는 기간에는 먹거리 명소로 지정하여 할인행사 등을 통하여 지명도를 높이고 있다. 체육시설로는 봉덕동에 남구구민체육광장운동장이 있다.